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피의 세계
- 잔치



잔치論


소피의 세계는 철학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이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잔치에는 어중이떠중이, 이야기꾼, 훼방꾼 같은 온갖 군상들이 모여 있다.
잔치란 '불러온다'는 의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오면 좋고, 그들과 함께 기쁜 일을 함께 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잔치의 문화는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남몰래 외딴 곳에 가서 함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둘의 관계를 천명하고 거기를 시작점으로 삼음으로써 둘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끌림에 의해서만은 아닌 좀더 정당한 가치를 획득한다. 잔치의 포용성은 엄청나서 철천지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완전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잔치'와 '놀이'를 권해 보라.



20세기의 인간상으로 떠오른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는 놀이를 노동을 위한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속성으로 본 개념이다.(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잔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고조시키며, 힘을 북돋우고, 활력을 준다. '잔치'의 의미를 잊어버린 교육은 이미 죽은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놀이와 잔치가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리라. 누군가 아주 간결하게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잔치란 다양한 사람들이 두서 없이 모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격조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잔치의 한 종류인 '놀이'를 살펴보아도, 명확한 규정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낸다. 아마 우리들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의연하게 가둘 수 있는 것은 '잔치'밖에 없으리라.


소피의 세계는 철학자들을 초대한 잔치에 환상과 추리라는 놀라운 재료를 추가하여, 우리들을 가상과 현실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환기시켰을 뿐이다.


문학과 철학의 협연(協演)


문학과 철학은 사이가 안 좋은 쌍둥이 자매와 같다. 잔치에 함께 초대되어 하나가 춤을 추면, 다른 하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감수자의 말처럼 철학은 개념으로 말하고, 문학은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상충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할 때 절묘한 협연은 물건너 가는 게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하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보였으니, 문학가와 철학자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 철학자이지만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러셀이나 베르그송은 하나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에 충실하였기에 그러한 평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점에 널브러져 있는 '저자세의 철학서', 철학은 뛰어나긴 한데, 어떻게 뛰어난지, 어떻게 인생에 유용한지 이야기할 수 없는 문맹의 철학자들, 철학의 대중화라면 으레 '통속 철학'을 떠올리는 철학의 무지자들. 이들은 잔치판 옆에서 암표상, 사기꾼들을 모아 놓고 또 다른 잔치를 벌인다.
소피의 문학은 철학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절묘한 문학적 가치도 빛나는 작품이다. <소피>는 철학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 때는 꿈처럼 철학의 전체를 어림해 볼 수 있고, 철학에 어느 정도 관여한 후 읽었을 때는 긴 여정 안에 쉬고 있는 두 발과 어깨를 편안하게 주물러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소피>가 문학적 가치를 얻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 때문이리라. 철학의 이야기와 문학의 이야기가 만나는 점은 유기적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철학에 끌려 가지 않고, 독자적인 형식을 발휘한다. 철학은 종종 인물의 엉뚱한 행위와 애매한 단서를 찾는 열쇠가 되기도 하여 문학과 철학의 묘한 협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소피>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성서에서 예수는 여러 번 비유의 효용을 말하던 비유의 천재였다. 비유는 철학의 기본 명제인 '관계'를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으며, 자칫 철학적 논의에 피로한 독자에게 '단비'가 되어주기도 한다. 건강한 비유는 건간한 작품을 낳고, 철학과 문학을 단번에 만나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실 '비유'는 문학가의 긍지만이 아니라, 철학자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철학자에게 이 세계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세계로 비쳐진다. 철학자와 어린이는 이처럼 중요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는 일생 동안 어린 아이마냥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장담해도 좋으리라.
- '본문' 중에서


지고한 시간들의 잔치


철학은 오래된 질문의 전승이다.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물음일텐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수많은 질문으로 나뉘고 각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이 계승하였다. 마치 빅뱅의 현상처럼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고 있던 간단한 사유가 폭발하는 순간 '잔치'는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나 먹을 것은 아직도 많고 할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가지 주제가 잔치를 주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신이 모든 것을 꾸미고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어려운 일이나 궁금한 점은 모두 신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에 잔치의 이야기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꿈꾼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몇몇 사람의 가슴속에 샘솟았다. 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일은 자명한 이유에 의한다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 다음은 인간이었다. 이렇게 신에서 인간, 인간에서 물질, 물질에서 관념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넘나들면서 잔치는 더욱 흥미로워졌고, 이에 따라 여러 이야기꾼들이 자리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괴테는 잔치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대문 왼편에 이렇게 써놓았다.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리


고매한 선각자들의 잔치


오랜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옥같은 시간들을 장식했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야기를 주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광석보다 빠른 신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람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이다. 물질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는 탈레스와 원자론자들이 있었고, 인간의 발견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자신의 뜻을 제자에게 전승하고 제자는 또 다른 제자에게 전승하여 삼천년의 시간을 한줄로 꿰뚫으며 경험과 이성 사이에서 건강한 논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한 논객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고 사람들은 놀라고 즐거워 하였으나, 새롭게 나타나는 강자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사유로 세상을 다 설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맹자도 역시 잔치집 문을 나서며, 잔치를 열 밸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대문 오른편에 써놓았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낯설음, 화합, 화해


당신이 국경 아래쪽에 있었더라면 나의 친구가 되었겠지만, 그 위쪽에 있으니 나의 적이오.
-파스칼, <팡세> 중에서


우리들의 의식과 환경은 거의 완벽히 우리를 가둬놓는다. 아무 문제없이 수많은 세월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의식하고 발견하자마자, 친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와 브루노가 죽은 것 역시 이 위협 때문이다.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세상을 안배한 조화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감성'은 신이 주신 선물이 분명하다. 세상은 경이로 가득 차 있으나, 유년기를 넘으면서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계절이 바뀌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 '생명'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힐데와 소피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존재가 확고하고, 자명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천문학자가 보는 별은 수천년 전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인지 과거의 모습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또한 내 존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철학은 화합과 조화의 예술이다. 국경과 전선을 넘나들며 공평한 이데아의 세계 안에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밝은 혜안만 가진다면 계급이나 격차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한다. 엠페도클레스나 플라톤, 칸트 등이 철학자로 더욱 존경받는 이유는 학설과 사유를 종합하고 화합했기 때문이다. 기발하고 신선한 상상을 하는 것은 누구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을 '세계적 사유'로 발전시키기까지는 고된 과정과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소피의 파티장에 만화와 동화의 주인공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의 유년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가 존재이고 비존재인가 하는 기준을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차라리 수십억 년 동안 타고 있는 거대한 불의 불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실재적일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하고, 가치판단의 세계를 좀더 넓고 깊고 오래된 그것으로 관찰할 때 나의 존재는 드디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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