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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ㅣ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혁명의 구조
-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패러다임의 스펙트럼
인문학이 고전할 때에도 기술과 과학은 항상 진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가지는 '축적성(蓄積性)'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오히려 비축적성을 가진다고 한다. 비록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자연에 대한 해석도 새로운 해석으로 대체되고 나면 폐기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연과 인간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들은 시대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으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수천 년 동안 고민해왔음에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인간성의 부재와 불균형, 불평등, 불만 등의 인류를 내부에서 위협하는 문제에 항상 위태롭게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과학만 거기서 자유롭단 말인가. 우리가 축적하였다고 하는 기술력은 단지 어느 시점까지만 효용성을 가질 뿐이다. 각국에서는 지금도 가공할 만한 자연재해와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산재해 있으며 우리들의 과학기술력을 비웃는 각종 바이러스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과학에서는 우리가 흔히 사조(思潮)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정신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패러다임(paradigm)1)이라 부른다.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교체되는 특성을 가진다. 돌턴이 있기 전까지 화학계에서는 용액 안에 화합물(化合物)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어서 정량적인 파악이 불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턴은 섞이지 않는 고유한 성질의 원자가 일정한 성분으로 결정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고 단순히 섞여 있으면서, 고유의 특성을 발하는 혼합물(混合物)이 그것이다. 화학은 그에 의해서 드디어 규칙성과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데, 그것을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전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순에 의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아이디어로 전환된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기란 좀처럼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와 철학가들은 '모험가'의 성격을 띤다. 그들이 이해한 것은 아주 자연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발견에 의해 대체될 여지는 언제나 상존해 있는 것이고, 그런 혁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좀더 근사한 자연관을 가질 수 있다.
패러다임을 스펙트럼이라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이 가지는 특성에 연유한다. 패러다임은 규정짓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패러다임은 체계라기보다는 '사고의 다발'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일례로 산소의 발견자가 누구이며 최초로 발견된 때는 언제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에 답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소의 발견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산소라는 최초의 착상을 얻은 이후에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명료한 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와중에 착오도 적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최초의 발견자나 발견일 같은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들이 '최초'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항상 정답만을 나열해온 교과서의 영향이 적지 않다. 패러다임은 과학에 있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뉴턴이 시간과 공간을 '절대성'의 개념으로 파악한 데 대해 라이프니츠는 '상대성'의 입장에서 보고자 하였으나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가 나오기 전까지 라이프니츠의 '이견(異見)'은 방치되었다. 그러나 항상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에 대한 예견을 심어준 것도 패러다임의 요소이다.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는 활동을 '정상과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발견에서부터 새로운 사실의 발견 사이에 격론이 지나가고 나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수습된 형태의 과학이 정상과학이라 할 수 있는데, 정상과학에서 '이상현상'이 발견되고 그것이 점차 증폭되어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을 때 '비상과학'에 의해 대체되고, 그것이 이제 정상과학이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정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설을 던져주는 것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므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이상의 징후를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들을 납득시켰을 때에야 일각에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새 이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시대가 경직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성의 시기는 훨씬 늦춰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은 몇몇의 학설로 대체되기 힘들다. '패러다임으로 패러다임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들이 긴 꼬리를 밝히며 스펙트럼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과정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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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은 기존의 패러다임[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해내지 못하거나 설명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때, 그러한 전조들 즉 이상(anomaly) 현상을 만족시키는 비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 출현하는데, 이 두 패러다임의 대립기간을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이 때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無知)를 대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동일한 토양 위에 진리로 가기 위한 길만 새로 닦이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놓인 시멘트나 기초자재들은 고스란히 활용되기도 한다. 거기에 몇몇 부족했던 기초 자재들과 인물들이나 지식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방향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며, 이전의 건설계획서를 폐기하고 다시 쓴 새로운 계획서 안에 모든 소재들이 개편되어 공사가 진행된다.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일생을 통해 연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정상과학이 도전을 받는다면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들의 저항은 몇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과학자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여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좀더 먼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첫째와 유사한데, 이전 패러다임이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패러다임은 유보된다. 이 때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농후한 예견들과 이상현상의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지구인들에게 오랫동안 세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관측도구의 발달로 구체적 확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체 이론은 18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라이프니츠도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이라는 뉴턴 체계에 대해서 공간과 운동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암시하였으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과학자 사회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견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연구자들을 위해 진리의 비석에 비밀을 새겨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밤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는 별빛이 수만 년 전의 기억이듯이.
셋째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유보 상태이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위치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곧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어야한다. 이 때의 저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 작업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패러다임의 지위에 올라섰을 때 이전 패러다임은 비로소 대체된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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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패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이 되어, 한동안 세계를 읽는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자연의 역동성과 하나씩 벗겨지는 무지의 자각이 서로 호응하여 과학의 계절을 이룬다.
명예의 전당 - 교과서
교과서는 '명예의 전당'과 같이 역사의 화려한 주인공들을 나열한다. 뉴턴 다음에는 아인슈타인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으며 하이젠베르크도 아인슈타인의 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그에 따른 부수적 요청들과 인내의 시간들, 격론의 굴곡들이 저자들에게는 주요한 소재로 선택된다. 교과서에서 우리가 쉽게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역사의 극적 파노라마를 완벽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가지고는 발견자가 자연의 해석에 매달렸을 때 느꼈을 괴로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견을 느낄 수 없다. 그것들은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오로지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교과서에는 가려져 있는데,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되므로, 우리의 눈에 과학은 결실이 차곡차곡 쌓인 풍요로운 곳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숙한 연구자의 눈에 그것은 자연의 역동성을 억측으로 묶어둔 엉성한 '지식의 다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다른 분야의 교과서에 비해서 과학교과서가 유독 경직된 자세로 탐구자들을 묶어놓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서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인문·철학서적을 보면서 우리는 저자들과 직접 대면한다. 그들이 시대적 상식에 사로잡힌 성향이나 글쓰기의 습성, 개인적 취향 등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문학 연구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 연구는 필수적이다. 만약 도스또옙스끼의 생애를 모른 채 그의 문학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진리의 반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과학 탐구자들은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잘 정리된 교과서를 통해서 이들이 가지는 시대적 무게감을 실컷 맛보게 된다. 과학 교과서는 대부분 발견과 영광·의미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연구자들은 아류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도 그 이론이 생성되기까지 전혀 엉뚱한 과정과 맹점을 알지 못하며 나아가 탐구자들에게 교과서의 인물들은 신의 지시를 받고 그런 발견을 이룬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과학 교과서들(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 과학사(科學史)들)은, 명백하게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 교과서를 가리켜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학의 역사를 축적적으로 채색하려는 교과서의 횡포는 자칫 과학을 박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자연과 함께 인간의 정신과정도 생동하는 것인데, 정수를 뽑는다고 요약을 해버리면 독자가 그것에 대해 정당한 판단을 내릴 기회를 박탈하는 셈이다.
진정한 과학은 패러다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이며 비축적적인 정신의 총화이다.
위대한 착각
패러다임이 일단 출현하면 그를 중심으로 명료화, 검증화 작업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은 대폭 수정되며 전혀 새로운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발견자들의 착상인데 소위 '위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알기에 자연은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착오는 필연적이다. 착오율을 좀더 줄이고 논의를 세련화시키는 것이 연구자들의 역할인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바로 앞의 연구자가 했던 판단, 즉 '위대한 착각'이다. 맥스웰은 뉴턴주의자로서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르(mechanical eth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었는데, 그러한 착상을 명료화시키는 과정에서 '에테르의 끌림'이란 것은 허구가 되어버렸고 그는 본의 아니게 뉴턴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말았다. 이런 전복과정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착각은 두 가지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신앙'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신의 지위를 찾아 완전히 일어서게 되기까지의 시행착오들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착각'도 바로 후자이다.
이런 착각들의 발견은 많은 이상 현상과 비상적 탐구를 자극시키는 원료가 된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패러다임이었다. 다윈 이전에 진화는 목표-지향적 과정(goal-directed process)으로 간주되었으나, 다윈에게 있어 설정된 목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e-what-we-wish-to-know) 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from-what-we-do-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돈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정상과학의 위치에서 탐구를 수행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착오의 표시들은 우리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인도자가 된다.
이미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우리들은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니, 우리 후손들은 우리들의 탐구자세를 우습게 보아 넘기지 않고, 우리들이 착오를 일으킨 부분을 더욱 신경 써서 관찰할 것이다. 그 때는 정상과학의 교과서와 '착오의 교과서'가 서로 호응하여 현재보다 유연한 패러다임의 생산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 중의 하나는 '축적과 결실'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이때까지 쌓아온 정신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믿음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처럼 자리잡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인간은 '축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한다. 세계와 시대는 그에게 좀더 다른 요구를 하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력을 소비하여 시대를 견딘다. '축적과 결실'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허위와 기만이 틈입한다. 인간이 보다 솔직하다면 우리의 학문의 위기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무기를 갖고 무기가 자신을 언제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편승해 있을 뿐이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는 너그러운 것은 경직된 정상과학의 주범이 되며 답보상태를 만든다. 솔직하고 진솔한 탐구는 자신과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유일한 열쇠다. 조금은 자신에게 냉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예전에 이 배를 탔던 사람들의 방향과 계획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방향키를 정반대로 돌릴 용기가 없다. 이 배는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이 전의 선원들이나 그들의 할아버지들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선배 선원들이 가던 방향을 따라 계속 흘러왔을 뿐이다.
정상과학은 닻이다. 세상의 대해(大海)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표시하는 부표이며, 나의 오늘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비망록(備忘錄)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을 전제로 쓰여지므로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패러다임은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다린다.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며, 자연에는 우리가 평생 만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표본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
- 주(註) -
1) 패러다임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란 뜻의 단어에서 차용해온 단어인데, 학생들이 주어진 기초 지식을 통해 예제(例題)를 푸는 방식에서 여러 가지 변형이 유도될 수 있다.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난 연구자가 사례를 접했을 때 각자 다른 방식의 문제풀이가 생길 수 있고, 서로의 대결을 통해서 보다 올바른 형태의 방식이 채택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