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2] 아빠들을 위한 변명


한때 시민운동에 투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언론운동을 하는 동안 아내가 고생을 했고, 첫째 민준이가 태어났습니다. 사회운동을 통해서 현실을 바꾸고 싶은 열정이 뜨거웠지만 가정에서는 차가운 가장이었습니다. 그 즈음 아는 동생과 술 한잔 하면서 들었던 말이 내 인생의 중요한 반전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치국평천하를 하세요. 저는 수신제가를 할게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뒤통수를 뭔가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래성 위에 집을 짓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동생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대학>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구절인데, 광고에도 소개가 돼 많은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나와 너를 같이 보고, 나라와 가족을 같은 의미로 보는 습관이 있다고 했는데, 이 구절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학>은 각각의 개념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서술돼 있습니다.

 

사물에 다가가야만 지혜가 지극해질 수 있고, 지혜가 지극해야 뜻이 정성될 수 있고, 뜻이 정성되어야만 마음을 바르게 다잡을 수 있고, 마음을 바르게 다잡아야만 몸을 닦을 수 있고, 몸을 닦은 후에야만 일가를 가지런히 할 수 있고, 일가를 가지런히 한 후에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린 후에야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 <대학> 경문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하면서 '너=나', '가정=국가'로 보는 동양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와 내가 같다는 동양의 주장과 너와 내가 같지 않다는 서양의 주장을 결합해야만 성숙한 시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는 것은 부모 자신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지혜를 모두 흡수해야 합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파묻힌 지 16년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왜 이걸 공부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보니 내가 왜 인문학을 이렇게 공부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바로 아이와 가족을 위해서 써야 할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슬프다! 영토를 가진 자들은 알지 못한다. 영토를 가진 것은 민생의 근본이 되는 큰 물건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큰 물건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물건으로 보지 않으므로 능히 물건을 물건답게 할 수 있다. 
- <장자> 11-7

 

위 구절에서 '영토' 대신 '아이'로 바꾸고, '민생' 대신 '인생'으로 바꾸면 가족의 이야기가 됩니다.

 

슬프다! 아이를 가진 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이를 가진 것은 인생의 근본이 되는 큰 물건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큰 물건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물건으로 보지 않으므로 능히 물건을 물건답게 할 수 있다. 
- <장자> 11-7을 '가족'에 맞게 각색

 

가족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인류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아이'이며, 아이의 존재 근거는 바로 '엄마'와 '아빠'입니다. 육아의 언어는 '인식의 언어'를 넘어 '존재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아이를 낳고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육아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아내는 엄마가 되고, 나는 '아빠'가 됩니다. 그리고 나의 누나는 고모가 되고, 아내의 언니는 '이모'가 됩니다.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됩니다. 이 이름들은 모두 주어가 생략된 표현입니다. '아이'가 주어입니다. 아이의 엄마, 아이의 아빠, 아이의 할머니, 아이의 고모, 아이의 이모입니다. 결혼을 하는 순간 아내와 남편의 인연을 맺는데, 이 역시 주어가 생략된 언어입니다. 바로 '남편의 아내'이며, '아내의 남편'입니다. 이미 가족 구성원이라는 '존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기를 준비를 끝낸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독서전문가'로서 부모님들을 만났습니다. 인천의 공공도서관에서 '행복한 독서클럽'이라는 평생학습강좌를 두 학기 동안 맡았습니다. 부모님들과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고,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을 알려주는 강좌였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듣는 부모님들은 책 이야기보다 '아이와 다툰 이야기', '배우자와의 갈등'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그것이 책을 읽는 바른 태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부모님들과 아이들을 초대해 '책 놀이'를 본격적으로 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점점 '부부갈등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육아' 자체가 상당히 망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친한 엄마 아빠'라는 사실입니다.

 

아빠로서 주위의 가족을 바라보면 '아빠'가 눈에 걸립니다. 대기업 다니는 아빠나 중소기업 다니는 아빠, 자영업을 하시는 아빠, 심지어 시민활동을 하는 아빠 할 것 없이 가족들과 편안히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구조적 현실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빠 없는 하늘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평일에 아내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요? 평일 저녁에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아빠가 얼마나 될까요? 아이는 한동안 아빠를 그리워하다가 마음속에서 아빠의 자리를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이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 아빠의 존재감은 점점 줄어들어서 어느덧 '약자'가 되어 있습니다. 집안일과 육아일에 대한 부담이 대부분 엄마에게 쏠려 있는 집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친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아내와도 소원해지면 아빠의 존재감은 더욱 작아집니다. 아빠도 스스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빠는 여기서 또 한 가지 패착을 하기 쉽습니다. 돈, 진급, 명예 등을 통해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예컨대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공부를 해야 하는 회사가 많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가족과 보내는 주말 중에 하루를 희생합니다. 가족과의 끈은 더욱 얇아집니다. 만약 이 순간 아내와 남편이 친하다면 남편은 가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고, 가족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아빠의 판단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와도 친하지 않고 아내와도 친하지 않은 고립된 상황에서 아빠의 선택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남해의 황제 숙과 북해의 황제 홀이 중앙의 황제 혼돈과 어느 날 중앙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상의한 끝에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기로 하였다. 사람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은 유독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갔다. 그러나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 <장자> 7-5

 

만약 숙과 홀이 혼돈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 물어보기만 했더라면 혼돈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빠가 가족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한번 물어본다면 아빠와 가족이 서로 불행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가족에게 두 번 죄를 졌습니다. 한 번은 세상을 바꾼다고 시민운동을 하면서 가족에게 소홀했습니다. 가족은 외로웠죠. 그리고 한 번은 가족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가족에게 소홀했습니다. 가족은 또다시 외로웠죠. 그것은 가족이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고, 가족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가족을 만나면서 나는 가족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선의가 충만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사랑이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내와 남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가족 간에 감정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고,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동생과의 술자리에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치국평천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수신제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넨 순간 내 인생의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가족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아빠들의 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이 가족이 원하는 것인지 한번 물어보세요. 어쩌면 인생을 달라지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두 번이나 외롭게 만든 나 같은 가장은 못난 가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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