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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 유전자
- 생존을 위한 혈투
전체와 개체
인간의 의식이란 게 생겨났을 때부터 그것을 지배한 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은 신비롭고 재미있는 세계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작용인지 권력의 생리작용인지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천과 반복을 거듭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과학과 철학, 문화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사조는 대개 '전체를 포함하려는 야심'을 갖는 특성이 있다. 철학사나 문학사 한 분야가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가 대표정신의 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적어도 두어 가지 분야의 연계를 통해 자신들의 운동을 역사에 알렸다.
고대에는 우주의 기원과 최초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시대를 지배했다. 그리고 어떤 반발을 통해서 좀더 솔직히 인간이나 무지의 자각이 대세를 이끌었던 적도 있다. 이에 대한 제안으로 '척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논리나 과학이 그에 해당한다.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현재 우리들의 '척도'가 생명과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학이라 함은 보다 인간에게 실질적이고 미시적인 세계이다. 전체에 대한 고찰은 어느 정도 우리들에게 위험과 모험(어쩌면 억측까지도)을 요구한다. J.브로노프스키는 그의 저서에서 점차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은 생명과학이 될 것이며, 수학자로 출발한 자신의 일생에서 생명과학의 작업에 참여했던 경력을 '축복 받은 기회'라고 술회하였다. 인간이 과학에 의해서든 철학에 의해서든 좀더 내부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살되 전체에 의해 희생되는 일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혹시 내가 이야기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개인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쓰고 싶다. 지적으로 지극히 성숙한 한 인간은 인류를 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골자인데, 우리들이 내부의 눈을 통해 좀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과 나에게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불가피한 이기성과 투쟁
서로 돕고 살며, 이웃을 사랑하라
위의 명제를 평생동안 새기며 이왕이면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이기성'이란 말에는 우선 거부감부터 생긴다.
저자는 초입부터 아예 이 책에서 도덕이란 말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특히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자비'란 곧 퇴화를 의미하며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체에게는 독약과도 같다. 우리들은 탄생에서부터 수백억의 정자군을 물리치고 태어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기성은 생물학적 시원(始原)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타(利他)라 함은 양보를 뜻하는데, 그 안에 이기적 개체가 끼여들어 이익을 독식한다면 집단 내의 이타적 계보를 보존할 수 있을까 하고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실제 우리가 이타적이라 하는 집단은 '이기성'을 전제로 생성된 것들이 많으며, 누군가는 그 지고한 뜻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민족'이나 '국가'이다. 인간의 존엄성도 만물의 영장도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희생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서두에서 저자의 요지는 이것이다. '이기성'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걷고 생활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담겨 있는 이기성을 솔직히 인정하라고 저자는 요구한다.
자기 복제자와 생존
생존이란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사명이며 생명보존에 필요하다면 적당한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저자의 이론이 논리를 얻는 지점은 원초적 활동인 생존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생존의 명수이다.
생명의 유지라는 것은 거친 바다를 횡단하는 것과 같다. 시간의 풍화도 만만치 않으며 다른 종족간의 대결도 커다란 장애이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야 하며 최고의 효율성과 역량을 보유해야 한다.
이러한 생존의 대안은 '결정(結晶)'이 있다. 결정이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의 결정이 입방체인 이유는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결합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현실에 맞는 결정을 찾아서 생존하고 있다. 과일을 예로 든다면, 여기 사과가 있다. 누군가 칼자국을 내지 않는다면 나름대로의 결정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 그 모양을 유지할 것이다. 오랜 경험과 자기 생존을 통해 유전자는 나름대로의 모델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 모양은 인체라는 기계를 조종하기는 하되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얻어도 자식에게 전수되지 않는 까닭도 유전자의 '간접 제어' 때문이다.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서, 유전자는 두뇌나 문화 같은 요인에 의해 통제되기도 한다.
유전자가 오랜 시간을 기울여 만든 질서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유전자가 100만년 후의 이야기를 쌩뚱같이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기 복제자와 진화
자연선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선택하는 것일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저자는 자연에는 '건축물은 있되 건축가는 없다'고 못박았다. 한 개체의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처절한 대결을 통해 상대방을 몰아내고 판의 승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청동무기로 무장한 적들이 영토를 차지하고 판을 장악하고 있을 때 철을 개발한 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한 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생명활동이란 엄청난 의지력의 총화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렬히 욕구한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명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모든 신경과 욕구가 거기에 쏠려 있다면 점점 거기에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판을 지배하게 된다. 최초에 유전자에게 부여된 지령은 '살아남아라'였지만, 여기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녀석을 제압하고 네가 살아남아라'
여기에 적합한 사례가 바로 '의태'라는 현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 표지를 기억하여 그런 종류의 나비를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나비는 잡혀 먹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나비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도 종종 그것들에게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있으며 새들도 속는다. 정말 나쁜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이 의태가 진화하는 이유이다.
본문. 69p
유전자의 팀플레이
진화를 자연선택이 유능한 돌연변이에게 부여하는 생존 자격이라고 한다면, 그 영예의 수상자는 군체(群體, colony : 집단)이다. 사실 돌연변이란 용어도 군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쓸 수 없다. 즉, 하나의 군체에서 돌연변이가 강력하게 자신의 위세를 뽐낸다. 유전자 군체는 자기복제를 잠시 멈추고 돌연변이를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고 결국 돌연변이가 반영된 군체로 복제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돌연변이의 조건인데, 군체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육식의 이빨이 초식동물의 세계에서 열등한 유전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능한 육식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평평한 어금니와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매우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는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본문, 76p
선택은 현실에 적합한 유전자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개개의 생존기계는 공동체적 진화에 익숙하다. 하나의 예로 세포 클럽은 특수한 형태로 분화하여 하나의 목적을 향해 협력한다.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감지기로서 공헌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다른 세포는 근육과 촉수를 이용해 먹이를 낚아채고, 어떤 세포는 체내에서 요구한 양대로 잘게 자르거나 분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조합이 긴밀하고 견고할 때에만 모두의 생명이 보장된다.
프로그래머
우리들은 유전자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지만, 막상 태어난 후에는 유전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퍼튜너티(opportunity)호를 발사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우주선이 만나게 될 역경을 최대한 예측하여 그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뿐이다. 우주선이 바위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바위를 치워줄 수 없다. 그것을 저자는 '시간 지연'이라고 말한다.
시간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학습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것과 접촉할 경우 조건 값을 넣어서 조건에 합당하면 좋은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다면 피해야 한다는 명령어를 입력한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과 같은 보상이라고 정의되는 사물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고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에 해당되는 싫은 사물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그 후에 싫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다시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위의 지령이 수많은 성인병 어린이나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할지도 모르며, 이 지령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죽일 놈이 되겠지만, '학습능력' 역시 진화한다는 것을 염두해 둘 때 적절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점장인 유전자는 뇌를 지점장으로 임명해 매일같이 일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일정의 권한을 부여하고 심혈을 기울여 투자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본점장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뇌는 고도로 발달하여 지점장 겸 전결권자(專決權者)가 되었다. 즉, 방침을 결정하던 유전자 고유의 업무를 대부분 인수하였고, 유전자의 방침이 부당하다면 수정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인간 세계에서 뇌는 유전자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다. 만약 뇌가 유전자의 암호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유전자를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고
이 책에서 도덕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의 경고로 읽어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하게 비이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거의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의 곳곳에 '격전지'로 부를 만한 지면이 있는데, 그 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목적론이나 호혜적 이타성, 초월자의 존재가 등장하는 부분을 '이기성' 이론으로 채우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렬한 욕구로 인한 '이기성'은 현상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이타성이나 초월자 등의 대입은 논리적 맹점을 애써 작위적으로 처리한 흔적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과학적 사고가 될 수 없고, 어떤 현상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라 볼 수도 없다.
생물체에게서 유난히 강하게 나타나는 모성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형 배우자가 융합할 경우, 새로운 개체에 기여하는 두 배우자의 유전자가 동수인 것은 물론 두 배우자가 기여하는 음식물의 비축량도 같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의 기여수는 같다. 그러나 음식물 비축에 대해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다만 정자는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평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서로 다른 암컷들을 이용하여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2세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본문, 231 ∼ 232p
인위적으로 해석된 생물계의 특성에 대해, 도의적인 어법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저자의 고심이 저서 곳곳에 배어 있다.
생명체가 자식의 보존에 적극적인 이유는 '복제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에 다름아니다. 자기복제를 통해서 개체를 번식시켜야 하는데, 그 막대한 부담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혈투가 암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체는 부성애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생명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이기성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새,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같은 육상동물은 체외 수정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생식 세포는 매우 건조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의 운동 능력을 가진 정자가 암컷의 젖에 있는 체내로 주입된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에 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여전히 도망쳐서 암컷을 트라이버스의 '가혹한 속박'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봉쇄하고 먼저 도망칠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아이를 내버려 확실히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물러서 양육을 할 것인가의 결단을 모두 암컷에게 떠밀어 버린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의 자식 보호에는 아비보다 어미에게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비롯한 다른 수생동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암컷이 '자식을 품고' 혼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에 종종 수컷이 버림받는 이유는 어느 쪽이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하는가를 가지고 진화적인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한 개체는 수정된 배를 상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동시에 배우자가 자칫하면 뒤따라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 점에서는 정자가 난자보다 가벼워서 확산이 쉽다는 것만을 고려해 봐도 수컷 쪽의 위험이 크다.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가 되자 않은 상태에서 알을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알은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은 한 덩어리가 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있다.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방출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산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을 낳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산란하기를 기다려 그 후 알에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간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서 수컷을 트라이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에 의한 자식의 보호가 왜 물 속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솜씨 좋게 설명하고 있다.
본문, 252 ∼ 254p
그것은 자살적 행동으로 포식자에게서 집단을 지키려는 톰슨가젤의 희생적 뜀뛰기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톰슨가젤의 높이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적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뛰기 위장이 다른 영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본 다른 영양이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은 부수적일 뿐, 어쨌든 그것은 무엇보다도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나를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의 형태와는 다르게 포식자는 쉽게 잡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게 허세 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리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멀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이기적 행위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에 포식자에게 다른 개체를 쫓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가를 확인하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전자가 가지는 이기성은 '자기 복제에 미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체간의 생존경쟁을 통해 더욱 격정적인 장이 되는데, 포식자의 위협과 개체의 증산이라는 조건이 상충되어 있다면 유전자는 안전을 택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적 매력을 갖춘 개체가 암컷 세계에서 강자로 생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유전자는 거추장스러운 뿔과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의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유전자가 우리에게 주는 극적 긴장은 바로 '생존'에 걸려 있다. 상식적으로 진보된 역량을 갖췄으나 환경이 그에 반한다면 유전자는 당연히 한 단계 퇴보를 반복하더라도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강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정적이 나타난다. 유전자의 풀은 고요하지만, 그곳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전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통일된 하나의 비유이다. 기존의 생물학적 의식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관심은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한정돼 있었다. 뒤늦게 알려진 이유로 유전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부속품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운반자에 앞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운반자는 모든 생명체의 현상을 민족, 국가, 인간의 시선 안에 국한해서 설명하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유전자는 점점 확장하여 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연계와 인과의 과정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군체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이른바 개체가 되지만, 개체와 개체는 '유전자의 긴 팔' 안에서 숨쉬고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체가 수십 수백만 년 동안 살아가는 과정이며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될수록 우리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에게 말을 걸어야 하며 우리들의 기원과 추후의 향방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수십억 년의 지구 안에서 불과 수십만 년 전에 갑자기 태어난 나이 어린 존재가 아니라 지구가 수십억 년 동안 정성껏 품어서 탄생한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처절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갖은 시도는 비단 유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도 지키고 살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죽음의 위기를 항상 목전에 둔 유전자의 용감한 행보를 살펴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가 하는 비감이 눈을 뜬다.
다시, 밈(meme)의 격전지로
유전자와 뇌 간의 불화를 조화시키고, 돌변하는 현실에 유연히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차세대 주자가 바로 밈(meme)이다. 그 안에는 문화와 강렬한 욕구가 담겨 있으며, 유전자처럼 복제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강력한 기억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견고한 결정만 갖춘다면 유전자에 버금가는 영속성도 가질 수 있다. 밈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르게 개체를 증식시킬 수도 있으며 독자적 유형의 진화도 이끌 수가 있다.
저자는 우리를 낳아준 이기적 유전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것처럼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뿐만 아니라 좀더 안정되고 이성적인 밈을 생산해 퍼뜨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밈은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 찢어진 청바지, 펑키 머리 등의 유행이 가장 낮은 수준의 밈이며 그것은 곧 경쟁적인 밈에 의해 대체된다. 그것은 첨단 IT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좀더 유통기한이 긴 밈으로는 사회이론과 철학, 과학, 패러다임이 그에 해당한다. 이 밈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를수록 견고해진다. 그리고 학설을 둘러싼 광범위한 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견고한 밈이 탄생한다.
다산은 학설 중에서도 10년 가는 학설이 있고 100년 가는 학설도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밈 자체가 '진리'를 넘어서는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엄격히 알 수 없는 이유도 밈의 견고함을 더해주는 이유가 된다. 역사라는 것도 강한 밈들의 경연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자가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내리려는 밈(meme)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목적론적 세계관이라는 맹신적 밈(meme)을 정당하고 과학적인 유추과정의 세계관으로 수정하려는 밈(meme)의 건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자신의 저술에서 도덕적 결론은 기대하지도 말라고 못박은 데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종교의 유혹이 너무 강하여 모든 결과를 그와 같이 이해하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곤이불학(困而不學)의 밈 바이러스
밈이 진리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밈이 가질 수 있는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와 곤이불학(困而不學)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니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겸손, 이해, 금욕, 헌신'등의 덕목들을 놓지 않지만 결코 그러한 덕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 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와 같은 덕목들에 지배당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진정한 행동가들은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대신 그들은 치밀한 관찰자이다. 인정세태를 관찰했을 때 겸손 등의 덕목이 가장 최고의 수(數)라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의 경지이다. 좀더 나아가면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듯이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신비스런 최고의 원인이며, 천(天)과 도(道)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생(生)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이다.
그러나 축복받은 선지자가 아니라면 그런 궁극의 경지는 힘들다.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은 겸손이나 이타 등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에 유리하므로 취하는 일종의 '이기적 유전자론'의 착상에 가깝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자기의 자유중 아주 조그만 부분을 희생하면서 그보다 큰 이익과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그것이 국가가 성립하는 근본 원인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가장 최하의 수는 '설익은 도덕률'을 그 근본으로 삼는 경우이다. 미국의 대다수의 중고교생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묻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것은 옳지 않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이 왜 옳지 않은지 반문했을 때 그들은 당황하거나, 질문자를 불경한 사람보듯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독재국가가 누군가를 찬양하는 현상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률이라는 설익은 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가 자신의 밈을 결론적으로 진술한 이유는 "밈은 조종할 수 있으며 조종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 우리에게 도덕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 물음에 너무 오랫동안 묵묵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전쟁과 독재, 원폭 투하 같은 장면은 "설익은 정의"라는 밈의 작품이 아닐까? 그런 밈들은 당연히 "정당한 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무지의 밈에서 자각의 밈으로 바뀐다면 우리들의 행위는 좀더 현명해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근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유익한 기회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서 핵탄두가 발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권력의 깃발을 밈 바이러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밈 원정대"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어릴 적 즐겨 보던 '퀴즈탐험 동물의 세계'를 보면 물고기나 물방개가 자식들을 업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고 제목에는 '동물들의 부성애'라고 나와 있었다. 나는 당연히 동물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까마귀를 효의 상징으로 보고, 올빼미를 불효의 상징으로 보던 우리 옛 조상들의 사고방식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 인정을 부여한 결과는 어쩌면 인간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겠지만, 사실적 접근은 아니다. 이 책에서 격전지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집단 진화론'과의 격론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자식을 수컷이 키우는 것이 그 종에 유리하기 때문에 종은 수컷에게 양육권을 부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단 진화론의 결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이기성 이론은 그보다 근본적인 단위에서 판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실적 접근이자 엄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사고방식의 오류를 이 책은 잘 꼬집어내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넘겨버리는 한 사물과 사고에 대해서 판단유예를 주장하는 시인의 눈이나, 철학자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엄밀성 또한 잊지 말아야 할 방법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1)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 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 중용(中庸) 20장
즉 혹 나면서부터 깨닫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깨닫는 사람, 애써 노력하여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깨닫는 한에서는 한결같다. 혹 별 마음씀 없이 실천하는 사람과, 행위의 이로움을 간파하여 실천하는 사람과, 애써 자신의 나태함과 맹점을 극복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천하는 한에서는 한결같다는 뜻이다.
위의 세 가지는 깨닫고 실천한다는 한에서 같다고 판단하지만,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지적인 역량을 품부받지도 않았고 머리도 좋지 않은데다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사람이 바로 곤이불학(困而不學)이다. 위의 세 가지 단계는 공통점이 있고 호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록 "전장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밈 바이러스는 "아군 사이에서도 백이면 백 모두 다르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이기성과 결합한다면 무서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다. 우리들은 주적 이외에 무서운 사방의 적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건강한 경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전투구이다. 반거충이의 학문이 세상의 독이 되듯이, 열악하나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득세했을 때 세상은 절망적이 된다는 경고를 옛부터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