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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 상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 말은 사마천이 사기라는 책을 다 쓴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즉, "나는 황제부터 해서 한무제 태초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차례로 서술하여 마치게 되니 총합 130편이다."
나도 1~2년간의 스터디를 마치게 되었다. 나로서는 가장 끈질기게 매달린 사업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기쁘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만나서 버벅대기도 하고, 사기를 쳐서 상대방을 현혹시키기도 했고, 데이투한다고 땡땡이도 많이 쳤다. 암튼 원년 멤버가 사기를 시작한 이래로 나와 선배 단 둘에 이르기까지 팀을 꾸려서 스터디를 마쳤으니, 연인원은 10여 명에 해당하고, 모임의 횟수는 대략 200여 회에 달한다.
나의 경우 그간 사용한 포스트이트의 분량은 크고 작은 것 500여 매, 쳐박은 볼펜 수는 10여 개, 공들인 시간은 3~400시간 등이다.
물론 수적인 데이터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기억해두고 싶어서 남긴다.
사마천의 마지막 발언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며 여러가지 애달픈 사연과 역사의 비정함이 담겨 있는 구절이므로 조금 옮겨 본다.
태사공 사마천은 말한다.
"아, 우리 조상은 일찍이 이 일을 주관하여 당우(唐虞) 시대에 이미 알려졌고, 주대(周代)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맡았다. 그러므로 사마씨는 대대로 천관(天官)을 맡아왔고, 그것이 나에게까지 이르렀구나! 삼가며 새겨두어야 할 것이로다. 삼가며 새겨두어야 할 일이지..암!"
그래서 천하에 흩어져 있는 구문(舊聞)을 망라하여 왕업(王業)이 일어난 그 처음과 끝을 살피고 흥성하고 쇠망한 것을 살펴보았으며, 사실에 입각하여 논하고 고찰했다. 대충 3대를 추정하여 기술하고, 진나라와 한나라를 기록하되, 위로는 헌원[황제]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본기」를 지었으니, 모두 조례를 나누어 기록했다. 그러나 시대를 같이하는 것도 있고 달리하는 것도 있어서 연대가 확실치 않으므로 「10표」를 만들었다. 또 [시대에 따라] 예악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고, 법률과 역법의 개정, 병권·산천·귀신·천인(天人)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폐해지는 것을 살피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내용으로 「8서」를 만들었다. 28수는 북두칠성을 향해 돌고, 30개의 바퀴살은 한 개의 바퀴통을 향하여 끝없이 돈다. 지금 보필하는 고굉의 신하들이 이에 부응하여, 충신(忠信)으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세가」로 지었다. 의를 지지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70열전」을 지었다. 무릇 130편에 52만 6,500자이니,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한다. 개략적인 것은 「자서(自序)」로 지어 본문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었고, 육경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정리하고, 백가의 잡다한 학설을 정리했으며,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70을 자서로 마름하였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로부터 역사를 서술하여 태초(太初 ; 한무제의 연호)에 이르러 마치니 130편이다.
- 김원중 『사기열전(史記列傳)』(을유문화사) 하권을 참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라는 대목이다. 왜 정본을 명산 깊숙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해는 효무제(한무제라고도 함) 연간이다. 한무제는 한나라를 부흥시켜서 고려의 광종에 비유할 수 있는 명군이면서도, 잔인하기로는 진시황에 비유할 수 있다. 사마천은 유가의 덕목을 몸소 닦았으므로 형벌이 엄정한 법가에 점점 치우치는 한무제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열전 안에 한무제의 죄상을 낱낱히 기록해 놓았다.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장은 '이장군열전'과 '급정열전'이다. 이 두 사람은 사마천이 보기에 한나라의 무신과 문신을 대표한다. 그러나 무제 때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 까닭은 자신의 소신을 다했고,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의에 맞춰서 자기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원문을 보다 보니 사기의 원본이 많이 산실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효경제와 효무제 본기는 아예 없어졌는데, 그것은 아마 한무제의 분노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접한 효무제의 분노는 대단했다. 한무제는 맹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그것은 맹자가 역성혁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맹자의 초상화에다가 활쏘기놀이를 했다. 그 덕에 맹자는 송나라 주자학자들이 복원하기 전까지 그저 시중에 나도는 잡지책에 불과한 대접을 받았다. 사마천도 맹자와 비슷한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
사기열전 마지막 자서의 주에 이런 말이 있다. "사마천은 효경제의 단점과 효무제의 과실을 적나라하게 언급했는데 효무제는 노하여 책을 모두 없애버린 다음에 사마천을 이릉을 천거했다는 명목으로 연좌시켰다.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였기 때문에 그를 두둔한 사마천을 잠실로 내려보내 궁형에 처하였고 이 때 사마천은 원망을 품었는데, 그가 옥사(獄死)하였다고도 한다."
※내 해석이 잘못되었을지 모르므로 원문을 싣는다.
漢書舊儀注曰司馬遷作景帝本紀極言其短及武帝過, 武帝怒而削去之後坐擧李陵, 陵降匈奴故下遷蠶室有怨, 言下獄死
아마도 그 과정에서 열전의 여러 부분과 무제와 관련된 사료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사마천의 연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어떤 식으로 사기를 저술하였는지 알 수 없고, 또 이릉의 화를 당하게 된 연도와 사기를 제작하는 연도의 관계가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암튼 사마천이 마지막으로 위의 말을 했을 때 무슨 심정을 느꼈는지는 참 따라가보고 싶다.
사마천은 자기 할 말은 다 끝났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아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