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사 이명준의 슬픔이 담긴 상여를 천천히 따라가며
-노래는 침묵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가냘픈 한마리 새다- 탈레스


작가가 스물 다섯 살에 자신의 분신을 그려 놓은 『광장』이라는 책은 작가와 함께 수십 년 동안 진화했다. 필자가 분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소설 속의 주인공 이명준과 그 작품인 광장 안에 쏟은 애정이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거듭된 판의 변화인데, 초판은 47쇄, 재판은 41쇄, 3판은 15쇄 4판은 26쇄가 찍힐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기도 하려니와 그가 작품 텍스트에 가한 작업의 변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도스또옙스끼를 보는 듯하다. 도스또옙스끼는 그의 역작 『죄와 벌』을 쓰기 위해 최소한 네 가지의 서술 방식을 시도했다고 하며, 『악령』이라는 소설을 쓸 때는 전반부를 다 쓰고 나서, 새로운 주인공의 발견으로 인해 모두 소각하고 다시 써 가는 열정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는 언제나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변화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예술 작품이 된다. 그러한 배경 지식 하나만으로 광장은 여러 번 음미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텍스트는 문학과지성사刊 4판 26쇄본(2002. 8.16)을 사용하였다.

이명준은 밀실 혹은 온실 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철부지 책벌레(p63)'이다. 철학과에 들어가 지적 유희를 즐기다가 광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광장으로 나아가려 한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그에 따르면 '비어 있는 광장'이었으며 밀실과 광장은 너무나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광장다운 광장으로 가고 싶어했으며 그것은 곧 삶다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는 터전 안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명준도 차차 밀실에 길들어 가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는 싫었다. 그에 동반하여 투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동경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사상으로 경도 되어 가족과 사랑을 묻어버리는 그런 모습은 명준이 생각한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북으로 가서 겪게 될 환멸을 살짝 암시하는 역할도 한다. 명준에게는 사랑도 역시 고귀한 삶의 목표이자 가치였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무슨 대가든 지불할 의향이 있다. 이렇게 광장과 밀실, 개개인은 사랑이라는 빛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러나 파괴와 경계, 증오와 기만만이 잔재하는 사회 안에서 명준의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되고 그것이 터전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사실 전쟁 직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무력과 획일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필요불가결 하기는 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나라 내에 가지고 있는 모순의 충돌이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의 시종으로 전락하여 명령을 하달 받는 입장에서 진정한 광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허울만 있는 낯선 광장 하나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며, 각자는 그것에 소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비굴한 밀실들을 만들었으니, 사회는 점점 폐쇄적인 貪利的이 될 수밖에 없다. 명준은 그러한 문제를 젊은이다운 패기를 가지고 무리하게 제기하였으나, 성공할 리가 없었다. 명준은 자기 자신 깨지지도 않을 것 같은 바위에 뛰어들어 산화함으로써 당대의 지식인과 시민들의 양심을 각성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만으로 명준은 가치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명준은 당대 사람들의 아픔이었으며, 공통문제였다. 그에 더하여 명준은 이상으로 가기까지 시행착오를 하나씩 드러내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며, 그 문제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방랑인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 모습을 들자면 사랑에 대해서는 소유와 관능적 쾌락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며, 또 다른 소유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인애와 은혜를 소유하려 한 강한 욕구가 그것을 나타낸다. 지성에 대해서는 지적 유희라는 돌부리에 또 넘어진다. 장난 삼아 학교 신문에 작품을 투고하고, 방안에 누워 서재에서 책 내용 들추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의 일원에 대해서는 요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黨內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기만하며 적당히 넘어가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미웠고 비참하였다.
그가 놓여 있는 현실과 이상까지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리고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스로 보여주었다. 후에 그가 긴급한 적정 보고서를 쥐고도 태연했고, '타고르호'에서 송환 포로들의 강력한 요구와 증오에도 태연할 수 있었던 까닭, 그리고 흔연히 母女 새의 품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경험의 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거침없이 달려가는 명준의 적극적인 기질이다. 이것은 왜 명준에게 인애가 아니고, 표면적으로는 더 많이 죄지은(배신한) 은혜였나 하는 문제도 해결해 준다. 인애는 탈을 벗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조그만 연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명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만 꿈틀하다가 도로 닫혀버리는 그러한 탈이었기 때문에 명준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은혜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탈을 벗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극성의 증좌가 될 만하다. 작품 내에서 은혜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탈 또한 벗은 것 같았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여러 관념의 요소들, 즉 광장, 밀실, 코뮤니즘, 자본주의, 철학 등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단순한 힘은 사랑에 있었고, 그 사랑 또한 적극적인 기질이 있을 때라야만 형상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실패일 때도 역시 많은 가치를 갖는다. 이런 이유로 하여 명준이 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명준에게는 진리의 조그만 틈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내딛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까지도 거기에 담을 수 있는 틈이 점점 명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의 모습으로 엄마 비둘기와 딸 비둘기라는 극도로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진리란 언제나 가려져 있으며 힘들게 찾아낸 진리라는 것도 어쩌면 환상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슬픈 암시를 명준의 최후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명준의 자살이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어서 "중립국"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립국' 또한 명준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비관적이다. 죽음의 세계를 명준은 택했지만, 亡者에게는 다소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우리로서는 더욱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이 항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달아놓은 코멘트와 광장 안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세계관이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눈 쌓이고 강풍이 몰아치는 산 위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진리라는 꽃은 그것을 꺾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비추며, 도처에 죽음이라는 함정이 깔려 있다. 이명준은 그것을 꺾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다. 명준은 꽃의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것은 명준이 믿은 잠정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명준은 필자에게 그런 꽃이 있고, 거기 이르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위험과 여러 조건들을 음유시인처럼 읊어주었다. 그래서 내 앞에는 눈 쌓인 산이 그려지는데, 당시 작가의 나이와 같은 스물다섯으로서, 작가와 명준은 합세하여 필자를 놀리는 것 같아서 언짢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요즘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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