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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전, 제주도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영화 <지슬>을 보고 왔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름 준비를 많이 했다. 굿다운로드로 오멸 감독(42·본명 오경헌)의 <어이그, 저 귓것>('귓것'은 '귀신'의 제주 사투리로 어리석다는 비아냥)과 <뽕똘>('뽕돌'은 낚싯바늘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낚싯줄 끝에 매어 다는 작은 쇳덩이나 돌덩이)을 봤고, 관련기사를 찾아 읽어봤다.
제주 4·3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제주대학교)에 입학한 1997년이었다. 당시는 대학 내에 운동권이 쇠락하기 시작할 즈음이었기 때문에 일명 사과학습(사회과학학습)을 통해 제주 4·3을 배웠다. 게다가 나는 국문학 전공을 했던 터라 현장답사 당시 소주를 끼고 할머니를 설득해 '취중진담'으로 당시 증언을 듣곤 했다(할머니들은 맨정신으로는 절대 제주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제주 4·3 관련자료 속에서 파묻혀 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자료를 치워버리고 제주로부터 벗어나 12년을 보냈다. 대학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 현기영 소설가의 강연을 우연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제주 4·3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은 내게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제주 출신인 타지 사람으로 이 말에 특히 공감이 갔다. 나는 현기영 작가가 이어 꺼낸 말도 가슴 속에 간직했다.
"멀리 도망쳐서 보니까 그제서야 제주 4·3이 보이더라."
내가 12년째 타향살이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현기영 작가의 이 말과 관련이 있다. 제주인에게 제주 4·3은 한마디로 '억눌림'이다. 해방공간에서 재건 의지의 꿈을 산산조각짓밟힌 억눌림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대량학살과 예비검속·연좌제 등으로 오늘날까지 시달려온 억눌림이다.
제주 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 수는 총 1만715명인데, 2003년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감소 같은 여러 근거를 종합해 2만5000명에서 3만 명가량이 제주 4·3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30만 명 정도였으니 '공식적'으로만 10분의 1 정도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제주인 중에서 제주 4·3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외조부는 제주 4·3 당시 행방불명이 돼 오늘날까지 당신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고, 외할머니는 당시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사실상 대살(代殺)을 당한 셈이다.
'억눌린 시간'을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억눌린 언어'에 익숙해졌다. 비유하자면 1948년에 큰 태양이 제주에 뚝 떨어진 것과 같다고나 할까. 태양(제주 4·3)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새카맣게 타버렸고, 그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타죽지는 않았지만 눈이 멀었다. 6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나마 '태양'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억눌림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제주 4.3, 세 번째 예술의 옷을 입다
제주 토박이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모티브로 삼고 있는 제주4.3이 모처럼 화제다. 오멸 감독 이전에 제주4.3을 대표하는 예술가는 현기영 소설가와 강요배 화백이었다. 현기영 작가는 197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순이 삼촌>은 제주4.3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현기영 작가는 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나는 현기영 작가의 작품 중에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가장 좋아한다. 1948년에 유년기를 보냈던 추억들과 6.25, 직업군인 아버지의 부재와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닦는 이야기 등 시대에 대한 성찰과 화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작품 속에서 "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거다."라는 어머니의 말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오래가고"는 제주 사람들의 정신을 상징하며 영화 '지슬' 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현기영 작가가 제주 4·3을 글로 표현했다면, 강요배 화백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대표작 <동백꽃 지다>에는 제주 4·3과 한국전쟁 전후 제주 사람들의 삶 그리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종이·먹·아크릴릭·목탄·유채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했다. <동백꽃 지다>에는 그림과 함께 당시 생존했던 34인의 증언이 삽입돼 생생함을 더했다.
나는 2007년 작품 '젖먹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김석보씨(1998년 당시 63세)의 증언에 따르면 북촌리라는 마을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날, 군인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을 때 한 아기엄마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업혀 있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았다. 미대 출신의 오멸 감독은 강요배 화백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영화 <지슬>과 <동백꽃 지다>를 함께 본 사람들이라면 <동백꽃 지다>에 표현된 그림과 증언들이 영화 <지슬> 안에 많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지슬>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기존 작품들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현기영 소설가의 글과 강요배 화백의 그림 등 일련의 작품들을 요약하면 "사람덜아 내 말 좀 들어봅서(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세요)"였다. 하지만 2013년의 오멸 영화 <지슬>은 그걸 깼다. 제주 4·3 당시 희생된 영령을 향해 직접 "많이 설왔지양? 진짜 속아수다"(많이 서러우셨죠?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가 접했던 제주 4·3 관련 예술작품들을 떠올려보면서 '우리가 영령에게 직접 말을 걸고 위로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영화 <지슬>이 제주 4·3 예술 중에서도 유독 당당해 보이는 까닭은 희생 영령들을 직접 바라 보며 예를 표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를 통해서, 제도를 통해서 위령제를 벌였다면 이제는 예술이라는 제기와 제수를 가지고 제사와 씻김굿을 할 차례다. 씻김굿을 하면 씻기는 사람과 씻는 사람들은 모두 위로를 받는다.
제기들이 엎어진 채로 시작되는 영화는 '제사'가 시작됨을 알린다. 중간 중간에 소제목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역시 제사의 진행 과정을 의미한다. 나는 제사의 마무리를 뜻하는 '소지' 편을 보면서 끝내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내가 꼬맹이였던 시절, 어른들이나 친척 형들은 "승주야, 제사 먹으래 가게"(승주야, 제사 먹으러 가자)라고 말했다. '제사 지내다'라는 표현은 망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제사 먹다'라는 표현은 산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사소하지만 이 '먹다'라는 말은 제주사람의 정신이 농축된 표현이 아닐까.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뜻한다. 이 단어는 "지슬이라도"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쌀밥은 못 먹고(먹이고) 지슬로 밥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이중섭 화가(1916~1956)가 제주도에서 끼니도 제대로 못 이어가며 어렵게 작품활동을 할 때 이를 측은히 여긴 동네 할머니가 화가에게 쥐어준 것도 '지슬'이었다. 이중섭 화가가 '지슬'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그림을 전해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제주 4·3이라는 난리통에 밥상 차려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저마다 보자기에 지슬을 담고 아무 곳에서나 자리를 깔고 끼니를 때웠으니 '지슬'은 제주 피란민들의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화의 내용으로서는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멸 감독의 '지슬'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영화 <뽕똘>에서 육지에서 내려온 주인공이 친구가 된 감독에게 "너는 영화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극중 감독은 "자파리!(어떤 것을 가지고 하는 놀이 또는 장난)"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제주 사투리를 몰랐던 주인공은 "자파리가 뭐냐?"고 재차 물어보고 감독 친구는 "자파리가 자파리지 뭐냐?"며 끝내 '자파리'의 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뽕똘>에 나오는 짤막한 대사 안에는 세 가지 열쇳말이 담겨 있다. 지역성과 언어 그리고 해학이다. <이어도>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제주 사투리로 쓰여지고, 극중에서 배우들이 사투리를 쓰는 것은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역문화 자체가 세계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지슬>은 '제주 사투리를 표준어로 번역한 최초의 영화'라는 흥미로운 타이틀도 하나 세웠다.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왜 전국개봉을 하지 않고 제주에만 먼저 개봉하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많이 받았단다. 나도 그 사정이 궁금해서 배급사에 문의해 봤는데 관계자는 그것이 감독의 뜻이라고 말했다.
"감독님이 제작발표회 때도 말씀하셨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제주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끼리 먼저 잔치를 하자는 취지입니다."
해학 역시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다. <레 미제라블>을 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해학과 관련해서 특히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빠리의 웃음은 온세상에 진창이 튀게 하는 화산의 아가리이다. 빠리의 해학은 곧 불똥이다. 빠리는 무수한 민족들에게 자기의 이상과 함께 자기의 풍자화들을 안겨 준다. 인류 문명의 가장 숭고한 기념물들이 빠리의 빈정거림을 받아들이며, 그 장난질들에 자기네들의 불후성을 부여한다."(<레 미제라블> 펭귄판 3권, 33쪽)
해학은 제주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지슬>에 표현된 것처럼 제주인들은 최악의 순간에도 농담을 던진다. 앞서 언급한 내 외할머니는 만삭에 모진 고문을 견뎌가며 끝내 외아들인 외삼촌을 낳고 죽었다. 동네 사람들은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고 비유했단다. <지슬>은 억눌리지 않았다. 억눌리지 않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해학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여러 가지 자료와 기사를 찾고, 감독의 영화를 봤지만, 같은 곳에서 영화를 함께 본 관객이 남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극장 안 매점에서 팝콘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상영관으로 들어간 한 아줌마가 나올 때도 팝콘이 가득한 상자를 그대로 들고 나오며 친구에게 "팝콘을 하나도 못 먹크라라(못 먹겠더라)"라고 말했다. 곧 이 영화를 볼 독자들이여. 팝콘을 들고 상영관에 들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제사 먹으래 가듯' 영화를 보고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