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지음 / 민음사 / 2003년 6월

 

김수영의 산문집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또 즐겁게 난다.

세상의 온갖 회유와 압박도, 오늘날의 회자와 찬사도 결코 녹일 수 없었던 그의 비판정신. 특히 내적 자기성찰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그였다. 그가 남긴 '창작자유의 조건'을 펼쳐보자.

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펜 클럽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창작자유의 조건' 중에서)

정치와 법치는 문학과 예술보다 비속하니 한 사람의 인권쯤은, 그것도 대한민국 국보법 안에서 이를 무위로 만들려는 괘씸한 몸짓쯤은 초당적으로, 초법적으로 다뤄도 된다는 말인가.

천정배 법무장관의 인터뷰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 김수영을 떠올리게 되었다.

“터무니 없이 본질을 벗어나는, 어떤 면에서는 본질을 호도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국가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법치주의다. 형사소송법은 불구속 수사 원칙, 즉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가 소명되지 않으면 불구속 수사한다는 대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 모든 인간,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돼야 한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구속되는데 왜 한 사람만 봐주냐는 얘기가 있다. 턱도 없는 얘기다. 한두 명 제외되면 어떠냐는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한참 먼, 군국주의적·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본질적으로 국가는 국민 개인의 인권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저급한,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비판이다.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치적, 정략적 의도라고 의심하고 있다.”(천정배 법무장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절대적이어야 할 것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고,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규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와 법치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제도와 관습과 법률을 뛰어넘는 것은 장대한 이상(理想)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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