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싶었다.
49재가 지나고 안장식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물리적 죽음'으로 한정해서 생각했었고,
타살론에 귀를 기울이는 등 적잖은 방황을 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입장이지만,
죽음을 선택한 노무현 대통령은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노무현 추모 행렬을 따라 나섰던 500만명의 시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의 행위 속에 감춰진 뜻을 이해하는 것은 '각성된 시민'이다.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 노무현

이 문제를 추론하기 위해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리적 죽음을 일단 부정하고 죽음이 발생한 시점에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음이 발생한 시점에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그 3일간의 대화에서 여섯 명의 노무현을 만났다. 바보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치학자 노무현, 사상가 노무현, 인간 노무현.
- 오연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오마이뉴스)


언론으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심층인터뷰한 오연호 기자(오마이뉴스)는 한 사람의 인물에게서 무려 여섯 가지의 '인물'을 보았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마을에서 죽음에 이르른 상황은 여섯 인물 중에서 하나여야 할 것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비석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 노무현 대통령 유서 일부

타살설은 정황적으로도 옳지 않다.
만약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검찰에 조사를 받고 국민적 망신을 받을 대로 받은 사람에게 살인을 교사할 이유는 없다.
암살을 받는 사람은 대개 위기감을 주는 위협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물론 이명박에게 죽은 노무현이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봉하마을이 유명관광지가 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사 '잘 나가는' 시점이 아니라
검찰 조사를 전면적으로 받고 친지와 측근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상황에서 근거가 없다.

이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선택한' 것인가 '선택된'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온라인 상에서 떠도는 '타살설' 뿐만 아니라 제도언론에서도 '부엉이바위로 내몰렸다'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모두 '선택된'이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이것을 '선택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인격적, 사상적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물리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언어이면서 상징일 뿐이다.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가지 말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렬한 언어는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을 향해 던진 언어라고 생각한다.

한때 사서삼경이나 사기열전 등 동양의 고전들에 심취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선비가 책을 읽는 이유"이다.

선비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이 값할 때를 잘 알기 위함이다.

목숨이라는 것을 '언어'로 보기 때문에 동양의 선비들은 곧잘 목숨을 걸고 일을 했다.
우리가 '완벽'이라고 하는 보석을 '완벽'으로 만든 것은 '인상여'라는 사람인데,
자신의 조국인 조나라의 보석을 지키기 위해서 진나라 왕에게 면박을 주고 보석을 빼돌렸다.
목숨까지 건 인상여의 언어 앞에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진나라 왕도 그를 살려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선비가 있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구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는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쓰시마섬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쓰시마섬에서 인상적인 일화를 남겼다. 면암 선생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도 함께 단식을 하겠다며 곡기를 끊었다. 그런데 면암 선생이 불같이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죽을 때와 장소를 골라야 한다. 나는 여기서 죽는 게 맞다. 일본을 죽음으로써 꾸짖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들을 죽음은 구차한 죽음일 뿐이다. 넣싀는 삶으로써 일본을 꾸짖어야 한다. 여기서 있었던 일을 기록해서 후세에 알려줘야 하는 것이 너희의 사명이거늘 헛되이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니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것이냐?"

면암 선생의 죽음은 중용에 맞는 하나의 언어였다.

천재는 기존의 언어 위에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얹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 도스또옙스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적극적인 죽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죽음일까?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뭇 어르신들의 평가에서 읽을 수 있다.

"죽기는 왜 죽어???" (어르신들이 자주 들려주신 말씀)
"고통스럽고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서도 전직대통령으로서 꿋꿋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29만원을 가지고 다니는 할아버지 말씀)


이런 반응에서 내가 읽었던 단어는 '패배주의'였다. 현대사 60년 동안 우리가 한 번도 뛰어넘어보지 못했던 벽이 바로 패배주의였다.

나는 20년 정치 생애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한번도 패배주의에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오마이뉴스 오연호 기자에게 쓴 반론편지 일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패배주의에 대해서 도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아이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도덕성의 한켠이 허물어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도덕성보다 '패배주의'의 출몰이 더 두려웠던 것 같다. 이 패배주의에 다시 휩싸이면 다시 몇 십 년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나 사회라는 것은 심리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패배주의에 빠진다면 위정자들은 더 많이 해먹을 수 있고, 시민들은 더 가혹한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어차피 이런 세상인데 뭐!"하면서 한번도 도전해볼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이 두려웠던 것 같다.

죽음을 선택할 때 노무현은 이미 사상가였다. 정치학 교과서 집필을 준비 중이었고, 시민사회의 막강한 후원자가 되려고 작정하고 있을 때였다.

정치인들, 보통 정치인들은 (정치) 권력을 정점으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죠. 보통의 정치인들은.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내가 다른 정치인과 다른 점은 권력을 최고 정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정치권력은 하나의 권력일 뿐이고,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은 시민들의 머릿속에 있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노무현 대통령은 각성한 시민이 진정한 권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면 자신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심성과 도덕성에 대한 일종의 결벽도 작용했지만, 그는 이상주의자이자 사상가였다.

노무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실체를 모두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예견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물리적인 관점에만 한정해서 보는 무수한 시선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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