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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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intergation)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연구로 시작됐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카를 폰 베어(Karl von Baer), 에른스트 헤켈(Ernst Heackel) 등의 연구로 발생학(embryology)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 왔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20세기 생물학은 크게 보아 자연사, 유3전학, 실험발생학의 세 분야로 나뉘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던 것이 최근에 들어 사뭇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흔히 ‘이보디보(Evo-Devo)'라는 애칭으로 불린다.)이 등장했다. 이보디보는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만남이지만 실제로는 생화학, 생물물리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리학, 내분비학, 면역학, 신경생물학 등 생명현상의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기능생물학(functional biology) 분야들과, 행동생물학, 생태학, 계통분류학, 고생물학, 개체군유전학은 물론, 세균학, 균학, 곤충학, 어류학, 조류학 등의 개체생물학(organismic biology) 들을 포함하는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분야들이 통합되어 생명 현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8쪽

사실, 고전적이고 중세적인 연역의 대안으로 귀납의 방법을 창안한 사람은 베이컨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납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충분히 들을 만하다. 다음 세기에 그의 명성은 주로 그 부분에 모여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귀납의 절차는 단순한 사실들의 일반화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이컨은 "식물 종의 90퍼센트가 노랗거나 빨갛거나 흰 꽃이고 곤충이 찾아든다." 같은 관찰 문장을 귀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현상을 기술하되 편견을 갖지 말고 그것들의 공통된 형질을 모아 중간 단계의 일반성을 가지도록 만들고, 그런 다음 상위 수준의 일반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귀납의 절차라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앞의 문장을 베이컨의 귀납법에 따라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꽃들은 특정한 종류의 곤충을 유인하도록 설계된 색깔과 구조를 진화시켰으며 그런 곤충들은 꽃을 배타적으로 수분시킨다." 이렇게 프란시스 베이컨은 르네상스 시대에 팽배했던 기술(記述, description)과 분류에 관한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추론 방법을 제시했지만, 현대 과학의 핵심을 형성하는 개념 형성의 방법, 경합 가설 그리고 이론에 대해서는 별다른 예견을 하지 못했다. -68쪽

대수기하학의 창시자이자 근대 철학자이며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프랑스 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서사의 선도자이다. 이전의 베이컨처럼 데카르트는 학자들에게 과학하기를 요구했다. 그의 바로 뒤에는 젊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있다. 데카르트는 명확한 연역을 통해 각 현상의 핵심적인 골격만 남기는 과학적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는 3차원이므로 우리가 지각한 것을 세 좌표계의 틀에 맞추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데카르트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라고 불리는 것이다. 세 좌표계를 이용하면 어떤 대상이든 길이, 너비, 높이를 정확히 명시할 수 있다. 이로써 수학적 조작을 통해 본질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기초 형식에서 대수 기호를 제공식화함으로써 이 방법을 완성했다. 따라서 이것은 복잡한 기하 문제를 풀거나, 나아가서 가시적인 3차원 영역을 넘어서는 수학 영역을 탐구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가장 소중한 비전은 지식이 궁극적으로 수학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상호 연계된 진리 체계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비전은 1619년 11월의 어느 날 밤에 일련의 꿈을 통해 다가왔다. 기호들(뇌성, 책, 악령, 달콤한 메론)의 돌풍 속에서 그는 우주가 합리적이며 인과율로 연결된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개념을 물리학에서 의학까지, 즉 생물학에서, 심지어는 도덕적 추론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18세기 계몽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학문의 통일성에 관한 믿음에 토대를 놓았다. -71쪽

중국에서는 왜 데카르트나 뉴턴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이었다. 중국인들에게는 추상적으로 체계화된 법칙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이것은 진(秦) 왕조(기원전221~206년) 시기에 봉건제가 군현 제도로 전환될 당시, 엄격한 통치 법률을 제정한 법가(法家) 사상가들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안겨준 비참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의 엄격한 법치주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어서 개인의 욕망보다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사실은 중국 학자들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인격적인 신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우주에서 자연을 창조한 이성적 존재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꼼꼼하게 기술한 대상들은 보편 원리를 따르지 않으며, 우주적 질서 내의 존재자들이 따르는 특별한 규정 안에서 움직인다. 말하자면 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 즉 일반 법칙이라는 개념이 꼭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탐색하려는 시도 또한 거의 없었다. -76쪽

과학은 제 갈 길로 갔다. 과학자, 과학적 발견 그리고 전문 학술지는 15년마다 두 배로 늘었다. 이것은 17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과학의 성공은 우주가 질서 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에 다시 믿음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의 이러한 필수 전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최초로 생각해 낸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 안에서 더 굳건히 자라났다. 그렇지만 그 중심 방법인 환원주의의 화려한 성공은 계몽사상 프로그램 전체의 복구와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과학적 정보가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별 연구자들은 지식의 통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욱 깊이 밝힐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들은 1700년대 후반 생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겨진 개념이자 금단의 영역인 마음의 물리적 토대를 밝히는 일에 더욱 주저했다.
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데에는 더 소박한 이유가 있었다. 과학자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지적 에너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는 장인(匠人)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전문 분야에만 집중한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세계의 드넓은 윤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첨단 분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만의 발견을 하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계 부분의 연구는 비용도 많이 들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수백만 달러짜리 실험실에 소속된 생산성 있는 과학자들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으며 그것에 이득이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발된 2,000명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에 대한 상징으로 옷깃에 달고 있는 장식에는 과학을 뜻하는 금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자연 철학을 뜻하는 보라색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대부분의 선도적 과학자들의 시선이 그 금에만 고정되어 있으니!-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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