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9] 진심이 진리보다 앞선다

"아버지가 없는 집이나 싱글 맘들은 어떤 해결책이 있나요?"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부모님들과 육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어떤 엄마가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질문을 받는 순간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제가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군대 시절 일반 사병의 인사를 담당했었는데, 사단에 신병이 오면 작성하게 되는 신상명세서에는 편부모 가정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사랑으로 표현하면 세 갈래의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갈래는 부모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기애(自己愛)입니다. 동양에서는 자기애와 이기(利己)를 구분합니다. 두 번째는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는 부부애(夫婦愛)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부모가 아이에게 향하는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끊어지면 아이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은 미혼모 가정이 겪게 될 시련을 경고했습니다. 

10대 임신부들은 학교를 중퇴하고 미혼모로 살아가면서 가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고, 그 자녀들은 아동 학대의 희생양이 되거나 위탁 보호 기관에 맡겨지고, 유치원 입학 전 평균 이하의 일반 상식과 수학, 읽기 능력을 보이고,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10대나 청년 시절에 구치소에 수감될 가능성이 전부 높게 나타난다. 그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우나 기타 관련 요인들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 티모시 윌슨, <스토리>(웅진지식하우스), 189쪽
※ 설문 결과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가 2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Youth Risk Behavior Survey'의 자료. 임신 관련 통계 : Stein & St. George (2009) ; Terry-Humen, Manlove, & Moore(2005) ; "Teen Pregnancy" (2008)

10대 미혼모라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시련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사회구조를 이겨낼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합니다. 항간에 떠돌던 말 중에서,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말이 이제는 '무병단명(無病單命) 다병장수(多病長壽)'로 바뀐 것처럼 불리한 여건이 서로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잔병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몸을 돌아보니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축구경기는 11명이 하지만, 한 사람이 퇴장을 당해서 10명이 싸울 때는 어떤가요? 그 팀이 당장 골을 먹고 질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버팁니다. 모든 선수들이 자기 팀의 절박한 상황을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 없는 아이와 아빠 없는 아이는 세 가닥의 사랑 중에서 한 가닥이 끊어졌지만, 핵심은 가닥이 아니라 '사랑'이지요. 촛불이 세 개면 무척 밝지만 두 개 또는 한 개 있어도 밝을 수 있죠. '빛'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장자는 도(道)가 펼쳐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도를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안타까워합니다. "삶은 사는 것이고, 생활은 견디는 것이다"는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가슴을 울리는 장자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비천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물이다. 비루하지만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민중이다. 축소해야 하지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정사다. 거칠지만 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법이다. 소원해지지만 본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義)이다. 친족을 편해하지만 넓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仁)이다. 절제로 일을 꾸미지만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예(禮)다. 중화(中和)일 뿐이지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도이다. 신령스럽지만 유위(有爲)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천(天)(자연)이다.
- <장자> 11-8

나는 어릴 적에 다른 친구들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들은 방황하시고, 어머니들은 고생하셨죠. 원양어선을 타고 며칠 혹은 몇 달씩 집에 머무르지 않지만 집에 함께 있을 때는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어릴 적에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아버지는 사랑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 하셨고, 나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어마어마한 사랑이었죠. 이것을 다 커서야 알았으니 나는 아버지에게 불효자입니다. 나의 아버지처럼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사랑하려는 것은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서(四書) 중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중용(中庸)>의 핵심 개념은 '중용'이 아니라 '성(誠)'입니다. 우리말로 '정성'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중용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誠之者)'이 <중용>이 꿈꾸는 인간상입니다. 

정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 정성이라는 것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중도(中道)에 맞고 힘써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조용히 도에 적중하니 이를 갖춘 사람은 성인(聖人)이고,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선(善)을 잘 가려내어 그것을 굳게 잡는 것이다. 그것을 널리 배우고, 그것을 따져가며 깊이 묻고,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밝게 가려내며, 그것을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 중용, 18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학 연구로 회자되는 카우아이 섬 종단 연구 이야기를 보면 <중용>이 말한 '성(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 본토의 소아과 의사,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1955년 카우아이 섬에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10여년을 조사한 끝에 연구의 첫 번째 결과물은 1971년에 <카우아이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이 아이들이 18세가 될 때까지의 연구결과는 1977년에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카우아이 섬 연구의 자료 분석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전체 연구 대상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의 아이들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고위험군'이라 불리는데,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학교 생활 부적응과 학습장애를 보였고 집과 사회, 학교에서 갖가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예컨대 상당수가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소년원에 들락거리거나 여러 차례 범죄 기록을 갖고 있거나, 정신질환을 앓거나 미혼모가 되어 있었죠. 그런데 에미 워너 연구원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72명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72명은 마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에미 워너는 오랜 연구 끝에 72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 김주환, <회복탄력성>, 54쪽

삶의 고된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 되는 이러한 속성을 에미 워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온전히 자라나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오로지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의 일은 그만큼 무겁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의 아빠, 아빠 없는 아이의 엄마는 더욱 무겁습니다. 무거운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힘만큼은 온전한 부모님보다 편부모가 가질 수 있는 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부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들은 한목소리로 '전전긍긍'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자신의 육아 방법이 틀리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항상 하신다는 어머니, 아이에게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한다는 어머니. 사랑에는 답이 없으므로 진리보다는 진심이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그 모습을 그대로 바라봅니다. 엄마나 아빠의 판단이 틀리다고 생각하거나 섭섭하다고 생각해도 부모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아이는 마음을 열거든요. 답을 찾으려고 멀리서 헤매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되돌아보는 것이 아이를 대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는 임종을 앞두고 이 마음을 잘 정리했습니다. 

증자가 병이 나서 죽음이 가까워지자,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 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듯 한다.'고 하였다. 이제부터 내 잘못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다. 제자들아!"
- <논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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