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연재를 들이밀어서 '말잔치'의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 제 전공 분야인 철학의 키워드를 가지고 현대의 문제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유명한 사조나 철학적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현대의 문제에 기탁하여 키워드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연재의 큰 줄기입니다.

徐子曰 仲尼稱於水曰 水哉水哉여하시니 何取於水也시니잇고 孟子曰 原泉이 混混하야 不舍晝夜하야 盈科而後에進하야 放乎四海하나니 有本者如是라 是之取爾시니라
맹자 이루 하 18장
※ 科 구덩이 과, 盈 찰 영, 而 말이을 이(어조사 이), 後 뒤 후, 進 나아갈 진

(맹자의 제자) 서자가 묻습니다. "중니(공자의 자)께서 도도한 물줄기 앞에서 '물줄기로구나! 물줄기로구나!' 하고 두 번이나 탄성을 자아냈는데, 도대체 이 물에서 어떤 뜻을 취하신 것입니까?"
맹자가 답합니다. "샘의 근원은 졸졸 흘러 밤낮 가리지 않고,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나아가 (마침내) 큰 바다(사해)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 점을 취하신 것이다.""

#장면 1

수영복 세트를 만드는 A중소기업은 2002년에 여성용 수영복 세트를 9만원 전후로 공급했지만 올해는 7만원대에 공급한다. 인건비와 물가는 올랐는데 납품가는 3년새 20% 정도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할인점이 챙기는 판매수수료(마진율)는 20%에서 25%로 오히려 늘어났다. 할인점 간에 가격경쟁이라도 붙는 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할인점의 세일 경쟁이 붙으면 가격 하락 요구는 더욱 거세진다. ㄱ마트에서 20% 세일하면 ㄴ마트는 30%로 해달라고 요청한다. 혹은 납품업체가 판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장 청소비, 광고비·판촉행사비, 매장 직원 인건비를 할인점 대신 부담하는 게 백DC다. 보통 매출액이나 납품가의 5~15% 정도 된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할인점은 납품업체의 피를 빨아먹는 통에 납품업체는 할인점을 '흡혈귀'라고 부른다.

“물건을 창고에 쌓아둘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매출의 98%가 할인점에서 이뤄지니 하나라도 더 팔려면 할인점에 들어가야 해요. 치사하지만 할인점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망하니까요.”(수영복 제조업체 ㅎ부장)

"납품업체와 거래가 공평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부담하더라도 납품하겠다는 업자가 한참 줄을 서 있습니다. ‘갑’인 할인점이 손해볼 장사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경제잖아요.”(할인점 MD 김모씨)

기사출처 : 경향신문 '05년 9월 13일자 기획기사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3. 납품업체는 할인점의 ‘봉’ 중에서

#장면 2
 
현대자동차의 하도급 업체 횡포도 유명하다. 이들은 하도급 업체 B 중소기업에게 납품을 받으며 납품 원가를 첫 해에는 2.5%, 두 번째 해에는 2% 인하했다. 이 결과 B 중소기업은 12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는데, 전 직원의 한 달 임금이 2억원이므로, 6개월 임금을 상납한 것이다.
때문에 하도급 업체 사이에서는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대기업에게 "마른 수건을 쥐어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하도급 업체는 현대자동차 측에 납품 원가를 깎지 말아줄 것을 호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운(社運)이 기울 판이기에, 공정위에 제소하여, 공정위는 하도급법 위반 혐의가 중대하니 원가 삭감에 대한 시정 조치를 명령했다. 이듬해 B 중소기업은 도산하고 말았다.

자료 출처 : KBS 특별기획 '양극화사회 희망의 로드맵(3)'('05.12.8일자 방영분)

이 결과 대형 유통점(할인점은 무슨 놈의 할인점!)과 대기업의 순이익의 급상승하는 반면, 하도급 업체, 납품 중소기업의 매년 순이익은 급감하여, 도산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무리한 투자를 해서라도 해외로 터전을 옮기는 일도 잦다.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중소기업의 공동화 현상(空洞化現狀)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기반은 잠식하는 동시에 대기업 할 것 없이 공멸로 가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노동자의 87%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중소기업이 떠나간다면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의 폭리 → 대기업,중소기업 간 영업이익 편차 극대화 → 중소기업 잠식, 혹은 해외이전 → 중소기업 공동화 현상 → 경제 성장동력 정지 → 대규모 실업 사태 → ?

위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이 대기업의 이익이 될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가장 완숙하다는 '大'라는 글자를 허락할 수 있을까?

# 장면 3

오늘날의 포스코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소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이 있었다. 포스코는 공정에 있어서나 제품 생산 등 핵심 개발 업무에 중소기업을 적극적은 파트너로 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해 얻는 이익은 수십억 원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에서 1,2위를 다투는 철강업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코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거대한 기업 안에 개미만한 기업들이 앞, 뒤, 양옆, 속까지 받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이익은 중소기업의 개발 투자비로 책정된다.
(포스코는 수익을 거둔 첫 해의 이익을 모두 중소기업에 배당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현대중공업도 마찬가지이다. 중소기업 C는 현대중공업의 판매 유통망과 인지도를 이용해 세계 각국에 커다란 매출 실적을 올리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중공업의 인지도 상승과 기업 실적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꼭 현대중공업의 힘이 아니더라도 중소 업체가 그 길을 통해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면, 그 이익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대우조선은 아예 협력업체 직원을 데려다 교육시키고, 이윤 보장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이 투자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 KBS 위의 프로그램

이와 같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우리 경제의 주축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윤의 도구로 보느냐, 공영의 동반자로 보느냐는 국가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인식이 존재한다.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人無遠慮 , 必有近憂 (사람이 넓게 사려하지 않으면, 근심거리가 가까워진다-논어)라는 말과 같이, 우리 기업들이 넓은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눈앞의 이익에만 어두운 모습이 안타깝다. 기회가 있으면 사마천 사기열전의 '화식열전'이라도 한 편 봤으면 한다.
"큰 장사꾼은 큰 장사를 한다."
제발 큰대 자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위의 몇 가지 사례만으로로 '盈科而後 進'(과영이후에 진)의 의미가 밝혀졌다. 구덩이 중에는 큰 구덩이와 여러 개의 작은 구덩이가 있다. 하지만 물은 큰 구덩이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작은 구덩이가 차지 않으면 반드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물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에 적용해볼 수 있다. 이 키워드처럼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없으며, 사회 문제의 많은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마수걸이'로 정했다.

나는 이 키워드를 우리 사회의 경제 문제, 특히 대기업과 하도급 간의 공생관계의 측면에서 이야기했지만,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 이 키워드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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