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면 영화가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나서 되돌아가는 길은 씁쓸했다. 그리고 허무했다. ‘용두사미’ 작품으로 규정하고
페이스북에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글을 올리고 났더니 한 페친이 의외의 호평을 한다. “설국열차 괜찮던데. 봉준호
감독이 10년 전에 꽂힌 작품이라던데.” 좋았던 반응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나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겨울 열차를 타는
상상을 했다. 눈이 쌓인 평야를 달려가며 아무도 안 밟았을 것 같은 숫눈 구경을 하는 맛이 일품이다. 기차는 같은 레일을 쓰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 같을 뿐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그렇지가 않다. 오로지 달리는
것만을 목표로 달리며 그 외에는 죽음뿐이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내 마음 속의 ‘겨울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는
용두사미가 아니었다. 사두용미. 용의 꼬리가 너무 커져서 숨이 막힐 듯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과 메시지,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라는 사람의 숨결이 거칠에 몰아치는 설국 속에서 나는 온몸을 다해 헤쳐 나왔다.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나서 탔던 상상의
겨울 열차에서 내가 보았던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영화가 끝나면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이며, 봉 감독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누가 타고 있는가
상상의 겨울 열차를 타고 가면서 문득 한 가지 물음이 스쳤다.
“가만! 열차에 누가 타고 있었지?”
앞 칸과 꼬리칸, 그리고 여러 가지 편의시설 칸에 담긴 사람들은 자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차는 인도의 카르텔처럼 엄격한
계급 사회의 압축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 장치일 뿐이다.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균형’이 있다. 인위적인 인구 수
조정(학살), 반란, 꼬리 칸과 머리 칸의 짬짜미. 하지만 이것 역시 설명 장치일 뿐이다. 이런 설명 장치에 기대
<설국열차>를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 있다. 영화에는 봉준호의 메시지를 머금고 있는 메신저들이
존재한다.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기존의 세계 위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대결을 펼치고 끝내 승리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설국열차의 목표마저 바꿔 버린다. 그러니까 영화에 펼쳐진 모든
설명장치들은 어린이로 대표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들이다. 여기서 ‘어린이’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어린이 관찰 보고서와 설국열차의 어린이
나는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다.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독서 책을 쓴 이유로 많은 가족과 어린이를
만나서 오랫동안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어린이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아이들은 타고난 논리학자, 민주주의자로서 유전자에 논리와 민주주의가 새겨져 있다.
2. 아이들은 창의력 또한 타고 났다. 밖에서 주입하는 방식의 교육은 창의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과 독서력, 판단력 등 기본적인
두뇌 능력을 낡은 것으로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있는 것을 자극해야 한다.
3.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욕구 단계에 이미 진입했다. 즉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넘어서 소속/애정 욕구, 존경 욕구,
자아 실현 욕구의 상위 욕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2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낡았다고 할 수
있다.
4.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다. 책으로 노는 방법을 알려주면 재창조를 곧잘 해낸다.
5. 아이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어른들이 기존의 사고로 깨지 못하는 세계를 깨워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이다. <왕의 귀환>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아이들은 곧 주인공으로 귀환할 것이다.
6. 아이들은 온몸이 거울과 같다. 짝퉁을 비추면 짝퉁이 반사되고, 창조를 비추면 창조가 반사된다.
<설국열차>에서는 적어도 3~6까지의 관점이 녹아 있다. 회고해 볼까? 설국열차의 세계는 어른이 만들었다.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열차 안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이지 목표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균형 따위도 없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세계다.
영화의 출발은 디스토피아다. 철저한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이들이란 한낱 “고기가 맛있다”거나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시킬 수
있다”는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앞칸과 꼬리칸이 공유하는 관점이지만 균열이 생겼다. 꼬리칸의 사람들이 어린이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앞칸은 꼬리칸에서 어린이를 공급받는 입장이었던 데 반해, 꼬리칸은 어린이를 낳는다. 낳은 자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꼬리칸 사람들에게 어린이들은 희망이다. 그래서 소중히 여긴다. 열차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산다. 트레인
베이비(train baby)들은 앞칸 승객들이 낳은 아이들로 어른의 세계의 완벽한 복제물이다. 실제가 되어 버린 짝퉁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거울이다. 엔진칸에서 노역을 하는 어린이들은 작업장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이 역시 착취의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열차가 전복되고 두 아이가 짝퉁의 세계에서 실제의 세계로 넘어왔다. 아이들은 기꺼이 실제의
세계로 들어간다. 발견된 것은 코라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이 전부인 가시밭길이지만 온몸이 세계의 거울인 아이들은 반영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봉준호)
도스토옙스키와 봉준호의 아이들
봉준호 감독의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가족’이다. <괴물>, <마더>는 가족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족
테마가 전면에 배치해 있다. <설국열차>에도 가족 테마는 왕성한 힘을 발휘하는데, 이번에는 ‘괴물’에서 선을 보인 ‘어린이’가
전면에 등장한다. 가족과 어린이를 예술작품에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유작으로서 작가의 치열한 작품 인생을 훌륭하게 종합해낸 역작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는 <카라마조프 씨네 아이들>의 주제와 설정을 빌려 쓴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커티스가 윌포드의 문 앞에서 “아기
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등장인물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터키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터키인들은 음탕한 쾌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는데, 어머니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를 꺼내는가 하면 심지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젖먹이를 위로 집어던진 뒤 총검을 받아내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어머니들의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데 쾌감의
핵심이 있는 거지. 그런데 나의 흥미를 아주 자극하는 명장면이 있어. 한번 상상을 해 봐, 젖먹이가 부들부들 떨고 잇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고, 그 주위를 여기로 들어온 터키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거야. 그 녀석들은 즐거운 장난거리 하나를 생각해
냈어. 그 녀석들은 갓난애를 웃기려고 얼러 보기도 하고 웃어 보기도 하는데, 결국 성공해서 갓난애가 깔깔 웃게 됐어. 이
순간, 터키 녀석 한 놈이 갓난애의 얼굴에서 불과 4베르쇼크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갓난애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거야. 아이는
즐겁게 깔깔거리면서 권총을 잡기 위해 고사리 손을 내뻗는데, 갑자기 이 예술가는 아이의 얼굴 정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서 작은
머리를 박살 내는 거지..”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식들의 투쟁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서 대가를 갚는다. 특히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 변호사의 연설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같은데, 변론의 골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한낱 노리개로 여기고 스스로 가족을 파괴하기 때문에 미래가 위태롭다는 주장이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주제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주인공 알료사는 아버지를 놀리는 아이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다가 죽은 한 소년을 추모하면서 어린이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니까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디스토피아 현실과 유토피아 미래의 혈투다. 꼬리칸의
어른들이 혈투를 주도할 때는 싸움의 목적이 명확치 않았지만 어린이가 주도하는 순간 싸움의 목적이 명확해진다. 예컨대 “리포드의
열차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린이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열차는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봉준호와 헐리우드 봉준호의 차이점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문을 박차고 깨부수려고 하는 ‘오버 액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나는 마치 베드신을 보는
듯한 야릇함을 느꼈다.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발악하는 순간 커티스의 역할은 끝났다. 커티스의 목표는 열차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머리칸에 있는 자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기억’을 상징한다. 설국열차의 어른에게 부여된 쓸 만한
역할은 기억이다. 길리엄과 남궁 민수 역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꼬리칸의 어른들은 왜 어린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그것이
미래이고 생명임을 믿기 때문이다. 낮고 차가운 곳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어른은 아이들과 ‘연결’된다. 이것 역시 봉준호 감독이
설정한 유토피아의 한 열쇠일 것이다.
끝으로 헐리우드 봉준호와 봉준호의 차이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는 헐리우드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퀘스트와 액션이
있고 영웅이 등장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구도 자체가 무척 단순해야 한다. 단순한 구도 속에서 세계관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특성이 동양과 서양의
관객들을 설득하고 보편타당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형식적으로 메시지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룬 봉준호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