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전집 2 - 소설, 문학
김유정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우선 '유정'이라고 부르는 나의 오만불손함에 대해 항변코자 한다. 내게 있어서 유정은 '점순이'나 '이쁜이'처럼, '암팡스럽'거나 '숭글숭글한' 인물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그를 자주 접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유정을 접하게 된 계기는 어느 계간지에서 이문구(李文求)의 고백을 접하고 나서이다.

'언어는 유정에게 배우고, 정신은 동리에게 배웠지.'

이 말이 내게는 새삼 큼직하게 다가왔다. 일전에 유정의 소설 몇 편을 선배의 권유로 읽어본 일이 있어서 사뭇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결심이 유정의 전작품을 읽고 입말공부도 하고, 작품세계도 탐구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소설을 쓰고 싶은 문학도로서 임하는 탐구였다. 때문에 이 글은, 유정의 특정한 작품을 읽고 나서 쓰는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유정의 작품들과 알려진 유정에 대한 사실을 토대로 쓰는 '김유정 감상'의 특징을 가짐을 미리 부언하는 바이다. 아직은 그의 전작품 중에 반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은 물론, 대사전에다 별도로 김유정어휘사전도 참고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생소한 토속어 한자 한자를 찾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어휘뿐만이 아니었다. 4년 동안에 발표한 소설 치고 그의 소설에는 8천여 개의 어휘와 그 중에서도 83%이 토박이 말임을 알 수 있다.그것은 유정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토박이말을 담아냈다는 점을 말해준다. 여기서 유정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작가마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지한 대중을 계도하기 위해서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최고 지성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고매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글쓰기, 시대를 증언하기 위한 글쓰기도 있을 것이다. 유정의 경우는―썩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세 번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시대와 공간을 되도록 진솔하게 담아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거기에 들어가는 요소로서 토박이말이 있다. 그렇다고 유정이 우리말만을 숭상한 것은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쓰는 말이라면 일본어, 다른 외래어라도 가리지 않고 써넣었다. 그러나 유정에게서 언어만을 배워간다면 그것은 반도 못 배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쓰는 언어는 그가 만들어낸―정확히 표현하자면 묘사해낸―인물들에 의해서―개성과 운명 등에 의해서―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때문에 김유정의 농촌은 그것이 가진 사회역사적 본질에 의해 매개되지 못한 채 묘사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등 여타의 비판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지역사회의 이해라는 것은 그 안의 구성원이 관찰하고 세심하게 기록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그 안에서 특징들을 추려내어 이론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사회역사적 본질이라는 말뜻도 이해키 어려운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된 지역사회의 본질이라면 그만큼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유정은 인물들의 행위와 성격을 직접 평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고 꼼꼼하게 묘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그들을 평가한 어떠한 말보다 더욱 가깝게 그들의 사회역사적 현실을 보며, 더불어 함께 웃을 수도, 가슴아파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유정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입심에 넘어가기는 하지만, 그의 세계에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정은 우리를 함몰할 세계를 가질 만큼 독단가는 아니다. 오히려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한 걸음 물러난 숙연한 기록자로서 유정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춘호'나 그 밖의 여러 이름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안정감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이웃이며, 그 시대에 엄밀히 존재했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의 소설에서는 창조적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을 누르는 운명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인물들의 발버둥질이 더욱 애절하게 와 닿을 뿐이다.

우리는 유정이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왔을 적에 자신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 고민을 했던 사실을 접할 수 있는데, 그 후에 야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그림을 연상할 수 있었다. 야학을 하며 문맹인 이웃들을 가르치는 유정의 가슴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도 글자를 가르치며 아름다운 우리말에 충분히 세례를 받았을 줄로 안다. 여기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나 시대적 조건, 주위 환경 등을 그려보는 것은 예비작가로서 나에게 하나의 큰 가르침이 된다. 즉, 자신의 힘과 시대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했던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도 유정다운 가르침은 바로 그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유정의 '사람됨'이다. 유정이 단순히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쁜이가 그에게 속맘을 비춰줄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촌스럽게 '점순이'가 '봄감자'로 사랑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유정의 사람됨과 닮게 유정의 인물들 중에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뚝건달 뭉태'도 악인은 아니다. 유일한 악인이라면 인물들을 기형적으로 변질시키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회이며, 시대이며, 지겨운 운명이다. 때문에 유정의 모든 인물들은 운명의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개중에 몇몇 불쌍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유정은 악인을 따로 상정하지 않고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얼마 안 되는 소설가이다. 이 점은 내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갈등과 긴장은 언제나 선악의 대립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대립해야 할 필요도 없다. 유정의 인물들은 모두 같은 방향에 서서 '드러나지 않은 악'을 쳐다보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왜 이문구의 고백을 집어놨는지 눈치를 챘을 줄 안다. 요컨대 내가 유정에게 배운 것은 아름다운 우리말이지만, 그 한 단어 한 단어에 풍성한 생명과 가치를 부여하는 유정의 정신을 배웠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불순물을 남겨놓지 않고 제 몸을 녹여서 만들어낸 순수 결정체의 정신이며, 그 이면에, 숙연하지만 자신이 할 말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소설의 그릇에 온전히 담아내는 작가로서의 정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