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개념글 하나 올리겠습니다.

 

너무 차가운 민주주의, 너무 뜨거운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면 드는 생각은?

 

"구리다"

"사전 속에서 죽어버린 단어다"

"언제 적 민주주의니?"

 

민주주의를 목숨 바쳐 지킨 선배들에게는 아직도 가슴 뭉클하고 영원한 가치일지 모르지만,

그 수혜를 받은 젊은이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가치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하면 절박함의 온도가 다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죽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촛불집회 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나와 광장에서 한마음으로 만났을 때 마주보았던 마음은 "민주주의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죽지 않았다면 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가치에서 만나서 얼싸안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이름을 못 얻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서로 함께 부를 수 있는 이름, 언어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만날 수 있다. 민주주의에 어떤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좀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너무 차가운 민주주의와 너무 뜨거운 민주주의라고 부르자.

 

차가운 민주주의는 법치 운운하며, 다수결 운운하며 밀어부치는 껍데기 민주주의이다. 차가운 민주주의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명박산성 아닐까? 물론 법치와 다수결, 대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뼈대를 결정짓는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알맹이 없는 민주주의는 영혼이 없는 인간과 같다.

 

 

MB의 민주주의는 몇 도씨인가?

 

너무 차가운 민주주의가 있다면, 한편으로는 너무 뜨거운 민주주의도 있다.  

 

▲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의 산실 국회 

 

보라 뜨겁지 않은가? 뜨거운 육박전이다. 한치의 양보 없이 오로지 투쟁뿐이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한나라당이 뜨거운 민주주의,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당이 뜨거운 민주주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민주주의적 가치를 발견해내기 어렵다.  

 

 

 

차가운 민주주의와 뜨거운 민주주의가 만나면 극단적인 충돌로 곧잘 비화된다. 차가운 자는 얼려 없애려고 하고, 뜨거운 자는 녹여 없애려고 하는데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찬 음식은 데워서 먹고, 뜨거운 음식은 식혀서 먹는다.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겁지 않은가.

 

차가운 민주주의와 뜨거운 민주주의에 빠진 것이 있다. MBC 신경민 앵커가 용산참사를 보도하며 덧붙인 클로징 멘트를 보자.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목마 기습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졸속 그 자체였습니다. 법과 질서라는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2009년 1월 20일)

 

 

민주주의의 적정한 온도는?

 

김구라보다 진중권보다 독설을 잘 날렸던 독설의 달인 맹자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MB에게 뭐라고 했을까? MB 따위는 사소하다. 그 배후의 차가운 민주주의에 대해서 맹자는 '망민'(罔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쩜 MB가 하는 행태에 대해서 요목조목 잘 따졌는지 가렵던 등허리가 시원할 정도다.

 

적당한 생계수단이 없으면서도 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오랜 수련을 거친 선비만이 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적당한 생계수단이 없으면 상식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상식이란 게 없다면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기 쉽다. 결국 죄를 짓에 되는데, 이를 잡아다가 가두기만 하는 것을 바로 '망민' 즉 백성을 그물질한다고 말한다. 어찌 재위에 있는 지도자로서 백성을 그물질하는 따위의 짓을 하겠는가?(맹자, 양혜왕)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도 마련해 주지 않으면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저항을 '준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 만행을 보면 천하의 맹자라고 해도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망설일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맹자는 인간 공동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하나 제시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었다. 맹자 철학의 핵심이 바로 '측은지심'(남을 불쌍하게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이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것이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 맹자

 

동양이 말하는 정치의 기본정신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의 존재가치는 어렵고 가난하지만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소홀히 한다면 정치란 이미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을 홀아비라 하고,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을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으면 고독한 사람이라고 하고, 어리고 아비가 없으면 고아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핍한 백성으로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경>에는 '부유한 사람은 살아갈 만하지만, 이 외롭고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련하구나!'(맹자 양혜왕)

 

민주주의와 공동체 문제를 감정이라는 열쇠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맹자뿐이 아니다. 시민사회운동 영역의 의세계적인 지식인 벤자민 바버는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입'이라고 말했다.

 

이웃과의 공동체 활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감정이입'이다. 이웃과의 감정이입의 경험은 시민공동체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벤자민 바버(B.Barber)

 

특히 그는 지역에서 능동적 시민들이 대면적 상호접촉, 즉 '얼굴 부대끼기'를 통해서만이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경우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부대끼기를 덧붙일 수 있다.

김장을 계획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된 상황. 대한민국에는 현재 정치가 없다. 국가가 정치를 할 수 없다면 시민들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 아래의 표를 보시라.

 

 

작년에 왔던 지역촛불이 죽지도 않고 모아준 '김장김치 받을 분들 목록'이다. 떡하니 위탁기관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수소문을 통해서 김치를 받을 만한 분들을 직접 만나고 확인하고 나서 1,000여명의 금쪽 같은 명단이 만들어졌다.  

 

 

 

 

 

 

 

위 사진은 2008년 6월 26일 명박산성에 대항해 국민토성을 쌓던 날의 사진. 아래 사진은 2009년 12월 6일 조계사에서 사랑의 김장 박스를 나르던 모습.(그 아래는 두 줄로 늘어선 김장 끈) 촛불의 완벽한 재현, 인간끈의 재현이다. 이것이 바로 장삼이사들의 감정, 이심전심이고 생명의 끈이다. 촛불이 다시 밝아진다.

 

너무 차가우면 이런 끈을 못 만든다. 너무 뜨거워도 이런 끈을 못 만든다. 그것은 "따뜻한 민주주의"라야 한다. 사람의 온도인 36.5도로 최적화될 때 민주주의는 되살아난다. 국민토성을 쌓듯이 남자든 여자든, 어리든 늙었든지 간에 한곳에서 끈은 만들 수 있는 따뜻한 민주주의가 바로 촛불이 바라보는 언어다. 이 언어 위에서 저마다 소중한 것을 내놓는다면 세상 전체를 따뜻한 민주주의로 감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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