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야 청산 가자 -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
최영철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원래 이 글은 3월 19일 이후에 공개해야 할 것이었다. '전국토론논술대회'의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고, 내가 때아닌 '동화'를 읽은 것도 '일' 때문이다. 하지만, 베끼지만 않는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 글을 읽게 될 '참가자'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논술버전'으로 리뷰를 썼다. 제시문과 그에 대한 간단한 메모인데, '리뷰'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특히 '정떨어지지 않도록' 쓰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스포일러도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 데서 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는 '일반 버전'과 '논술 버전' 두 가지로 쓸 작정이었으나, 이 책이 무슨 '상전'이나 된다고 서평을 두 번이나 쓸까. 그 만한 정도의 책은 아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고양이의 특징과 비유를 많이 땄으며, '어린왕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녹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가 유기적이지 않다. 왜 그렇게 '조력자'는 많이 나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인가, 일부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조력자들 등장시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데, 그 '무엇'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문학 이론'에 빈번이 등장하는 말인데. 특히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이다. 에잇! 또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거 병 아닌가. 아무쪼록 '참가자'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길게 쓴 서두는 그냥 넘어가고 '좋은 의미', '좋은 글'로 된 본문을 많이 봐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처음으로 해보는 거라 재밌었다^^

우리도 한번 고양이가 되어 보자


논술의 시선으로 문학 바라보기


우리는 문학작품을 논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논리적 전개에 의한 비문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비논리적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기법을 통해서 가려져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압축’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방식으로 된 문학(소설)을 논술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모든 문제는 나를 향하며, 나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이야기 안에 깊숙이 참여해서 갈등과 메시지를 양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극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학이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듯, 문학 특히 소설은 이야기 안에 전개되는 ‘갈등’을 가지고 글쓴이의 주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소설의 핵심이 되는 주요 갈등을 분석하여 글쓴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해석해야 한다.

셋째, 이야기 안에서 사용되는 ‘상징’을 잘 해석해야 한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비교적 상징이 뚜렷이 명시돼 있다. 예컨대 ‘배불뚝이’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배불뚝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수의 기업에 입사하여 젊은 나이에 ‘대리’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세속적이고 교양 없는 무식꾼’으로 묘사된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상징’들을 찾아다니며 글쓴이가 감춰둔 메시지를 하나씩 들춰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보물찾기와 같이 알쏭달쏭하고 어렵지만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 이야기를 이야기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현실에 자꾸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보았던 의미와 메시지는 현실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의 현실과 작중 인물의 현실을 대조해보기도 하고, 나를 그 이야기 속에 넣어 보는 등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의 목적과 길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름 없는 한 마리 고양이가 된다.(고양이는 ‘제석’이라는 의미 없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다닌다) 고양이가 되어서 본래의 야성(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을 함께 떠나 본다.


이상과 현실, 통념과 자각


#제시문 1

배불뚝이는 채리 아가씨네 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철면피처럼 배불뚝이는 그런 환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잔뜩 얌전을 떨면서 배불뚝이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채리 아가씨가 헛기침을 한 다음 배불뚝이에게 물었다.

“직장이 어디라고 했지?”

그러자 배불뚝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채리 아가씨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 아빠두.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업 대리예요, 대리.”

“으흠, 그렇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저는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배불뚝이는 자신감에 차서 거들먹거렸다. 장인어른이라니. 나는 기가 막혔지만 채리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배불뚝이를 내버려두었다. 배불뚝이의 태도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아빠. ○○기업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고, 이 나이에 대리면 앞으로의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예요.”

채리 아가씨가 한술 더 뜨자 배불뚝이는 불룩한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채리 아가씨의 엄마가 무슨 신기한 보석이라도 보는 듯이 배불뚝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학도 그럼 거기를 나왔겠네? 거기, 거기 대학 말이야.”

이번에도 채리 아가씨가 낼름 대답했다.

“엄만. 그렇대두. 그 대학 안 나오고는 ○○기업에 들어갈 수가 없죠. 곧 일본이나 미국 지사로 나갈지도 모른대요.”

그래 놓고 채리 아가씨는 배불뚝이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랑스에도 지사가 있다고 그랬죠?”

배불뚝이는 유치한 개그를 늘어놓던 그 교양 없는 말씨를 숨기려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배불뚝이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일류 회사의 대리라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바로 채리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요즘 우리들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즉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죄인처럼 산다”는 말이다. 이야기 안에서 배불뚝이가 채리 아가씨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족들은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대하듯 고분고분하다. 배불뚝이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고양이는 배불뚝이와 종족이 달라 아무런 관습도 공유하지 않는다. 단지 배불뚝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일류 대학과 대기업이란 것이 고양이에게는 우습기만 하다.

우리는 미천한 고양이의 ‘눈’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서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본 적이 있을까. 한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와 전혀 다른 고양이의 눈, 우리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입장,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우리들이 ‘일류대’라 하며 떠받드는 대학들은 세계 대학 순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승자인 셈이다. 지식과 역량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학교의 서열은 종래에는 큰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정부 고위 공무원이 OECD에 파견갔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와 작문이 되지 않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며 한국 정부에 불만 가득한 공문을 보낸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떵떵거릴 수 있지만, 세계에서는 당당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는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류대, 일류 기업의 꿈은 나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무상한 꿈에 내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꿈은 무엇일까. 배불뚝이가 가족에게 공언한 ‘채리 씨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까. 여러 가지 의문이 중첩되며 전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 채리 씨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행복은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통념 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시문 2

내 옆에는 늘 채리 아가씨가 있었고 나는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등의 절박한 심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할 고양이로서의 야성을 많이 잃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내 감각은 무디어졌고, 맛있고 부드러운 먹이에 내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었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야성이 내게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명상에 잠긴 채 몸을 뒤척이며 채리 아가씨의 식구들이 모여서 터뜨리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외로웠다. 온몸의 신경이 외로움으로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나 혼자 이 넓은 우주에 내동댕이쳐질 날이 오리란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날이 밝자 식구들은 아침 일찍 찾아온 친척들과 어울려서 채리 아가씨를 데리고 모두 나가버렸다. 결혼식에 가는 모양이었다. 채리 아가씨의 결혼식에는 나도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사람들이란 자기들 필요할 땐 뭐든 다 빼줄 것처럼 하지만, 일단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쓸 만한 가구나 가전제품들을 함부로 내버리는 걸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버려지는 고양이나 개, 다른 애완동물들을 보면서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 그제야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 물은 험난한 고비와 울퉁불퉁한 기복을 만나면서 흐르게 되어 있듯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사람이란 고양이보다 더 변덕이 심해서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짜증을 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을 존재라고 나는 너무 굳게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양이는 개처럼 시종일관 충직하지도 않고 새나 열대어처럼 멍텅구리도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표현에 충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하다. 변화무쌍하고 시시각각 다른 기분을 연출해서 사람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것이 고양이로서 내가 가진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고양이인 나 자신을 믿었고, 채리 아가씨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역시 나는 혼자 사는 아가씨의 심심한 시간을 채워 주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가족들 모두 결혼식장으로 몰려간 텅 빈 집에서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본문 중에서>


제시문 2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우정, 사랑’,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채리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고양이의 감각은 무뎌지고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어버렸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하나의 장난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당연하듯 챙겨먹고 살이 뒤룩뒤룩 쪘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 비싼 게임 프로그램이나 사치스러운 장식품, 옷가지 등으로 몸을 감싼다. 운동량은 없고 공부 몇 시간 하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나도 장난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에 의해 하는 일은 몇 가지나 될까. 나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나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사람을 마냥 행복하게 한다거나, 쾌락만을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곧게 세상에 설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고,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고양이처럼 현실에 내던져질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따뜻하고 배불리 잘 지내오다 갑자기 현실의 벽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될 것이다.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던가. 채리 아가씨는 우리의 고양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적적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는 데 고양이를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나타나면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정’이나 ‘사랑’은 아니다.

고양이도 몹시 후회한다. 아끼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앞에 너무 쉽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유는 남다른 야성과 감각, 날카로운 발톱에 있다. 야성도 정체성도 매번 환기되지 않으면 낡고 녹슬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 성립된다. 나의 영혼과 성격, 적성과 개성을 깡그리 버리고 그 사람을 좇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장점을 북돋아주고, 커다란 단점이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고쳐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스스로 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독’을 안겨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제시문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 ‘관계맺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자유, 그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제시문 3

하지만 나는 채리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갈색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넌 누가 사랑해주니?”

“사랑? 난 혼자야.”

“혼자라고?”

“그럼.”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어버려. 고양이는 자유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게 자유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사랑하지 않는 게 사랑하는 일이 된다니 말야.”

“그건 네가 사랑이란 걸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사랑은 혼자 가지거나 누구로부터 얻어서 가지는 게 아니야.”

“가질 수 없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해도 이해가 잘 안 갈 거야. 네가 홀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홀로 서고 싶지 않아.”

나는 갈색 고양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홀로 선다니. 채리 아가씨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잠이 잘 안 온다며?”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건…….”

“그래. 그건 밤이 되면 고양이의 야성이 발동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말야, 네가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야.”

“난 만족하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마.”

“어쨌든 지금부터 가끔 홀로서기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봐. 방랑자로 사는 재미가 어떤 건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갈색 고양이는 말을 마치더니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

어떻게 숲으로 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혼란한 생각들을 잠재우려고 되도록 한곳으로 생각을 집중시켰다. 방음벽 꼭대기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혼자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

‘홀로 서야 한다는 것.’

위험한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갈색 고양이 방랑자의 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고양이는 자유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게 돼.’

그랬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자유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유, 채리 아가씨를 사랑하면서 잃었던 자유를 마침내 되돌려 받게 되었던 것이다.

채리 아가씨와의 이별로 얻게 된 외로움과 안타까움 사이로 자유라는 새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외로움과 자유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가 보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삶.

나는 방랑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갑자기 혼자가 되고, 갑자기 자유를 얻어낸 내게는 조언자가 필요했다. 방랑자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톱을 다듬고 야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락함’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잃는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은 또 뭘까. 자꾸 문제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그것은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감싸는 모든 환경들보다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조건들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

“자유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고양이는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쓸쓸히 버려졌다. 하지만 버려짐으로써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말하자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고양이가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때문에 앞의 말을 풀어서 쓰면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고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사랑을 했더라면 사랑도 자유도 지킬 수 있었고, 쓸쓸히 버려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의미 없는 것’을 사랑하기 쉽고, ‘무상한 것’에 마음이 쏠리기 쉽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그 동안 쓸데없는 곳에 공력을 들여 왔다”고 한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의미 있고,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이나 통념을 통해 그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한평생 살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자유와 방종’, ‘자유와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자유와 비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버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누군가를 위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말은 온당하지 않다.

이렇게 ‘자유’라는 의미를 알고 있다면 고양이처럼 크게 혼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은 ‘노예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가 없는 사랑이므로, ‘장난감 사랑’이다. 나는 나인가 장난감인가. 나는 자유롭고 개성 넘치고 정체성을 확립한 자아인가, 타성에 젖어있고 끌려다기만 하는 ‘장난감’인가.

고양이가 방랑자를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친구가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방랑자에게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다시 물어볼 것이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


#제시문 4

나비가 아직 그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마 그럴 거야.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이민을 가기도 하니까. 이젠 안 기다릴 거야?”

“그럴 작정이야. 좀 더 기다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거든.”

“그 사람들이 널 내쫓았니?”

“쫓겨난 건 아니야. 내가 그냥 나왔어.”

나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파마 아줌마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비를 밖으로 내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자유를 찾은 거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좀 혼란스러워.”

“첨엔 나도 그랬어. 곧 익숙해질 거야. 전에 살던 집 얘기나 좀 해봐.”

나비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 사람들이 아직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어. 재롱둥이 푸들, 아침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하얀 문조, 열심히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열대어와 함께 살았지.”

“그 많은 동물들과 한 집에 살았다니, 야, 대단했겠구나.”

나는 나비의 기분을 돋우어 주려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 많은 동물들이 한 집에서 산 건 분명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해서 그랬을 거란 나비의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 남을 사랑하거나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실은 자기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야. 채리 아가씨가 그랬고 배불뚝이가 그랬고 영은이가 그랬고 파마 아줌마가 그랬다.

……

“걱정하지 마.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어. 사람들 때문에 그걸 아직 잘 모르고 살았던 거야. 우리에게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들이 많이 있거든.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 내가 있잖아.”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햇볕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 닥칠 시간들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나비에게 햇볕이 되고 그늘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암컷은 자신 외에도 다른 생명을 키우는 본능이 있으니까. <본문 중에서>


하나의 촛불이 만 개의 촛불을 다 밝혀도 맨 처음의 촛불은 꺼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이다. 베풀면 베풀수록 커져만 가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나비는 고양이의 남자친구이다. 고양이처럼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방금 쫓겨났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질없는 기다림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나서는 차차 차가운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조언자를 만난 것이다. 고양이는 조언자를 찾았지만, 운명은 아리송하게도 고양이를 조언자로 만들어 버렸다.

고양이에게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줄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앞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물음에 대답할 시간이다.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은 알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자유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 물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앞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 아닌 사랑’은 누군가의 개성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배려하는 것을 ‘할애(割愛)’라고 한다. 자유에도 비용을 치르듯이, 사랑도 비용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올 만큼의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비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박애(博愛)’의 정신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을 연결할 때 비로소 ‘박애’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고양이의 몸을 빌려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자아를 상실하고 관습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자아를 찾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은 비용만이 아니다. 다른 집에서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박차고 차가운 야생의 숲으로 돌아간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조차도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현실의 벽은 나를 감싸고, 안락함은 우리를 유혹한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온갖 옳지 않은 것들을 배척할 의무가 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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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이 2007-02-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의 글쓰기 - 독서논술문 - 괜찮겠는데요. 특히, 제시문을 통한 독서논술문이 신선하네요. 담아갑니다. 감사~.

승주나무 2007-02-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롱이 님//안녕하세요. 예전에 썼던 원고입니다. 논술은 어디까지나 독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상하게 독서와 연계하려는 시도는 너무 더디네요. 한번 고민해 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