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철만 되면 북쪽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6.2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려는 이른바 '북풍'이 논란이 모든 선거판을 왜곡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 발언'으로 국민에게 불필요한 공포심을 주고 있다. 한겨레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28~29일 실시한 '국정현안 국민여론조사'에서 "정부가 천안함 사태를 지방선거에 활용하고 있다"는 응답이 56.5%에 달했다.(한겨레5월31일자, “정부가 지방선거에 ‘북풍’ 활용” 56.5%) 정부와 여당은 풀뿌리 지방자치선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북풍몰이로 선거를 왜곡하고 표심을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며 휴전상태이기 때문에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헌 이후 남북 긴장관계를 이용해 선거를 망가뜨리고 표심을 왜곡한 최악의 북풍 사건은 세 번 있었고, 천안함 사태가 네 번째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역대 북풍 악용선거사례는 현대사가 서중석 교수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시비평사)를 참조했다.

 

 

▲ 한겨레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의뢰해 28~29일 실시한 '국정현안 국민여론조사'에서 "정부가 천안함 사태를 지방선거에 활용하고 있다"는 응답이 56.5%에 달했다.  

 

재판부 조작해 정적 조봉암 법살한 자유당 이승만 정권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북풍은 이승만 정권 때인 1958년에 벌어졌다. 조봉암은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풍운아 정치인이었다. 대선 당시 내세웠던 공약이 바로 "평화통일"이었다. 게다가 "피해대중을 위한 정책" 등 국민의 아픔을 쓰다듬는 정책으로 유권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58년 1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북의 간첩과 접선하고 북의 주장과 유사한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조봉암 등 진보당 관계자들을 구속하였다.

 

이승만 정권은풍운아 조봉암을 죽이기 위해서 고법, 대법 판사를 조작하는 일까지 자행한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는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1심 판결에 대한 이승만의 질책에 대해서 "고법,대법원 판결이 검찰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므로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다"고 답변한 대목이 재판부 조작을 시사한다(조봉암은 불법무기소지죄로 1심에서 5년을 선고받았다). 실제로 2심 판사는 월남한 판사였는데 검찰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조봉암에게 사형을 판결한다. 대법원 역시 사형 판결을 확정하고 재심 청구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아 재심 기각 이튿날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자유당은 126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한다.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도 풍비박산이 나는데, 이 후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기까지 40여년 동안 진보당은 대가 끊기고 만다.

 

▲ 사법 살해를 당할 당시의 조봉암

 

없는 사건도 만들어낸 박정희 정권.. 노태우는 KAL사건으로 대통령 당선

 

두 번째 북풍은 박정희 정권 때 있었다. 1967년 7월 이른바 중앙정보부의 동백림 조작 사건. 이 사건은 1967년 6.8 총선을 앞두고 조작되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단군 이래 최대의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때 무려 200여명이 체포되고 서독과 프랑스 정부의 공식항의가 빗발치는 등 국제적 망신을 톡톡히 치렀다.

 

박정희는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을 통해서 개헌선인 117석을 훨씬 넘은 130석을 거두고 영구독재로 가기 위한 3선개헌의 밑작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세 번째 북풍은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 폭파사건과 금강산댐 사건이다. KAL기 사건은 아직까지 원인이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987년에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고 이 사건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1987년은 대대적인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 해였고 문화계에서도 적극적인 사회변화움직임이 일어 변혁의 시대였다. 출판물이 가장 활발히 발행되고 번역되던 해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직선제 개헌의 요구가 봇물치던 해였다.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 수용 등으로 민주화 열의를 거스를 수 없었지만 노태우는 KAL기 폭파사건으로 원하는 것을 얻다. 그것은 대통령 당선과 민주세력의 분열이다. 김영삼-김대중은 이때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가지게 되었다.

 

금강산댐 사건은 코미디와 같은 사건이었다. 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당시 건설부 장관은 《대 북한 성명문》을 발표하는데, 금강산 댐이 북한강을 통해 휴전선 이남으로 흘러들어가는 연간 18억 t의 물 공급을 차단할 것이고, 금강산 댐을 붕괴시켜 200억 t의 물이 하류로 내려가면 물이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며 북한이 이를 이용해 19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해 11월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1700억원의 공사비를 썼는데 이 중 억여원은 6개월 동안 모은 국민 성금이다. 정부는 국민의 표뿐만 아니라 돈도 '삥'뜯은 셈이다. 금강산댐 사건이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쳐 표심을 왜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풍으로 선거 왜곡한 대통령들.. 한결같이 불행한 결말

 

투표라는 전국민의 축제를 왜곡해 민주주의의 엄청난 후퇴로 기록된 세 번의 북풍 조작 사건을 일으킨 집권당은 공교롭게도 모두 한나라당의 전신이었다. 이승만 자유당-박정희 공화당-노태우 민정당이 그 주인공.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북풍 가지고 표심을 왜곡한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부패정치와 공작정치, 조작극을 반복하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성난 시민들에게 쫓겨나 1965년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죽었고, 박정희는 유신독재와 탄압, 학살을 반복하다가 심복에게 총을 맞아 죽는다. 그게 유명한 10.26 사건이다.(1979년) 노태우 역시 1995년 대통령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를 계기로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법원으로부터 징역 15년, 추징금 2천6백88억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번 6.2지방선거는 무상급식과 복지사회 실현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정책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선거이다. 하지만 지방정치와는 상관도 없는 북풍몰이로 선거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거가 왜곡된 만큼 민주주의도 후퇴를 피할 수 없고, 이 책임은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지게 될 것이다.

 

▲ 4.19혁명 당시 성난 국민들이 이승만의 동상을 허물고 있다

▲ 동백림간첩사건 혐의자로 강제 연행되었던 사람들(슈테른지에 보도)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선사해준 대신 수많은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더러운 조작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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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6-0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희... ㅎㅎ 웃기지도 않더라구요.
칼기를 폭파시켰는데... 바로 석방에 뭐, 국정원 직원이랑 결혼이라...
국민들은 모르구요...

승주나무 2010-06-12 13:0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