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6]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3)
동양철학과 육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답은 없고, 다만 정성이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부모님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하는 말은 ‘제발 육아서 읽고 감정이입하지 말라’입니다. 육아서는 아동심리학 등 심리학 연구 결과에 근거하는데, 심리학 연구는 인간의 일반적인 평균값을 말합니다. 평균값이 뭔가요? 어떤 반의 수학 성적 평균이 70점이지만 한 친구는 0점을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친구는 100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특별하고 특수합니다. 육아서에 감정이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죠? 동양철학을 쓴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어서 남자의 시선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여자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이 가끔 있습니다.
<강고>에 이르기를 '갓난아기를 끌어안은 듯 한다'고 하였으니 마음으로 정성껏 추구한다면 비록 실정에 딱 드러맞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이니 자식 기르는 것을 배운 후에 시집가는 여자는 없다.
ㅡ 대학9장
※ 강고(康誥)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篇名)
가끔 일본에서 조카가 머물렀다가 갑니다. 조카는 우리 첫째 민준이보다 한 살이 많은 형입니다. 조카가 네 살이던 여름이었습니다. 덥기도 덥고, 조카는 아토피까지 있어서 엄마에게 짜증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새벽 3시 정도만 되면 자다가 일어나서 엄마에게 침대에서 내려가라고 하고, 텔레비전에서 뽀로로 틀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갑자기 배고프다고 밥상을 차려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같이 황당한 투정이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가라 울어댔습니다. 조카의 엄마는 밤마다 아이와 전쟁을 치르는 통에 해쓱해졌습니다. 나도 새벽까지 일을 하는 올빼미족이라 조카 모자의 모습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처음에는 성가셨지만 나중에는 안타깝고 측은했습니다. 하루는 울고 있는 조카를 안고 창가로 갔습니다. ‘하루라도 편안하게 잠을 자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고 조카를 꼭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애가 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름날 밤이었지만 방충망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살갗에 닿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조카를 봤더니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옆에 있는 부채로 살살 흔들어 주면서 달랬더니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이날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성(誠)’이라는 글자를 무척 강조합니다. <중용>에는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정성이 없다면 세상에 어떤 것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성[誠]은 하늘의 도요, 정성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니, 원래 성[誠]은 힘쓰지 않고 중심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 얻으며 조용히 중도에 합치되니 성인이요, 정성[誠]에 힘쓰는 자는 착함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
- <중용> 20장
정성은 마치 태양의 내리쬠과 같은데, 훌륭한 사람은 태양을 닮으려고 한다는 동양철학의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들인 정성을 생각해 보시면 성(誠)의 의미가 다가옵니다. 먹고싶은 것 참고, 먹기 싫은 것도 참고, 감기약도 참아가며 열 달을 버텼습니다. 그 옆에서 아빠도 전전긍긍하면서 보낸 세월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뭇 생명들이 이런 정성스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은 생명에 대해서 세심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아이의 손이 가는 모든 것에 아이의 숨결이 있습니다. 아이의 감정 역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는 게 아니고 아이의 기가 푹 죽는 것 역시 일종의 죽음으로 볼 수 있겠지요. 정성이란 것은 이런 것들에 세심히 신경 쓴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서점에서 육아서를 찾아가며 배운 것도 일종의 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천여 명의 부모님을 만나면서 참 고맙고 행복했던 것은 부모님의 마음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선의가 충만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랑과 선의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방해 때문에 아이에게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기까지 합니다. 갈 곳을 잃은 부모님의 사랑, 길이 끊어져 버린 선의를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결국 이에 대한 해답도 정성에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의 관념을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관념 속에 갇힌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배신감에 사무칩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부모는 자신의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부모와 아이는 계속 멀어집니다. 아이에게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아이의 주변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아이가 노는 공간, 걷는 길, 좋아하는 책 등 아이의 손길이 닿는 곳에 대해서 세심하게 신경 쓴다는 의미입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는 물건에 담긴 영혼 하우(hau)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증여론>은 마르셀 모스가 아메리카, 멜라네시아, 뉴질랜드의 원시인의 생활방식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증여(선물)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초라는 걸 밝힌 책입니다.
증여자가 내버린 경우에도 그 물건은 여전히 그에게 속한다. 그는 그것을 통하여, 마치 그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훔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수익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우(hau)'는 그것을 소지하는 자를 쫓아다닌다.
- 마르셀 모스, <증여론>(한길사), 68쪽
하우는 '바람'과 '영혼'을 동시에 가리키는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길을 가다가 쓸 만한 의자나 가구를 발견해서 집에 들이면 가끔 아이가 병이 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동티’가 났다고 말합니다. 민준이와 민서가 사촌형에게 옷을 물려 받았다면 옷의 주인으로부터 양도되었고, 옷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동티가 나지 않습니다. 벼룩시장에서 아이 옷가지나 장난감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내서 물건을 양도 받았고, 물건 주인의 신원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쓸 만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양도 받은 것도 아니고 물건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이 가녀린 아이가 유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부모님들에게 책놀이를 가르쳐주면 부모님들은 집에 가서 아이와 즐겁게 책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부모님이 아이가 책놀이를 거부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거든요. 몇 일 동안 고민을 하며 이유를 살펴봤지만, 뚜렷이 알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부모님이 고백했습니다.
“아이랑 함께 읽는 책은 어른이 보기에 좀 따분하잖아요. 그래서 주말에 아이 책을 옆에 놓고 소설책을 읽었는데 아이가 그 모습을 봤나 봐요. 그때부터 아이가 책놀이하는 책을 거부하더라고요.”
아이와 함께 읽는 책에 아이의 영혼이 담겨 있는지 그 부모님은 몰랐던 겁니다. 아이의 영혼은 부모님의 영혼보다 더 맑고 민감해 합니다.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에 대해서 무척 예민합니다.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다뤄주면 아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한 어머니는 아이가 학습만화에 빠지는 것이 싫어서 집에서 학습만화를 다 치워버렸습니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더욱 학습만화에 집착했습니다. 아이에게 학습만화는 생명과 같이 애착이 있는데, 엄마가 집에서 학습만화를 치워버리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잔뜩 주눅이 들고 수동적인 아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에 비하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이는 그나마 건강한 편입니다. 이렇게 정성의 세계는 무척 복잡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을 뜨는 순간 아이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