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를 보면 사람은 원래 남녀가 자웅동체였다고 한다. 사람이 강력한 힘으로 신에게 도전하자 제우스가 진노해 벼락으로 내리치니 사람은 둘로 갈라져 버렸다. 남과 여로 나눠져서 반쪽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이날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헤매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미완성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동양의 고대에도 태극(太極)에서 음양이 나뉘었다고 말한다. 동양 고대인이 생각한 사람의 운명은 서양 사람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반쪽이 만나는 식이다. "0은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노자의 <도덕경>의 말처럼 음과 양이 결합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방식이다. 이 두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짝이 없을 때는 짝을 찾고(서양), 짝을 찾고 나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동양) 


나는 이 두 이야기가 결합된 방식이 인생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자신의 나머지를 찾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의 연속이다. 오랜 방황을 통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두 아이를 낳은 평범한 이야기에서도 동서양 고대의 사고가 녹아 있다. 문제는 이야기가 무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의 세계 속에서 부모의 반쪽을 찾고, 아이 역시 자신의 반쪽을 부모에게서 찾는 작업을 계속 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와 아이는 자기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낳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자로 표현해 보자. 아이는 '人'이고 부모는 '亻'이다 '亻'은 사람인 변(邊)이다. 부모는 아이 옆에서 아이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부모가 도우미 역할을 온전히 하고,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자기를 발견하는 일을 잘 해내면 드디어 '化'(화)라는 글자가 된다. 化는 왼쪽과 오른쪽에 사람이 대칭이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의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바뀌다'는 뜻을 나타낸다. 부모와 아이가 온전히 결합되고 나면 부모는 이전의 부모가 아니고, 아이 역시 이전의 아이가 아니다. 


化가 되기 위해서 부모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좋은 변화만 열거해 본다. 부모(亻)는 아이에게 애정과 '타인'과의 관계를 가르쳐 인(仁)을 만들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놓이려면 자신의 반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상대방을 초대해야 한다. 자기중시으로 꽉 차 있는 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공감할 능력을 가르쳐주려면 亻의 역할이 필요하다. 亻는 아이의 부모이지만, 아이에게는 최초의 '타인'이다. '他'(타)를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부모다. 


동양사람이 생각하기에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부르기도 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움직이는 순간 길흉화복과 삶의 번거로움이 생긴다. 아이는 부모에 비해서 훨씬 활동적이고 많이 움직이며, 감정 역시 역동적이기에 부모보다 훨씬 많이 지치고 상처를 받는다. 부모는 아이가 기대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休'(쉴 휴)를 준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집착하면 '쉼'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어쩌면 '쉼'일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품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태어나서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사회활동을 하고, 심지어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사회가 시작된다. 부모는 아이의 반(半) 사회이다. 아이가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있도록 부모는 '伴'(짝 반)이 되어 주어야 한다. 반(半)은 단순한 절반을 의미하지만, '伴'은 '좋은 반쪽'을 의미한다. 부모라고 당장 아이의 좋은 반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의 좋은 반쪽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일 뿐이다.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몸을 구부려 있다가 태어나는 순간 몸을 펼친다. 하지만 감정은 계속 구부린 상태가 된다. 부모와 대화하거나 놀거나 생활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伸'(펼 신)의 상태로 된다. 자벌레는 멀리 가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구부린다. 몸을 펼친다는 것은 고통이 따를 뿐만 아니라 두려운 일이다. 조금씩 연습하다가 펼쳐낼 때까지는 수만번의 연습과 시행착오를 한다. 부모는 아이가 틀리거나 실수하는 순간을 함께 하며 온전히 펼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도와줘야 한다. 


부모의 품에 있던 아이가 품 밖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된다. 꾀꼬리가 꾀꼴 꾀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까닭은 자신이 머물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자신의 둥지를 찾기 위해 꾀꼬리는 수만번의 날갯짓과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한다. 부모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려면 또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모(亻)가 아이를 서게(立) 만들면 아이는 자신의 '位'(자리 위)에 머물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한자의 세계는 너무 많고 쓸 자리는 부족하니 이쯤에서 줄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부모가  '亻'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지만  '亻'이란 사실 '人'을 옆으로 밀고 모양을 구부린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제 자리를 잡은 것이 '亻'이다. 이렇게 제 자리를 찾는 부모는 극히 드물다. '亻'을 고집하다가 '人'을 잊어버린 부모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人'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부모도 있다. 내가 아이와 책 놀이를 하다가 부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다. 나도 아이 두 명을 키우고 있는 부모이기에 매일 헷갈리는 일이다. 헷갈리고 실수하고 그르치면서 후회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것 역시 부모가 아이를 완성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은 며칠 전에야 깨달았다. 한자에는 왼쪽을 나타내는 左도 '돕다'는 의미이며, 오른쪽을 나타내는 右도 돕다는 의미이다. 부모는 아이의 왼쪽에서 도와주기에 佐(좌)하는 사람이고, 오른쪽에서 도와주기에 佑(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잠시 물러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에 '何'(어찌 하)하는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글자 중에서 '何'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자의 말을 덧붙인다. 


"어쩌면 좋지(如之何) 어쩌면 좋지(如之何) 하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 사람을 도저히 어찌 해야 할지 끝내 알지 못하겠다."(논어 위령공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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