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1] 육아서, 육아전문가를 대하는 자세


부모님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책 놀이를 할 때 참으로 난처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처음 내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은 "무척 젊으시네요!"입니다. 그 말에는 의외의 신선함도 있지만 반신반의의 느낌도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보기나 한 거야?' 하는 의심이죠. 그래서 시작할 때 아예 나이와 아이 둘을 키운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시작합니다. 부모님들께 신뢰의 시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책을 펴내고 강의를 자주 다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이름 옆에 ‘책 놀이 전문가’, ‘육아 전문가’ 등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의심’의 시선이 ‘의존’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드디어 강적을 만난 것이죠. 나는 참 난감합니다. 

내 아이와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어떤 책을 읽히는지, 독서 목록을 추천해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자신이 구매하려고 하는 책이나 프로그램이 있는데 괜찮은지 여쭤봅니다. 스스로한테 물어야 할 질문을 받을 때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난감한데, 원칙적으로 답하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되돌아섭니다. 이런 경우를 계속 경험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질문은 답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동양철학을 ‘나를 향하는 마음공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양철학은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 되돌아오는 여행입니다. 동양학을 만들어낸 철학자들이 던진 메시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자신감 때문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집안의 큰 어른인 까닭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다른 사람이 책임을 가져가면 힘의 흐름이 그 사람에게 갑니다. 가장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정치지도자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예외 없이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정치를 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권력공백'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자로가 공부한 방식을 보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동양철학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 <논어> 5-13

대구의 어머니들과 강의 겸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몇 분의 어머니 중에서 유독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칭찬 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이야기할 때 그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다른 어머니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 분의 생각과 육아 철학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육아서나 육아 프로그램을 보거나, 육아 강의를 들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참조할 뿐이에요. 나의 아이, 나의 가족이니까요.”라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부모님들께 듣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이었거든요. 

내가 의존적인 부모님들의 태도를 불편해 하는 까닭은 그 결과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에 대해서 부모님이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면 육아시장과 사교육 시장에서는 전문성을 상품으로 만들어 부모님들에게 영업을 합니다. 부모님의 불안한 마음을 만져주는 영업 전략은 대개 성공합니다. 문제는 그 집의 아이입니다. 원치 않는 책을 봐야 하고, 원치 않는 교육을 받아야 하거든요. 마치 주권 잃은 국가의 서러운 국민처럼, 부모가 육아 전문가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식민지에 사는 백성처럼 안타까운 신세가 됩니다. 사교육계에 있으면서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육아시장이든 사교육시장이든 현란한 '공포 마케팅'을 동원해서 먼저 그 가족의 기를 꺾어서 의존하게 만들려고 힘을 기울이는 마당에, 부모가 먼저 의존을 한다면 무척 반가운 일이죠. 하지만 의존을 하지 않는 부모가 되려면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고,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고, 아이가 즐겨 읽는 책을 자주 읽으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선택과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의존을 하는 부모님들은 대개 쉬운 선택을 합니다. 동양철학이나 인문학을 자주 접하면서 ‘나’를 들여다보면 당연히 의존할 일이 없어지지만, 육아서에 의존하면 의존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이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골치가 아픕니다. 다만 여기서는 의존하고 쉬운 선택을 할수록 아이가 불안정해지고 위태로워진다는 점만을 경고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동양철학은 ‘나의 행위’에 일종의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선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러니까 동양철학을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의 사소한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산을 쌓는 것에 비유하면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이루지 못하고 그쳤더라도 나는 그만둔 것이다. 땅을 고르는 것에 비유하면 비록 한 삼태기를 덮고 나아갔더라도 나는 나아간 것이다.“
- <논어> 9-18

아이를 잘못 키워도 부모님의 책임이며,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도 부모님의 책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육아 전문가와 아동 심리학자, 그리고 사교육 전문가가 찾아와도 아이에 대해서 부모만큼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부모님들이 자신감을 갖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좋은 육아서 고르는 방법과 좋은 육아 전문가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할까 합니다. ‘어머니께서 잘 모르셔서 그러는 모양인데.’라는 어투를 사용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전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어머니가 잘 모른다면 알 때까지 이해를 시켜줘야지 모르니까 자기의 말을 따르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양철학에서 교육과 토론의 대명사로 평가 받는 공자와 순임금의 방식을 보면 좋은 교육자란 어떤 모습인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구나. 순임금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백성들이 하는 말을 세심히 살피기 좋아하시되, 나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드높이되 그 양 끝을 붙잡으시되 그 중에 중심에 합치되는 것을 백성들께 베푸시니 이것이 바로 순임금인 까닭이구나."
- <중용> 6장

공자가 말했다. 
“나는 유식한가? 나는 무지하다. 다만 시골 사람이 나에게 물으면 허심탄회하게 나는 상하·장단의 양면을 인용하여 성의를 다할 뿐이다.”
- <논어> 9-7

그 다음은 ‘불안 마케팅’, ‘공포 마케팅’입니다. 어떤 책을 보거나 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이 시켜서 구매한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구매를 해도 불안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육아서를 읽을 때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해진다면 덮으셔도 됩니다. 육아 강의를 듣거나 학원 상담을 받았을 때 불안함이 강해진다면 신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의도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편안하게 머무르며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며 요행을 바란다. 공자가 말했다.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같으니, (활을 쏘아) 정곡에 닿지 않으면 돌아와서 자신의 자세를 돌이켜보며 찾는다."
- <중용> 14장

조급해 하는 마음은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공자와 맹자가 미련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걸까요? 고위직 공무원이 되어서 자신의 원하는 정책을 맘껏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요? 사실 동양철학을 읽으면서 나도 이 점이 궁금했습니다. 맹자의 제자 역시 스승의 자세가 답답했나 봅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니다. 

진대(陳代)가 말했다.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도량이 협소한 것 같습니다. 이제 이들을 한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고, 작게는 패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에는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 <맹자> 6-1장

<논어>나 <맹자> 등 동양철학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행동이 무척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뜻을 굽히면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한심하게 생각할까? 공자의 제자 자로도 공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백성도 있고 귀족도 있고 토지신도 있고 곡식신도 있는데, 어찌 반드시 독서를 해야만 배웠다고 하십니까?”라는 말로 스승의 ‘유연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공자는 아예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거지만 사랑을 채워준 만큼 아이들은 자라고, 사랑이 왜곡되거나 편향되지 않고 제대로 전달되는 만큼 아이들이 발전합니다. 인풋(input) 아웃풋(output)의 관계가 명확합니다. 그 사이에 요행은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부모님들은 보다 쉬운 방법, 요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행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사람들과 같죠. 이런 경우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반문을 해야 마땅하죠. 맹자는 아이에게 보탬이 된다는 막연한 기대나, 사사로운 욕심으로 요행을 바라는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결국 뜻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익을 가지고 따진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곧게 하여 이익이 된다면, 역시 하겠는가?
- <맹자> 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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