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교수의 서문을 보며, 역사는 애정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닷컴(웅진.com) / 2005년 4월

 

 

 

역사 바로 알기의 계기가 되기를


천진하게도 나는 사실과 진실이 밝혀져 반공독재 정권의 본질이 백일하에 폭로되면 우리 사회가 크게 변모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현대사 연구가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현대사가 중․고교에서 교육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연구조차 되지 못한 것은 극우세력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극우세력은 현대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한 반공․냉전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짓눌렀고, 모든 사회운동을 철저히 억압하였다.

부분적으로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6월민주항쟁이 가열차게 전개되고 신군부 정권이 무릎을 꿇기까지에는 이념투쟁이나 학술운동이 분명히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현대사 연구의 영향은 더욱 한계가 있었다. 수구냉전 세력에게 아무리 진실과 사실을 들이대더라도, 그들이 마이동풍 격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종전의 억지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드라큘라 백작은 빛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는데, 일부 수구냉전 세력이 ‘진실의 빛’, ‘사실의 빛’을 회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놀란 것은 지식인과 언론인, 학생 등 어느 계층보다도 지적 욕구에 목말라해야 할 사람들이 현대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현대사에 무지한 상상태였고 그래서 그동안 왜곡되게 알고 있었다면, 뒤늦게나마 진실을 알고 싶어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더욱 답답한 것은 진보적 지식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역사를 중시했는데도 한국에서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 같았고, 뛰어난 역사학자이기도 한 푸코의 제자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그의 담론을 일종의 공식처럼 적용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유행복 바뀌듯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바뀐 것처럼 보여도, 이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추상적인 담론을 즐기는 것이 영락없이 1980년대의 어떤 풍토를 빼닮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에 현대사 연구는 사회과학도들이 주도했는데, 이제 사회과학 대학원에서 현대사 연구자들을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일까, 반복되는 것일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에 현대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진보세력 또는 소장 연구자들이 현대사를 왜곡하고 있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촛불 시위에 대한 대항 시위나 국가보안법 폐지 결사반대 시위에서 나왔던 것들과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해방 50주년을 맞아 이승만살리기를 벌이고, ‘건국’ 50주년을 맞아 박정희신드롬 키우기에 열중하던 모습과 비슷한 풍경인데, 그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보다 더 외로워졌고,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안 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일가.

진보학자들의 현대사 ‘왜곡’에 대한 대항운동은 실증적 연구보다 주장이 앞서고 있고, 그 주장도 상당 부분은 극우반공 시대에 귀가 아프게 들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러한 퇴영적 논리로 설득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진보학자들이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는 강변에는 섬뜩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자학사관’ 하면 일본 극우들의 ‘자유주의사관’이 연상되고, 그와 함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새역모)’이 떠오른다. 그들이 역사 교과서에 일제가 저지른 침략과 만행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을 자학사관이라고 공격하고, 일본군 성노예나 남경대학살 같은 만행을 은폐하며,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침략전쟁을 위대한 제국의 역사로 미화하기 위한 역사교육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보다 더 기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역사교육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자학사관을 본받자고 하다니.

현대사를 부정적으로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일선 교사들에게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현대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소재나 에피소드를 개발하자고 역설한다. 현대사는 격동의 연속이었고,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정치사나 경제사나 소재 개발에 따라서 흥미를 끌 수 있는 내용이 의외로 많다. 더구나 복식이나 주택, 연료의 변화 등 삶의 형태의 변화 그리고 엄청난 사고의 변화, 남녀관게․가족관계의 변화나 영화․가요 등 대중문화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에는 사회적․문화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자료들이 수두룩하다.

문제는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미군정의 잘못이나 이승만․박정희․신군부의 반공독재, 인권 유린 행위를 은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인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숙했고 시민사회의 모습도 잡혀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걸맞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실은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저술에서도 각별히 유념했지만, 현대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도록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 해방이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했는가,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상당히 빠른 수준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점 그리고 교육의 확대로 한글세대가 대거 탄생하고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1950년대에 1960~1980년대 경제발전의 초석이 놓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가르친다. 특히 나는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역동적인 힘을 중시한다. 역동성의 기반인 평준화가 왜 그렇게 빨리 성취되었나를 설명하고,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등 여러 선거에서 유권자의 한 표가 독재정권을 위협했던 것을 강조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참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위대한 운동이다. 1950년대의 암흑을 뚫고 4월혁명이 일어났고, 유신체제의 폭압도 민주주의의 갈망을 짓밟지는 못했다. 광주항쟁에서 6월민주대항쟁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민주화운동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투쟁인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만큼 자유를 누리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남북관계도 호전시켜 세계에서 드물게 민주화운동이 성공한 사례로 꼽히고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자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과 그것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생관이나 역사관이 다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근․현대사는 갈등이 심했고, 그 때문에 쟁점이 많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경우에서처럼 이러한 갈등도 대개는 인생관․역사관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와 함께 도덕적․정신적으로 약점이 많을수록 억지주장을 부리게 마련이고, 여러 형태의 ‘권력’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큰 줄기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모든 한국인들은 단 두 가지만을 열망하고 있었다. 독립과 민주주의. 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자유.”라고 말한 것에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세상, 이성과양식, 양심이 살아 숨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같은 언저리에 있다.

이 책은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서 정치․경제․문화 면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고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4월혁명과 6월민주항쟁은 정치사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다. 자유는 그렇게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유신체제는 정치적으로만 질곡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신은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었고, 사회․문화․예술에 참신한 자극이 되었다.

적 무지나 한계 때문이겠지만,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편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발전만 하더라도 박정희 한 개인이나 소수 기업가 또는 테크노크라트에 공을 돌리는 주장들을 자주 접한다. 그렇지만 경제발전의 중요 원동력인 우리 사회의 역동적인 힘도 평준화 현상 등 몇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고, 이 책에서 기술한 대로 평준화 현상도 한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경제발전에는 국가 집행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평범한 얘기지만 그것도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특히 경제발전을 가져온 핵심 축인 노동과 해외 자본도 박정희 개인의 공로와 거리가 있다.

나는 이 책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공정히 기술해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정확히 기술해야 하고, 또 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데도 빠져 있거나 부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들이 적지 않고, 연표 하나 마음놓고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기술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마땅하게 추천할 만한 현대사 개설서를 찾기 힘들지만 이 책은 정확성에서 믿을 만하다는 신뢰감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초고를 보더니 웅진 편집부에서 일부 자를 것은 자르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해 배경식 군과 수고가 많았다. 정치사의 경우 기본 자료에 의존해서 쓸 수 있었지만, 가요와 같은 대중문화 등은 모르는 것이 많아 기존의 글을 주로 이용했다. 1950년대의 여성 활동과 관련해서는 이임하 군의 박사학위 논문을 활용했다.

이 책은 정치사나 경제사에 치중해 기술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치사가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경제․교육․사회․여성․문학․예술․대중문화를 종합적으로 함께 기술해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겠다. 현대사와 관련해 책을 몇 권 냈으나,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창작과비평사, 1997년)에 공동집필자의 한 사람으로서 현대사를 맡아 300여 매를 쓴 것을 제외하면, 이 책이 최초의 현대사 개설서라고 볼 수 있어 집필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훨씬 넘은 은사 김철준 선생님은 평생에 대중을 위한 한국사 개설서를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은 역사가들의 꿈일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문장이 난삽하고 길기로 유명한데, 과연 대중 역사서를 쓰실 수 있을까 했는데 얼마 후 작고하셨다. 이 책의 원고를 쓰면서 김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는데, 변명 같지만 현대사의 경우 대중적인 역사서와 전문적인 역사서를 구별하여 쓰기가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해방 60년, 을사조약 100주년, 한일협정 40주년, 남북정상회담 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것만으로도 역사 논쟁이 많을 터인데,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중․일 세 나라에서 ‘새역모’ 등 일본의 극우세력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될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친일파 문제, 정부 수립 직후 한국전쟁기의 주민 집단 학살 및 여러 의혹사건이 얽혀 있는 과거사 청산문제도 계속 주목을 받을 것이다.

동양에서 환갑은 하나의 시기가 지나고 다음 시기가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60주년을 맞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현대사를 되돌아보고 진지하게 성찰하여 새 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이 책을 올해 역사 논쟁, 과거 청산의 화두가 될 진실과 화해, 새 출발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극우반공주의자들의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도 품어본다.

원고를 넘긴 지 1년이 되어 책이 나오게 되었다. 좋은 책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 같다. 현대사의 경우 사진 한 장을 쓰는 데도 저작권 때문에 애를 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책이 늦게 나온다고 불평하기에 앞서 사진과 그림, 도표, 박스기사 등으로 현대사를 눈에 확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무진 노력하는 배경식 군과 김형보 편집장의 정성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배 군은 나와 웅진 편집부 사이에서 마음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수년 전에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1~3권으로 호평을 받았고, 작년 9월에 발행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도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출판됨으로써 웅진과 함께 기획한 대중을 위한 한국사는 일단락짓는 셈이다.

2005년 3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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