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5. 질문을 가지고 노는 육아법

태초에 질문이 있으라! 질문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입니다. 인문학을 한마디로 말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질문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 다음에 말을 듣습니다. 어떤 질문을 받는 순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표정은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의외의 질문을 받았거나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긴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짧은 시간에 표정이 하는 말을 들으면 사실 대답은 표정의 확인일 뿐이죠. 나는 다름 사람에게도 자주 질문을 던지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지면 ‘즉시’ 효과를 발휘하니까 평소에 좋은 질문을 만드는 연습을 합니다. 이 좋은 걸 육아에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손해일까요? 때로는 질문은 긴 잠을 깨우는 맑은 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맹자가 제나라에 머무를 때 제나라는 새로 종을 만들었는데, 종에 소의 피를 뿌리는 흔종(釁鍾) 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나라 선왕은 관리들이 희생양 소를 이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소가 부르르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여워 양으로 바꿨지만, 백성들은 왕이 소 한 마리를 아까워해서 구차하게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흉을 봤습니다. 제선왕은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한 지경이었습니다. 맹자가 한마디 질문을 던지며 왕의 마음을 풀어 주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것을 이상하다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만약 그놈이 죄 없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와 양을 어째서 가리셨습니까?
- 맹자1-7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제선왕은 소가 끌려가는 것만 보았을 뿐 양이 끌려가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를 양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제선왕은 자기도 모르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랍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냈는데, 이 방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 부릅니다. 맹자도 공자도 산파술의 대가였습니다. 공자가 어떻게 제자의 물음에서 질문을 뽑아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남쪽 지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쪽 지역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 중용 10장

질문을 하는 순간 질문을 받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 역시 마음이 읽힙니다. 자로는 평소에 강인한 인물이어서 자기의 ‘전공’(?) 분야인 ‘강함’에 대해서 스승에게 질문을 하고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공자는 제자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혹시 너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질문에 이어서 공자는 ‘강함’이라고 해도 다 같은 ‘강함’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다고 설파합니다. 즉, 너그럽고 유연하게 가르쳐 주고 무도한 것에 대해 섣불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쪽 지역의 강함이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강함’입니다. 하지만 힘이 세고 싸움을 잘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함은 ‘강한 자의 강함’이라고 구분합니다. 
아이들이 밥을 안 먹을 때, 전화기를 달라고 투정을 부릴 때, 엄마 아빠를 때릴 때, 침을 뱉을 때, 잠옷을 입고 유치원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릴 때 부모는 화딱지가 납니다. 한 대 쥐어박아주거나 큰소리로 혼내면 주눅이 들어서 행동을 멈추지만, 다음에는 더 심하게 행동합니다. 아이와 군비(軍費)경쟁을 계속 해야만 할까요? 
아이가 ‘문제의 행동’을 하면 머릿속에 역할극이나 소꿉장난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예를 들어 병원놀이를 할 때 아이는 한 번은 의사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환자가 되기도 합니다.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바꿉니다. 의사가 된 날은 청진기를 배에 들이대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고, 간호사가 된 날은 의사의 말에 따라 주사를 놓는 일을 하고, 환자가 된 날은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시늉을 합니다. 병원놀이처럼 실제 세계의 역할도 계속 달라집니다. 다만 지금은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금 어른스러운 역할놀이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미나 놀이를 생각해 봅시다. 세미나를 할 때 발제자가 있고 토론자가 있는데, 아이들과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행동으로서 발제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하거나, 두 친구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난감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중재하는 게 좋을까요?”

이렇게 질문으로 해석하면 아이들이 싸우는 것이 단순히 투정으로만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중재하는 입장, 아이들은 다투는 입장이 되지만 나중에는 아이들이 중재하는 입장으로 바뀔 여지는 충분하죠. 가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학교나 사회에서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때로는 저런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결국 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기원은 ‘가정’에 있는 셈입니다. 
둘째 민서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민서가 차의 앞자리에 앉았는데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서 벨트를 메라고 말을 했습니다. 

“민서야, 안전띠 매야지!”

민서는 “안전띠 아니거든, 안전벨트거든!”이라고 소리칩니다. 이것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안전띠와 안전벨트의 연관관계가 무엇인가?”

그제서야 나는 민서에게 “민서야, 안전띠와 안전벨트는 같은 말이야.”라고 말해줍니다. 민서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맵니다. 사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부모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질문’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죠. 때문에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상황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가능한데, 번역을 하면 부모는 어떻게 대응할지 감을 잡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한번 번역해보기 시작하면 점점 쉬워질 테니까요. 
동양의 질문법 중에서 가장 감명을 줬던 것은 이른바 '나 질문법‘이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보면 거기서 ’나‘를 발견해내는 방법입니다. 모든 현상에는 ’나‘가 반영돼 있는데, 감춰져 있다 보니 ’나‘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 문제에서 ’나‘가 사라질 때 문제의 원인도 사라지고, 해결의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그 현상에 ’나‘가 없었다면, 왜 그 현상이 내 옆에 있는 것이고, 왜 나에게 온 것일까요? 바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춰진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 질문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 질문법‘의 응용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모님 강연을 하면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낮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혼자서 읽는 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라면 잘 못 하는데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학습만화에만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니들은 아이의 부정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전문가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러면 아이의 좋은 점은 뭔가요?” 라고 물어보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질문법‘은 부모님이 생각하는 의문을 더 나은 질문으로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부모님이 아이에 대해서 떠오르는 질문에 ‘나’를 담아 보면 됩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약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은 “나의 어떤 태도가 아이의 자존감을 약하게 만들었을까요?”로 바꿔서 질문을 해결하려고 하면 훨씬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책을 항상 읽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 역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아이가 스스로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까요?”로 바꿔보면 문제가 분명히 보입니다. 이게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애초에 어머니들이 던졌던 질문에는 ‘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존감이 약한 이유가 부모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질문법’은 아이가 잘못한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부모와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왜 부모에게 책을 읽어달라고만 하고 스스로 찾아서 읽을 줄 모를까요? 스스로 찾아서 읽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결국 원인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죠. 맹자는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좇아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잘 썼는데, 어찌 보면 집요해 보이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바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가 평륙에 가서, 그 대부에게 말했다. "그대의 창을 가진 병사가 하루에 세 차례나 대오를 이탈하였다면, 이를 없애버리지 않겠습니까?" 
공거심(대부) : "세 차례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맹자 : "그렇다면 그대가 대오를 이탈함 역시 많을 것이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그대의 백성 중에 늙고 허약한 사람의 시체가 개천이나 산골짜기에 굴러다니고, 젊은이는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간 사람이 거의 천 명이나 될 것입니다."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맹자 : 이제 다른 사람의 소와 양을 받아서 그를 대신하여 그것을 기르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대신하여 목장과 풀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목장과 풀밭을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 주인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두커니 서서 그것이 죽는 것을 빤히 보고 있겠습니까?"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의 잘못입니다."
- 맹자4-4

맹자는 제나라의 왕에게도 이 사례를 이야기하고 청문을 한 끝에 왕에게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오.”라는 대답을 들어냈습니다. 연애를 할 때는 상대방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고 알고 싶습니다. 모든 게 의문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상대방이 궁금하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궁금함은 사랑입니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와 어떤 일을 경험할 때 궁금한 부모와 궁금하지 않은 부모에 따라서 반응이 전혀 달라집니다. 궁금함은 사랑의 시작이고, 궁금하지 않음은 사랑의 끝입니다.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번역해서 스스로에게도 던져 보고, 아이와 물음표(?)를 서로 나누면서 대화를 계속 하면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애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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