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문 스크랩을 하다가, 나는 외국인이 쓴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서강대 교수로 있는 스티븐 리비어라는 사람이 고정적으로 쓰는 칼럼이다.

며칠 후면 4월3일이 된다. 지금껏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노근리 학살보다 10배나 규모가 큰 제주 4·3사태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당신도 영웅이 되고 싶으면 4·3연구소(www.jeju43.org)의 회원이 되시라. 필자는 지난 2월 회원이 됐다.

'06.4.1 경향신문, '한국에 살아보니' 일부 인용

나는 그날 이곳이 '제주'가 아님을 알았다.

4월이면 제주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4.3주간이라 하여, 대학에서는 마당극, 시화전 등 젊은이들의 발표회가,

이곳저곳에서는 세미나나 각종 문화행사가 꽃을 이룬다.

제주는 이국적인 정취로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번씩 변하는 날씨와 역동적인 구름, 그 구름을 끌고다니는 바람은 제주의 특징이다. 하지만, 볼 만한 곳, 훤히 뚫린 거의 모든 곳에 피묻은 학살터라는 사실을 아는 관광객은 별로 없다. 천혜의 제주 자연은 매우 역설적이다. 

거기다 제의(祭儀)는 참으로 독특하다.

제주는 유난히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어린애들은 얻어먹을 것이 많아서 참 즐거워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묘석은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제주말로는 '백 하르방의 한 손지 묘'라고 한다.

4·3이 다소 진정되어 갈 무렵인 1950년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자,
1947년 3·1시위 사건과 4·3을 거치면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졌습니다. 즉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검거령이었다 하죠.
동으로는 서귀면에서 서로는 애월면에 이르기까지
7개 면에서 모두 130여 명이 검거되었습니다.
무고한 이분들은 당시 대정면 상모리에 위치한 절간고구마 보관창고에 수용되었다가 1950. 8. 20일(음 7. 7)에 알오름에서 모두 처형되었다 합니다.
그후 7년 동안 삼엄한 경비 속에 가족들은 아예 접근을 할 수 없었다 합니다. 
백조일손지묘는,1957년, 처형된 뒤 7년 동안 방치되었기에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었던 유족들이 뜻을 합하여 유골을 거두고 묘지를 구입하여 한 곳에 시신들을 모신 곳입니다.
즉, '백 분의 할아버지 밑에 한 자손'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들을 한 곳에 모신 3년 뒤, 유족들이 '百祖一孫之墓'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 후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으나, 그 비석마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정부에 의해 두 동강나고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helper1021?Redirect=Log&logNo=10000351931

우리 외할아버지는 한학에 정통한 학자라고 한다. 4.3의 어느 날 이슬처럼 속세와 헤어지신 후, 할머니는 밤마다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자를 태우느라 밤을 지새셨다고 한다. 끝도 없이 나오는 할아버지의 유품들이 남아 있는 것조차 남은 사람에겐 '생명의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점집에 가서 나의 사주를 본 모양인데, 점쟁이 왈 "할아버지가 이분(나)께 가진 것을 물려주려고 마음을 먹으신 듯합니다." 암튼 할아버지.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전수해주세요.

난세에는 가장 많은 학살이 자행된다. 별볼일 없는 사람이 미군정에 잘 붙어 그 마을의 살생부를 쥐게 되는 모습은 당시 제주 사회에서느 매우 일반적이다. 천석꾼 만석꾼의 놈팽이 아들놈으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다가 인민정부가 들어서자 '씩씩거리며' 남하한 서북청년의 건달들은 마치 자기들을 쫓아낸 '니북 인민괴뢰정부'에게 맞은 것을 열 배 백 배로 돌려줬다.

강간하고, 음부를 난행하고, 젖먹이를 죽창으로
 꿰어 죽이고 하는 모습을 남편은 낱낱이 지켜봐야했다. 끝으로 거기다 시체 하나(남편)를 더했다.

정부가 4.3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의 정통성에 의문을 다는 형국이기 때문에 5.18의 경우와 동일하게 다룰 수 없다.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당시의 제주는 광복 이후 혼란의 연속이었다. 대다수의 실업난, 생필품의 절대부족, 콜레라 창궐, 극심한 흉년,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재임용, 공무원의 모리배 행태 등으로 제주 사회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다. 삼일절 발포 사건 이후 이에 항의한 '3.10총파업'은 관공서와 민간 기업 등 제주 전체의 95%가 넘는 직장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총파업이었다. 선거판에서 '제주'를 '방향침'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해방 후의 좌우대립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남로당 제주도당은 강성한 편이었다. 미군정이 조사을 제주에 파견해 분석한 결과 총파업의 결정적 원인은 '경찰 발포'와 '남로당의 선동'이로 결론이 났다. 미군정은 당연히 '남로당의 선동'을 부각시켜 제주도 자체를 '반공의 사각지대'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4.3 무장봉기가 단행된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성사시키려 한 '5.10 남한 단독선거'를 끝내 성사시키지 못한 지역은 '제주'뿐이었다. 이때부터 미군정의 악랄하고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그러면서도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제주도를 완전 섬멸시켜도 무방하다"는 이승만의 발언은 이 즈음 나온다.

제주도민은 '낮에는 군경에게, 밤에는 폭도에게' 시달리다 살 길을 찾아 산으로 산으로 향한다. 진압군은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들에 일제히 소개령을 발령하여 해안으로 이주시키고,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은 게릴라부대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한다.(미군 정보보고서)

그 중에는 기막힌 일도 많았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보도연맹 사건은 전국적으로 자행된 가장 커다란 규모의 학살 사건인데, 제주 4.3 관련자들은 '즉결처분'되었다. 다른 곳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제주도민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예비검속'이란 말이다. 이는 특히 '심증'만으로도 온가족을 몰살시킬 수 있는 행태로서, 이 조치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달렸다.

그후로도 제주도민의 입을 수십 년 동안 천금처럼 닫아두었던 것은 '연좌제 緣坐制이다. 4.3관련자나 관련자의 가족, 그리고 조금이라도 관련자라고 의심이 가는 사람이면 공무원은 물론 일반 회사에도 입사가 불허되었으며, 항상 감시를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그러니까 90년대 초중반 때의 일이다. 어머니께 4.3에 관해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혈색이 바뀌면서 아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학술조사를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4.3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술' 때문이었다. 술로 회유를 해서 이야기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맨 정신으로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가혹한 기억인 셈이다.

내 이모는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는 항상 '소근소근'했다. 주위에 들을 사람이 없었음에도 매번 그렇게 했던 것은 4.3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제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육지'라는 것이 있다. 물론 섬사람의 근성이 뭍은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하다.

4.3을 본격적으로 알린 분은 소설가 현기영 씨다. 현기영 씨는 '순이삼촌' 때문에 정보부에 단골로 끌려다니며 모진 고초를 당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4.3의 참상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현기영 씨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신의 작품을 영화화해서 함께 작업할 때의 일이란다. 새벽녘에 발작을 일으켜 '순이삼촌'을 부르며 울부짖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참석한 세미나에서는 '4.3을 쓰기 위해서는 제주를 떠나야 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제주 안에서는 도저히 4.3을 객관적으로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다.

4.3은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4.3은 제주 출신의 예비 작가들의 꿈이다. 항상 쫓아다니는 악몽이다. 가혹한 기억이다.
4월 3일을 앞두고 제주에서는 온갖 행사가 펼쳐진다는 데 먼 '육지'에 와서 나는 몹시 부끄럽다. 항상 그날만 오면 나는 몹시 부끄럽다. 아마 오랫동안 부끄러워 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외국인 칼럼리스트의 발언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부끄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과거를 잊게 될지도 모를 미래를 향한 이 한마디도 나를 부끄럽게 한다.  우리는 일본의 뒤를, 아니 일본과 나란히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망각증과 독도영유권 주장 등 위험한 우경화 경향, 그리고 전후 일본사회의 특징인 물질주의와 보수주의는 모두 과거청산의 결여와 연관되어 있다.
- 이안 부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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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0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씨 조선의 후예라고 떠벌이던 이승만이가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승주나무 2006-04-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만 기념관 건립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