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우리말을 지키는 소금

어제(4월 1일) 동아일보 '초대석'에 '우리글 지킴이'로 잘 알려진(나는 처음 알았지만!) 이수열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사정을 따져보니 지난 2004년에 한글학회로부터 '우리글 지킴이'로 선정되셨을 때 내가 국내에 없었다(핑계 없는 무지도 없는 법이다). '한글날' 시즌은 아니지만, 그리고 꼬장꼬장한(!) 모든 견해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분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서 기사를 여기에 옮겨놓고 군말들도 덧붙인다. 작성자는 허승호 기자이다.

 

 

 

 

-기자가 선생을 만난 것은 이번이 5번째다. 처음엔 그의 저서 <우리말 바로 쓰기>를 교재로 본인에게서 직접 강의를 들었다. 기자가 쓴 칼럼을 ‘빨간 사인펜’으로 ‘세게’ 교정을 본 후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세 번이나 그랬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만난 것이 선생과의 5번째 만남이다. 이수열(78) 솔애울 국어순화연구소장. 그는 매일 아침 신문 칼럼 10∼20개를 백지에 오려붙여 잘못된 표현을 빨간 사인펜으로 고친 후 필자에게 우편으로 보내 준다. 연간 5000여 건이나 된다. 그래서 칼럼을 자주 쓰는 교수들은 대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칼럼은 교수가 많이 쓰잖아.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분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쓰면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별로 나아지질 않아.” 선생의 불만은 신문 칼럼에 그치지 않는다. “헌법부터 잘못됐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1조), ‘모든 국민은 ∼할 권리를 가진다’(10조)는 영어 번역 투야. ‘국민에게서 나온다’, ‘∼할 권리가 있다’로 고쳐야 해.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이나 ‘외국 군대의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의 주류’(60조) 같은 표현은 일본어를 흉내 낸 기형 문장이고.” 그의 불만은 이어졌다. “헌법은 나라가 국민에게 한 최고의 약속이야. 그런데 일본어 영어 중국어식 표현으로 아주 일그러진 모습이 됐어.”

-그는 헌법의 악문(惡文)을 바로잡는 책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을 펴냈다. 국어교과서에 있는 잘못된 표현을 잡은 <우리글 갈고 닦기-국어교과서 다시 써야 한다>는 책도 썼다. 헌법은 요지부동이지만 선생 덕분에 교과서는 많이 바뀌었다.

 

 

 

 

(*)헌법 전문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고종석도 자신의 칼럼에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우리의 근엄한 헌법 전문을 이렇게 돼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1987년 10월29일)" 

이에 대한 고종석의 코멘트: "310자 99어절을 한 문장에 구겨 넣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조악한 문장의 표본으로 작문 교과서에 수록할 만하다. 그 문장은 덮씌워지고 뒤틀리며 꾸역꾸역 이어지는 성분들로 숨차다. 역사적 선언문이나 헌법의 전문이 한 문장으로 이뤄진 예가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서술어가 문장 끝머리에 오고 관계대명사가 없는 한국어는 숨찰 정도로 긴 문장을 만들기에 적절치 못한 언어다." 이런 문장들을 읽어나갈 자신이 없어서 나는 '고시'쪽은 지레 접어두었었다! 나는 이런 역경을 딛고 어떻게든 논리/조리에 맞게 법률 문서들을 작성하는(작성한다고 하는) 법조인들의 능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선생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표현을 몇 개 더 예시해 보자.

·의사들이 연극 공연을 갖는다→ ∼연극 공연을 한다

·임명동의안을 가결시켰습니다→ ∼가결했습니다

·전통이 뒤집어졌다→ ∼뒤집혔다

·정답은 3번이 되겠습니다→ ∼3번입니다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배고픈 때가∼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나→고성이 오갔으나

-표현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는 표기법에 그치지 않는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과 이적을 일삼는 철새 정치인들 있지. 이를 언론에서 합종연횡(合從連衡)이라고 부르는데 말도 안 돼. 전국시대에 강국 진(秦)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진의 동쪽에 세로로 늘어선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6국이 동맹한 것을 합종이라 하고, 진이 이들 소국과 개별 연대하면서 합종을 깨뜨린 것을 연횡이라 했어. 고도의 외교전략이지. 철새 정객의 움직임은 ‘오합지졸의 이합집산’이라 하면 딱 맞아.”

 

 

 

 

-경기 파주시에서 나무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 씨는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하지만 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해 모교인 봉일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고교에서도 국어를 가르쳤다.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 등 문법서로 독학을 하던 그는 1993년 정년퇴직하자 곧 <우리말 바로 쓰기>를 펴냈다. 이 책은 곧 12쇄가 나온다. 이 책이 눈에 띄어 그는 동아일보에 초청돼 1주일간 기자들에게 ‘바른 글쓰기’ 강의를 했다(기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이 이때다). 그리고 10년 이상 모 문화센터에서 주3회 ‘한글 바로 쓰기’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한글학회는 그를 ‘2004년 우리글 지킴이’로 선정했다.

-선생의 지적에 대개 ‘감사’의 반응이 오지만 불평도 없지 않다. 어법을 지나치게 고집하기 때문. 예를 들어 선생은 ‘그’나 ‘그녀’라는 말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 영어(he, she)의 일본어 번역을 다시 억지 번역한 거라는 설명이다. 대안은 뭘까. “그분, 당신, 걔, 소녀 등 많잖아. 사나이, 여인, 부인, 여사, 노파, 나그네 등도 3인칭 대명사로 쓰는 데 손색이 없어.” 이 기사를 쓰면서 기자는 선생의 권고를 따르려 애썼지만 이 대목만큼은 쉽지 않았다(*나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번역어이지만, '그'의 대응어로서 여타의 3인칭 대명사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의미론적 '중립성'을 갖고 있어서이다. 물론 '그'라고 통칭할 수는 있지만, 그건 남성중심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선생은 심지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 ‘서로’는 부사이므로 격조사를 붙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서로 위해야 한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 그는 격조사를 붙이지 말아야 할 부사로 서로 외에 ‘그대로’ ‘스스로’ ‘모두’를 더 꼽았다. 도발적으로 물어봤다. “아니, 말이란 언중(言衆)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의 계명이 아니지 않은가?” 어떤 교수도 “‘서로’가 무슨 해병대인가? 그게 한번 부사면 영원히 부사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어법은 함부로 바꾸면 안 돼. 그 교수가 나를 보고 ‘우리말을 지키는 소금’이라고 추어주더군. 근데 이 소금 맛이 너무 짜다는 거야. 아, 소금이야 짜야지. 그걸 많이 쓰거나 적게 쓰는 것은 요리사 맘이지만.”

 

 

 

 

(*)짜게 먹는 게 건강에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소금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글 지킴이'의 역할은 그래서 요긴하다. 특히나 요즘처럼 기형적인 번역투 문장들이 득세하는 우리 책동네에서는.

06. 04.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