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은 없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구성하는 첫 번째 화두입니다. 맹자부터 그리스 철학자, 프랑스 등 대륙 철학자는 성선설을 대표하고 영국철학자 그 중에서 홉스는 성악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저는 본성에 관해서 논의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가지고 본성에 접근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한다."(정치학(숲), 20쪽)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본성에서 시작해 본성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공자는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된다."(논어, 양화2)고 했습니다. 두 할아버지의 의견을 종합하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존재의 기반을 죄다 잃어버립니다. 성에는 '선'도 붙일 수 없고, '악'도 붙일 수 없게 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이 아니라 본능이며 그 중에서도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인 '생명욕구'와 '안전욕구'의 차원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즉 본성이란 단지 생겨먹은 대로 묘사할 수 있을 뿐 선하다 악하다를 평가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하느님(또는 신)을 나쁜 하느님 좋은 하느님으로 말하는 것과 같죠. 
생명욕구는 번식욕구를 포함해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모든 적극적인 욕구를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안전욕구는 나 스스로의 안전을 먼저 욕구하는 것이 첫 번째이며, 그 나머지는 나의 가족이나 친구 등 구성원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따라서 생명욕구와 안전욕구는 빈번하게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선설, 성악설 논의는 본성과 본능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해에서 근거한 주장이므로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본성과 본능의 사전적 의미(국립국어원)

본성(本性)「명사」
「1」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 ≒체성「1」.
「2」사물이나 현상에 본디부터 있는 고유한 특성. ≒성진01(性眞)ㆍ실성03(實性)ㆍ체성「2」.

본능(本能)「명사」
「1」『생물』어떤 생물 조직체가 선천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동작이나 운동. 아기가 젖을 빤다든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행동 따위이다.
「2」『심리』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



성선설과 성악설..은 없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면죄부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 성선설과 성악설의 허무함을 증명했지만, 여기서는 <중용>의 말을 토대로 성(性)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생각해 봅니다. 중용은 性을 설명하기 위해 '열렬하다' 또는 '성심과 성의를 다하다'는 의미의 誠을 차용하죠. 이미 그런 상태를 誠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誠을 흉내내는 존재(誠之者)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죠. 중용 22장에는 "오직 천하제일의 지극한 열렬함이 있어야지만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오만함도 함께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극적으로 추구해야 본성에 도달할 수 있는데, 팔짱 끼고 서서 성이 선하느니 악하느니 하는 것은 한가한 짓이라는 통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토대는 성악설인데, 이것은 면죄부입니다. 인간은 악하다는 면죄부는 원래 악하니까 악해도 된다는 이상한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방해합니다. 


결국 지금의 세계는 진지하지도 않은 유치한 세계, 성찰하지 않는 골 빈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환경 위에서 진보와 보수가 현란한 춤을 춘다. 내가 진보와 보수의 정파에 대해서 웬만하면 언급을 자제하는 까닭. 



"시인은 느낌과 현실 사이의 거리, 원대한 야망과 하찮은 결과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는 능력 때문에 불행해진다."(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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