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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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선생에게 배우고 싶은 '태도'


푹 패인 눈에 말쑥한 밤색 양복을 걸친 신사는  지적이고 과묵해 보였다. 로댕의 작품보다 더 고민이 많은 듯한 얼굴의 강상중 선생을 11월 5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처음 만났다. <살아야 하는 이유>(사계절)를 소개하기 위해 출판사가 마련한 기자 회견장에서였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는 거지만 내가 강상중 선생의 귀한 책들을 놓쳤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3권(내셔널리즘,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을 내리 다 읽었다. 일본에서 100만부 이사 팔렸다는 <고민하는 힘>. 출판사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의 출판시장은 잡지가 6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단행본의 비중이 크지 않은데, 그런데도 100만부가 팔렸다는 것은 국내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200만부 팔린 것과 같은 충격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재일교포 2세, 경계인으로서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특히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했다던 선생은 삶과 진지함을 운명적으로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특히 강상중 선생을 만나고 싶었던 까닭은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 그가 결론처럼 강조한 '삶의 태도'를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예화가 하나 소개돼 있는데, 프랑클 박사가 보살핀 환자 중에서 임종이 임박한 한 환자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죽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프랑클 박사에게 "밤중에 일어나지 않으실 수 있게 지금 모르핀을 놔주세요"라고 말한다. 프랑클 박사는 "비할 데없이 아름다운 업적"이라는 칭송을 보낸다. (책 176쪽)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도 임종을 할 때 이웃에게 진 닭을 대신 갚아달라고 말하고, 슬퍼하는 제자들을 설득하려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모습도 떠올랐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선행 사례를 볼 때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티 안 나는 행동을 왜 이다지도 중요하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강상중 선생의 태도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자회견은 강상중 선생이 책을 집필한 경위에 대한 설명을 20분 정도 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강상중 선생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동시통역이 통역으로 끊어서 소개했다. 한국어로 하는 질문이 잘 안 들릴 텐데도 말을 알아들으려고 시선을 맞추고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올해는 질문이 참 많이 나왔고 대부분 중요한 질문이었다며 무척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을 하며 테이블마다 찾아가 기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은 기자회견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카메라로 잡을 수 없어서 아쉽다. 그리고 강연의 내용 중에 내가 눈여겨 본 태도는 '경계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한국과 일본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다. 한일관계가 악화될수록 선생의 가슴도 찢어지게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수'라는 직함 대신 '선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태도에 존경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강상중 선생이 쏟아낸 고민들은 이론만으로는 건져내지 못한다. 마치 왼발과 오른발이 보폭을 맞추어 걷듯 치열한 지적 작업이 일보 전진하면, 밑바닥 현장을 두루두루 둘러보며 직접 확인하는 작업이 호응하는 식이다. 3.11 후쿠시마 대지진이 벌어지고 일주일만에 선생은 방사능이 상당히 깊었던 현장 곳곳을 둘러봤다고 했다. 선생은 "2만명 이상이 죽은 현장을 밟아보면서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말했다. 특히 후쿠시마 현 사람들에게 들은 말 중에서 아직도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이런 사태를 만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말이었다. IMF가 터졌을 때도 선생은 한국에 있었고, 아르헨티나 부도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선생은 9.11 현장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던 중산층이 했던 말 "이것은 부드러운 제노사이드(인종청소)다"이 특히 가슴아팠다고 말했다. 현장파 지식인에게 특히 배울 것은 '현장'이 아니다. 그의 이론이다. 현장에 굳건한 기반을 둔 탄탄한 이론과 그것을 다루는 태도다. 내가 강상중 선생의 책 세 권을 내리 읽은 까닭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의 글과 말에 담겨 있는 함의


"한국은 점점 일본과 닮아가고 있어요."


강상중 선생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 이 말에는 <살아야 하는 이유>의 존재이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사랑하는 아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려 2만명의 일본인을 숨지게 한 대지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관통한 기록이다. 전작인 <고민하는 힘>에 등장하는 막스 베버, 나쓰메 소세키, 빅토르 에밀 플랑크, 윌리엄 제임스는 예고편(고민하는 힘)에 이은 본편(살아야 하는 이유)에 등장하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200쪽 남짓의 책이지만 체계와 완성도 면에서 꽉 차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강상중 선생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핵심인물을 등장시키지 않겠다고 작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강상중 선생의 책에 왜 이렇게 비중 있게 다뤄졌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는 <고민하는 힘>에서 선생이 해명한 부분을 소개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선생에 따르면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을 통해 '근대'라는 것이 인간의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가르쳐 준다. 게다가 당시가 제국주의 전쟁의 극단을 보여준다면, 현재는 다만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인 '글로벌 머니'가 폭주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버와 소세키의 말은 놀라운 치료제가 된다. 


강상중 선생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확실히 죽음과 관련이 있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슬픈 죽음 이외에도 '자살'이라는 한일 양국의 깊은 고민이 주제다. 강상중 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1년에 일본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3만이다. 지난 15년간 줄곧 그 숫자였기 떄문에 45만명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까지 보자면 여기에 10을 곱하면, 그의 가족들까지 헤아리면 여기에 10을 곱하면 된다. 즉 일본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주변에 절박한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11.5 기자회견 중에서)


세계의 자살률 공식 통계인 10만명당 자살률은 우리나라가 일본을 이미 누르고 1위다. (일본 10만명당 21.2명 자살, 한국 10만명당 33.5명 자살) 2010년 한 해 1만5566명, 하루 42.6명(2010년 통계) 그런데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살의 수치 너머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왜 이렇게 많은 자살자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살에 이르는지, 현실세계의 자본과 권력 그리고 사회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 자살자들을 떠밀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3.11 대지진이 책의 주요한 사건으로 등장해야 하는 까닭도 자명하다. 강상중 선생은 "(3.11대지진이 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이번 대지진은 일본 국민들을 세뇌시켰던 과학이라는 종교와 오만한 특권의식, 이들에게 억눌린 덩어리 세대(다이롄은 '덩어리'의 일본어)와 말단 세대가 보여준 프리터, 니트 등의 병리현상의 완결판이기도 하다. 강상중 선생은 이 현상의 근저에 있는 두 가지 키워드로 "돈, 내셔널리즘"을 꼽았다. 


3.11대지진이 벌어지고 나서 한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많았고, 당시 언론에서는 '연대'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해 선생은 한일관계가 전향적으로 진전되는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다. 비극적인 사건이 사람을 바꿔놓지는 않는다. 비극적인 사건을 통한 반성과 이를 통한 태도의 변화가 전향적인 관계를 만든다. 선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 당시 7천명이 넘는 한반도 출신자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 강상중 선생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는 모습


▲ 시간과 여유가 조금 더 되는 독자는 전작 <고민하는 힘>과 <내셔널리즘>을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 동시통역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 평소 선생이 해왔을 진지한 성찰이 주름을 통해 보인다




'거듭 나기'를 위해서


강상중 선생은 <내셔널리즘>이라는 책에서 보이듯, 일본의 내서널리즘에 대해서 오랫동안 추적하고 연구한 학자다.  시민의 자연적인 협의가 아니라 엘리트의 관념에 따라서 추동되는 게 내셔널리즘의 본질인데, 3.11대지진에 대한 선생의 설명에서도 내셔널리즘의 그림자가 쉽게 보인다. 선생은 3.11 대지진이 1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일본의 미디어는 '재해'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고, '연대'라는 말은 입에 꺼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자연재해를 통해서 일본의 시민들과 한국ㆍ일본의 시민들이 풀뿌리 연대를 이뤄내는 장면은 일본 엘리트가 보기에 악몽 그 자체였을 거라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강상중 선생은 두 가지 예화로서 내셔널리즘과 돈에 대해서 깊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도쿄도의 전 지사였던 '이시하라'가 장애인 전문 병원을 방문하고 "이 사람들은 아직도 살 가치가 있나요?"라고 남긴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분개했다. "이런 사람이 일본 심장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도 덧붙였다. 내셔널리즘은 일본 엘리트의 자의적인 관념 그 이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정치는 당대의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동양의 오랜 정치관으로 볼 때, 일본의 정치인들이 정치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돈을 상징하는 장면은 더욱 충격적이다. 선생은 일본의 위 전문의가 수입이 좋다는 이유로 정신병 전문의로 간판을 바꿔 영업하는 현상이 보고된 내용을 소개하며 한국의 상황은 어떠냐고 물었다. 직업 중에서도 가장 자긍심 넘치는 의사라는 직업이 한낱 돈에 따라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슬픈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거듭 나기'에 대한 소개를 덧붙이고 싶다. 이미 소개한 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단지 희망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강상중 선생이 원하는 것은 '이해'이다. 르네상스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감정과 고통 등 외부 자극을 상대하기에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해'를 시도하는 순간 고통의 반은 이미 사라진다고 역설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는 자살로 몰린 상황과 자살 선택이 한갓 개인의 처지가 아니라 사회구조가 의도적으로 밀어내거나 또는 막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책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분석돼 있다. 공교롭게도 강상중 선생이 주요하게 다룬 막스 베버(정신병 경력), 제임스(정신병 경력), 소세키(극심한 위궤양), 프랑클(아우슈비츠 생존 경험) 들은 거듭나기의 상징적 인물들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거듭나기 위한 절호의 기회이나, 고통을 다루는 태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튕겨나갈 수 있다. 


행복을 누리는 시대는 끝났다. 강상중 선생이 말하는 지금 시대는 불행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너머서는 시대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악순환이 반복된다. 강상중 선생의 말을 들으며 일본은 지금 악순환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일전에 했던 한마디가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한국은 점점 일본과 닮아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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