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철학자 간의 인과관계가 있는 순간을 하나의 꽁트를 통해 잡고 싶은 것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스피노자이다. 쾌락을 위해 우리는 애를 쓰지만, 쾌락을 얻고 나면 '왜 이리 심심해?' 하고 푸념하기 쉽다. 그것은 이미 쾌락의 가치가 다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쇼펜아우어는 돈 많고 시간 많은 행운아로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아다 진중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피노자를 놓치지 않았을 리도 없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 정리하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가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시대가 '모든 것이 끝난 시대'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시민 혁명을 일으킨 후에, 다시 왕관을 받음으로써 민주주의는 퇴보하였고 괴테는 '이 시대에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시대는 지식인들에게는 그토록 절망적인 지옥이었다.

아무튼 '염세주의자'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쇼펜하우어는 위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사유를 펼친다.

"우리들의 동화와 이야기가 주인공들의 행복으로 끝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복의 페이지가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역시 평상시와 같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나날을 보낼 것이므로, 차라리 행복했던 순간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은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마라"

환상과 공포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자, 이 결론은 우리가 문헌에서 알아낸 이야기의 대단원이다. 의심할 바 없이 대단히 정당하고 행복한 결말이다. 아! 그렇긴 하지만, 수없이 많은 해피엔딩의 평범한 이야기들처럼 진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한 결말이다. 내가 이러한 오류를 수정한 것은 전적으로 『텔미나우 이즈잇소오어낫』의 저자 덕택이다.
한 프랑스 격언이 강조하듯 "더 좋은 것은 좋은 것의 원수"라고 한다. 아까 세헤라자데는 이야기가 담긴 일곱 광주리를 상속했다고 한 언급은 이제 그 바구니 수가 일흔일곱 개로 늘어났다고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그 진실된 이야기를 덧붙여 보기로 하자.
(그 진실된 이야기는 '우울과 몽상'이라는 책에 담겨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책을 사서 보기 바란다)

※ 텔미나오 이즈잇소오어낫
'Tellmenow Isitsoornot'를 띄어쓰기하면 'Tell me now  Is it so or not'으로, '이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내게 말해 달라'라는 뜻이 된다. 이는 작가 포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생략함으로써 동양의 문헌 같은 느낌을 주도록 고안해낸 단어이다.

출처 :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중 '천일야화의 천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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