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세계에는 어른이, 비언어의 세계에는 어린이가 산다

 

주말 나른한 오후. 아빠는 소파에 드러 누워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봅니다. 옆에서 아이는 책을 봅니다. 누워서 봤다가 앉아서 봤다가 아빠와 같이 텔레비전을 봤다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습니다. 아빠는 아이의 산만한 모습이 신경 쓰입니다.

 

“OO야, 책은 바른 자세로 읽어야지!”

 

아빠가 기어코 한마디 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까요? 부모님들과 함께 특강을 해보면 “아이가 도무지 말을 안 들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말투는 잘 따라합니다. “잘 한다. 잘 해!”라는 말에 담겨 있는 조롱의 뉘앙스를 정확히 복제해서 사용합니다. 어른은 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고 어린이는 비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와 부모의 커뮤니케이션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차분히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되돌려보면서 아이가 언제 언어를 사용하는지 본다면 비언어의 존재감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는 태어나서 아무런 말을 못하고 100일 즈음 되면 옹알이를 합니다. 옹알이는 언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돌이 지나고 한참 있어야 엄마 아빠 같은 기본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고, 또 다시 한참 시간이 지나야 ‘문장’이라는 걸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비언어의 생태계에서 언어라는 생물이 태어나는 것처럼 언어와 비언어는 차원이 다른 소통 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언어에 대한 의존도가 무척 큽니다.

책은 언어로 이루어진 매체이지만, 책을 만드는 과정과 책을 향유하는 과정은 결코 언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감정이입을 하거나 두뇌 자극을 받는 일련의 작용들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책놀이책>은 책에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족과 가족이 감정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오랫동안 고민하며 썼습니다. 당연히 아이들과 만나는 책놀이 프로그램이나 부모님 특강 역시 ‘비언어’ 부분을 강조합니다.

 

한라도서관 책놀이 프로그램에서도 비언어 소통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처음으로 쓴 것은 원기옥 퍼포먼스입니다.

 

“책요정 선생님이 여러분 앞에 서니까 가슴이 쿵쾅쿵쾅하고 너무 떨리니까 여러분이 손을 들고 힘을 모아주세요. 마음속으로 떨지 마라 떨지 마라 하고 빌어 주세요.”

 

처음에는 지루해하던 아이들도 손을 번쩍 들고 원기옥 퍼포먼스를 만들어 보니 무척 흥미로워했습니다. 소원을 하나씩 생각하고 한 차례 원기옥을 더 만든 다음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몇 명의 어린이에게 물어보고 나서 두 번째 비언어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지금부터 옆의 친구들과 사랑의 포옹과 악수를 하겠습니다. 어린이들 모두 양쪽 벽으로 서주세요.“

 

책요정 선생님이 먼저 한 바퀴 돌아가며 아이들을 끌어 안았습니다. 선생님에게 불의의 일격(?)을 받은 아이들은 순간 당황해 하면서도 재밌어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징그럽다는 투로 피해가기도 했지만 서로 안아주니 기분은 좋은 것 같았습니다. 한 장난꾸러기로부터 ‘변태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별명을 얻는다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비언어 소통을 한다고 해서 억지로 하게 하면 안 됩니다.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는 서로 포옹하는 데 대해서 거부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기 싫은 친구들은 악수만 해도 돼요. 악수도 하기 싫으면 손가락으로 악수해요.”라고 한정을 해주면 원활하게 비언어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인간 행동 전문가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의 30년 연구를 집대성한 몸짓 언어 바이블 <당신은 이미 읽혔다>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어를 깨드리려면 자세를 무너뜨리라고 충고합니다. 일어서는 동작, 손을 드는 동작, 악수하는 동작, 포옹하는 동작 등을 통해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무너뜨리고 교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책으로 하는 비언어 소통 방법을 총집합한 책놀이 운동회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 양손을 들고 에너지를 모으는 원기옥 퍼포먼스는 아이들의 몸을 움직이는 방식이므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선보인 책놀이 운동회

 

첫 시간에 예고한 대로 두 번째 시간(8월 6일)에는 책놀이 운동회를 했습니다. 책놀이 운동회는 어린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주로 몸을 많이 쓰는 놀이입니다. 책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풍부하게 가지려면 ‘읽는 대상’이라는 한정된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책을 만나는 과정을 보면 책이 단순히 읽을 거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나의 다섯 살 아이 민준이의 경우 돌이 되기 전에 책은 ‘먹을 것’이었습니다. 책을 빨아먹고 씹어먹는 통에 모서리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돌이 되니 책은 ‘네모난 장난감’으로 변신했습니다. 집어 던지기도 하고 자꾸 만지작거리기도 합니다. 그때까지도 민준이는 책을 읽는다는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두 살 정도 되었을 때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엄마 아빠 무릎에 앉아서 책을 쳐다봤습니다. 마침내 ‘읽을 대상’이 된 것이죠. 책놀이 프로그램에서 만난 초등학교 학생들은 모두들 책을 읽을 줄 알지만 책놀이 운동회를 하면서 책과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놀이 목록에 포함된 것들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집안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곳은 아이들이 집안일로 놀이를 만들어서 즐깁니다. 놀이 안에 책이 들어가 있으면 책에 대한 친근함이 느껴지고 거부감이 사라집니다.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회성을 익힙니다. 대표선수를 정하는 과정에서, 플레이 중에서 선수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응원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는 과정에서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지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TV 프로그램에 한 연예인이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 생활을 소개하던 중 무척 인상적인 사례를 전해 주었습니다. 아이를 미국 유치원에 보냈는데,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열흘 내내 ‘개집을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연예인은 화가 나서 유치원에 가보니 정말 아이들이 나무와 망치를 들고 툭탁툭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원장실로 찾아가서 항의를 했더니 유치원에서 명답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목공 놀이를 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성격과 판단력 등 다양한 능력을 체크합니다. 이 분석 자료를 토대로 아이들에 대한 교육 방식이 정해집니다. 지금이라도 아이를 내보낼 수 있으니 아이를 유치원에서 뺄 건지는 부모님이 결정해 주세요.”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도 있었고 상대편의 플레이를 할 때 방해하거나 놀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때 감점을 주고 감점 이유를 말하면 아이들은 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머리의 집중력도 중요하지만 몸의 집중력도 무척 중요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이들에게는 몸의 집중력을 키워주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책놀이 운동회를 했더니 특히 남자 아이들이 신나게 놀았습니다. 앞으로 책놀이와 책의 내용을 연결해서 프로그램을 더 연구하면 남자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멀고 가까운 거리의 책 안에 동전을 던져 집어넣는 '동전농구'를 할 때 아이들이 가장 강한 집중력을 보였습니다.

 

 

책 놀이를 직접 만들어 봤어요.

 

이번 책놀이 운동회에서 가장 기대한 부분은 어린이들이 직접 책놀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만든 몇 개의 책놀이를 소개하고 아이들에게 책놀이를 만들게 하였는데, 책놀이를 만들고 친구들의 인정을 받으면 보너스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경쟁의 요소를 가미했더니 아이들의 두뇌가 반짝거렸습니다.

 

첫 번째 놀이는 탁구공 오래 튀기기입니다. 대표선수 세 명을 정해서 오래 튀기기인데, 세 명이 먼저 떨어지는 팀이 패배합니다. 두 번째 게임은 책 탁구입니다. 청팀 다섯 명 백팀 다섯 명 벽을 만들고 3세트 동안 책으로 공을 튀겨서 상대편으로 넘기는 거에요. 한 세트에 10점씩 두 세트를 먼저 이기는 팀이 승리합니다.

 

세 번째 게임은 동전 농구입니다. 동전을 던지는 선을 정해 놓고, 선에서부터 먼 곳, 중간 곳, 가까운 곳에 책을 놓고 가장 먼 곳에는 150점, 중간 먼 곳은 100점, 가장 가까운 곳은 50점을 부여합니다. 양팀이 10개의 동전을 던져서 총점을 가장 많이 획득한 팀이 승리합니다.

 

승리한 팀은 50점을 획득하고, 패배한 팀은 25점을 획득하는데, 책놀이를 만든 팀은 30점 보너스를 획득합니다. 50점 뒤지고 있는 팀이 책놀이를 만들어서 승리를 하면 80점을 얻고 패배하면 25점에 머무르므로 대역전극이 가능합니다. 어린이들의 아이디어는 기발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합니다. 특히 ‘책으로 뿅망치 게임’이 재밌었어요.

 

“뿅망치 게임과 비슷한 건데요. 책으로 상대방 머리를 때려서 다섯 명이 나와서 세 명 이상 비명을 지르면 이기는 거에요. 책으로 사정 없이 때리는 게임.(이한결)”

 

완력이 좋은 남자 아이들은 하자고 막 우기고 여자 아이들은 거수를 거부함으로써 뿅망치 놀이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여자 아이들 자리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책 멀리 던지기 놀이도 재밌었지만 인정은 못 받았습니다. 근사한 놀이도 많았습니다.

 

“한 사람이 책 한 권씩 갖고 있다가 가위바위보 지면 책을 쌓아놓는 거에요. 책이 다 떨이지면 지는 거에요. 책을 계속 쌓아서 책이 없으면 지는 거에요.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은 책을 올려놓고 하는 거에요.”(문서현)

 

문서현 어린이의 설명에 문기현 어린이가 책으로 가위바위보 하는 방법을 알려줘서 ‘문서현-윤기현 놀이’가 만들어졌습니다. 책을 펼쳐가지고 사람 수가 많이 나온 데가 이기는 놀이도 재미 있었습니다. 놀이를 제안한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고민준-김민재 놀이라고 지었습니다.

 

아이들이 책놀이를 직접 짜본다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됩니다. 책놀이를 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동작들을 알 수 있고, 책의 특징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보강해서 조금 더 완성도 있는 놀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책놀이 각본대로 하는 것도 재밌지만, 직접 각본을 만들어서 배우 역할을 하면 두 배나 더 재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길러집니다. 이 때 지도 선생님은 아이들의 의견을 잘 듣고 요약을 해서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고 추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보조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탁구나 탁구공 튀기기 같은 운동 종목은 남자 아이들이 이겼고, 책으로 가위바위보는 여자 아이들이 이겼습니다. 이날 최종 스코어는 남자 아이들이 많은 백팀이 180점, 여자 아이들이 많은 청팀이 165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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