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0] 소중한 내 아이에게 함부로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라


“학교에 독서치료 봉사를 나가고 있는데 한 학생이 ADHD(주의력 결핍/과잉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증세를 보였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우리 애가 왜 ADHD냐며 한사코 프로그램을 거부하더라고요. 빤히 증세가 보이는데 왜 그렇게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님 강의를 다니다 보면 강호의 고수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독서치료하시는 분을 만나기도 하고, 책 놀이를 하시는 분, 성인 독서 강좌를 강의하시는 분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직업을 내려 놓으면 다들 아이를 키우는 부모죠. 무료로 독서치료 봉사를 하시는 분이 들려주시는 말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주의력 결핍 장애에 걸린 게 맞는지 하는 의심에서부터 그 아이의 부모님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신문에서 ‘아이들의 스마트폰 중독’ 현상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설령 그런 징후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언어로 규정짓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자 증자의 집 이웃사람이 증자 어머니에게 "증자가 사람을 죽였대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다른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불안해했고, 또 다른 사람이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짜던 베틀을 던지고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도량이 넓고 지혜로운 사람도 규정 짓는 말을 여러 번 들으면 진짜가 됩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엄연히 있는데도 우리들은 이름 짓고 규정 짓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나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병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은 스물 한 살 때입니다. 그 때 ‘환자’가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비로소 환자가 되었습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나는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환자복이 제게 주는 중압감이 상당했습니다. 이름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데, 함부로 부르니 위험합니다. 부모님들이나 매체에서 아이들에 대해서 심리학적 용어를 구사할 때 보게 되는 심리를 생각해봤습니다. ADHD, 조울증, 분리불안 등 심리학 용어가 우리 문화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지만, 마치 말을 처음 배운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에 자기가 배운 단어를 다 들이대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나의 세 살 민서는 '친구'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호랑이와 고양이가 닮았으니까 '친구'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이와 다른 점은 마치 사실인 양 착각하며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드모스 왕 이야기는 언어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상징합니다. 카드모스는 페니키아 알파벳을 그리스에 최초로 들여온 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카드모스 신화에서는 알파벳을 '용의 이빨'로 묘사됩니다. 미디어 전문가 마셜 매클루언은 카드모스 신화를 분석하면서 언어의 폭력성을 통찰했습니다.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화(카드모스 왕과 알파벳)도 오랜 과정을 한 순간 번뜩이는 통찰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알파벳이란, 권력과 권위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군사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의미했다... 보다 배우기 쉬운 알파벳과 가볍고 값싸며 들고 다니기 편리한 파피루스의 등장으로 인해 권력은 승려 계급에서 군인 계급으로 넘어갔다. 도시국가들의 몰락과 제국 및 군인 관료층의 발흥 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카드모스와 용의 이빨에 관한 신화에 함축되어 있다.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169쪽

서양의 언어가 맹수의 이빨처럼 덮썩 무는 특성이 있는 반면, 동양의 언어는 비유와 은유로 에둘러 표현합니다. 정확성보다는 은은히 의미를 풍기고 생각할 시간을 위한 '틈'을 잊지 않습니다. 예전에 서당에 다닐 때 훈장님이 들려주신 조선자 생각이 납니다. 어느 할머니와 딸이 한복집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운 데다 공부까지 많이 해서 제법 규모 있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할머니의 한복점을 많이 찾았고, 딸의 한복점은 장사가 잘 안 되었습니다. 딸이 의아하게 생각해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손가락 마디만 한 조선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자는 눈금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옷을 지으러 오는 사람에 따라서 때로는 길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짧게 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자에는 ‘틈’이 있었고, ‘틈’ 속에는 할머니의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까지 딸에게 전수해 줄 수는 없었겠죠. 정확한 치수를 재며 한복을 만든 딸의 제품을 입은 사람들은 왠지 몸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할머니의 한복점을 찾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바퀴 고치는 노인의 이야기에서도 알려줄 수 없는 모호한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신이 하는 일로 본다면 바퀴를 깎는데 느슨하게 하면 헐거워 견고하지 못하고 단단히 조이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얻어지고 마음으로 감응할 수 있을 뿐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그런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도 신의 아들놈에게 가르쳐줄 수 없고 신의 아들 역시 신에게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칠십 년을 일하며 늙었으나 아직도 수레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 <장자> 13-11

중국에서 예부터 내려오던 말 중에서 ‘자[尺]’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에도 긴 데가 있다’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나라의 충신(忠臣) 굴원(屈原)이 참소를 당해서 점을 쳤을 때 나온 점괘에 이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나 장단점이 있다는 뜻이니 규정짓지 말라는 경고를 합니다. 이름 부르는 것을 무서워할 줄 아는 동양의 오랜 문화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이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이 편협한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덮어씌운 언어라는 ‘딱지’는 아이들을 억누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노자와 장자는 이름을 부를수록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파멸을 재촉하는 일이라고 작정해서 경고합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는 노자와 장자의 오묘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도를 말로 하면 말로 된 도가 도 그 자체는 아니다.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곧 이름의 주인은 아니다.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 땅이 비롯되고 이름 있는 것에서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언제나 보고자 하는 마음 없이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껍데기 현상을 본다.
- <도덕경> 1장

무시(無始)가 말했다. 
“도는 귀로 들을 수 없다. 들었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보았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입으로 말할 수 없다. 말했다면 도가 아니다.“
- <장자> 22-14

지금부터 이름을 붙이는 질곡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생각해볼까 합니다. 내가 쓰는 방법은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붙였던 이름을 거둬들이면 오히려 가려졌던 눈이 뜨이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학습만화에 중독된 아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 문의를 하십니다. 나는 ‘중독’이라는 말을 먼저 제거합니다. 학습만화를 다른 장르에 비해서 유독 즐기는 것일 뿐 ‘중독’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학습만화’를 건드립니다. 아이가 학습만화에 몰입하는 이유는 학습만화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학습만화가 원인이라면 집에서 학습만화를 모두 없애버리면 원인이 해결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학습만화를 다 치웠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개중에서는 학습만화를 치웠더니 아이가 학습만화를 보지 않고 좀 나아졌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나 스스로가 어렸을 적에 만화책에 몰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다만 부모의 눈을 피해 학습만화를 볼 뿐입니다. ‘학습만화 중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부모님은 문제를 단순화해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육아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육아를 이렇게 힘들어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몇 마디 말로 원인을 찾고 정리하려는 습관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의 학습만화 문제 때문에 애를 태우는 부모님들의 질문을 받으면 나는 동요를 불러드립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 일부)

여기까지 멈춘 후 다음 구절이 무엇인지 부모님께 여쭤봅니다. 이때 부모님들의 표정과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마치 준비 안 된 질문을 받을 때의 당황스러운 표정! 나는 노래를 이어서 부릅니다.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 일부)

참으로 감동적인 모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한 어머니는 가끔 딸과 함께 호텔 예약을 한다고 합니다. 호텔에 갈 때는 커다란 트렁크에 만화책을 가득 담고 갑니다. 2박3일 동안 맛난 음식 먹으면서 실컷 만화책을 보지요. 얼마 전 그 어머니의 대학생 따님을 만났는데 자신의 생각과 비전이 뚜렷했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엄마와 호텔에서 만화책 보던 그 때가 참 즐거웠다고 회상하더군요. 나도 그 모습을 상상하니 행복했습니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딸의 욕구를 흠뻑 채워준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만화책'과 '엄마', '자유'가 모두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이 혼자 호텔방에서 만화책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감옥'입니다. 엄마가 함께 놀면서 만화책을 보았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아이가 무엇인가 집착한다는 것은 욕구불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부분이 불만인지는 아이에 따라 다르겠지요. 학습만화에 몰두하는 아이는, 학습만화를 볼 때 부모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을 때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는 무척 큽니다. 학습만화를 볼 때마다 그런 껄끄러운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아예 채워주라고 합니다. 아이와 학습만화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는 에너지를 조금 할애해서 아이와 함께 학습만화를 재밌게 보거나, 아예 서점에 가서 학습만화를 사서 아이와 함께 보는 것을 권합니다. 좀더 나아간다면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재밌게 읽고 나서 좋았던 이유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아이 역시 학습만화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이야기하게 합니다. 아이는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긍정해주는 것을 느끼고 불만이 해소됩니다. 이제 학습만화는 다른 장르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아이가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 특히 어떤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학습만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없던 긴장과 욕구불만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심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조언도 분명히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검증입니다. 부모가 주변의 우려와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검증을 해보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길에서 들은 말을 길에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 <논어> 17-14

학습만화 중독, 스마트폰 중독, ADHD 등 우리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보이거나 주변에서 보인다고 하거나, 심지어 소아정신과 의사가 그렇게 진단한다고 하더라도 규정을 짓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틀림없는 이름은 바로 ‘내 아이’, ‘내 가족’입니다. 소중한 내 아이에게 함부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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