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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 <온들의 교장 샌더슨의 연설> 중 일부
이 책은 내가 읽은 도킨스의 두 번째 책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1교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쉬는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이나 '눈먼 시계공', 혹은 '조상 이야기' 같은 책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소개글에 '대중을 향한 글'이었다는 문구가 '꽂혀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선정했다.
도킨스가 그리는 다윈 같은 사람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서, 메모나 서한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킨스는 다윈의 충실한 탐구자로, 시대와 과학수준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니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대중적 과학자의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오래된 경서인 '대학(大學)'에 주자 서문을 보면, 옛 선현들이 학문을 하는 원리가 기록돼 있다. 즉 몸소 행하고 나머지를 학문에 정진하며(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서민들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 그래서 당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얻어듣지 않을 수 없고, 얻어들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화시킨다. 도킨스가 일상으로 파고든 이유는 그가 믿는 과학관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은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볼 때 아직도 세상에는 비과학적 생각이 비과학적 경로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준거틀을 바탕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그가 논쟁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며, 다소 도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즐거운 삶의 비밀은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데 있다 - 니체(본문 중에서)
그것은 그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호감도는 '극단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신념은 '경직성 걷어내기'이다. 대중적 글쓰기 자체도 그렇고, 대중과 잦은 대면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그것은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면을 아끼지 않으며,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유머'는 순전히 그의 의도 안에 있는 내용물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자신이 제안한 단어인 '밈'이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다. 거기서 '바이러스 교회'라는 신흥 종교에서 '성 다윈'을 따르는 '성 도킨스'로 우상화되어 있는(사실은 비꼬는) 말을 보고 흠칫했다고 술회한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료'나, '마음 근육', '애정 어린 냉소'와 같은 독특하면서도 와닿는 언어 사용법은 그의 유쾌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유쾌한 문구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자.
125년이 지났으므로,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이론이 그가 원래 제시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에 바이스만주의와 피셔주의와 해밀턴주의를 더한 것이다(거기에 기무라주의와 몇몇 다른 주의들을 덧붙인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이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놀란다. 그는 유전학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서는 심하게 잘못된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정답에 도달하는 기이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의 우리는 신 다윈주의자이겠지만, ‘신’이라는 접두어를 아주 약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주지하듯이 신문에 냈던 칼럼, 책에 대한 서평, 추도사, 서한문 등 저술가가 일상에서 '글을 써야 할' 모든 지면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종교와 권위, 전통과 같은 오래된 문제,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춰내 지속적으로 따져 묻는(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분은 가히 '도발적'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배심제'에 대한 불만도 잔뜩 담아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찰스 왕세자에 대한 풍자도 삼가지 않으며, 자신의 라이벌인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글 속에서 아련한 애정과 열정,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진한 믿음을 볼 수 있다. 과학을 체화해낸 이 용감한 대변인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을 설레설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책을 종합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도달한 자신이 즐겁고 자랑스러웠지만, 머리말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무의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모양이다. 이 책을 처음 잡은 사람은 앞의 머리말도 좋지만, 맨 마지막의 편을 머리말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도킨스에 가장 감사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를 맨 처음 읽고 나서부터 지금가지 '종의 기원'이나 '대담'과 같이 나랑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생물학'(또는 사회생물학)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한 그의 '대중적 글쓰기' 덕분이었다. 이 '밈'은 국내외의 학자들을 심히 자극시킨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학' 서적에 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는가.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21세기는 과연 '생물학의 시대'이다.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학 정신의 '핵심과목(?)'은 타당하고 장구한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말과 글'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 수단을 '생물학' 또는 '과학'에 초점을 맞춰, 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매일같이 고심하고 있는 그는 분명 선각자이거나 선각적 지식인이다. 맹자가 그려낸 '선각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의미의 '선각자' 말이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