설거지는 마치 언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더러운 설거지물과 더러운 냅킨을 가지고도 접시와 컵을 깨끗이 씻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명확한 개념과 적용범위도 뚜렷하지 않은 논리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한 이해를 명백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닐스 보어(부분과 전체 중에서)


누가 능히 탁함으로써 고요히 해서 차츰차츰 맑게 할 수 있으며, 누가 편안함으로써 계속 움직여서 서서히 살릴 수 있겠는가. 이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득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무릇 채우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둘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 
- 노자 원문


저 어둠으로 사물을 다스리면 밝아지게 되고, 혼탁함으로써 사물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맑아지며, 편안함으로써 사물을 움직이게 하면 되살아나게 된다. 이는 스스로 그러한 도이다. '누가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은 그 어려움을 말한 것이며, '서서히'란 세밀하고 신중한 것이다.
- 왕필 주석


닐스 보어는 화학자답게 언어와 개념의 화학작용에 착안해 새로운 가치를 유추하고 있다. 헤겔의 '정-반-합'도 이와 같다. 이처럼 서양에서 무에서 유를 창출한다는 것은 대개 이와 같다. 결국 '유'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며, 이는 '변환'의 개념 이외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노자와 왕필은 화수분처럼 생명이 뿜어져나오는 가상의 공간을 상정함으로써 신비주의의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무와 유, 가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얻고 나서 가치가 생겼다면, 이름을 얻기 전에도 그 가치는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을 유추해보면 이렇다. 동양은 '이미 있다'는 것을 토대로 모든 가치가 이름을 얻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서양은 '생긴다'는 의미에서 '무'와 '유'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으며,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는 않다. 동양은 유와 무 사이에 궁극적인 차이가 없으며, 유를 선택하든, 무를 선택하든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있으며 동시에 없다는 역설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유와 무의 개념이 일시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름만을 바꾸기 때문이다.

유와 무는 멀고도 가까우며, 형제이기도 하며,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것이 신비적인 이유는 궁극에서 시작하기 때문인데, 궁극이기 때문에 모호하며 오묘하다. 서양은 '궁극' 개념을 굳이 취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서양과 동양은 형제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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