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왜'를 생각하면서 '박쥐'를 보면 재미없다.

박쥐라는 영화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박쥐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다. "너무나 불친절한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의 논리적 개연성이나 극중 인물의 콘텍스트(문맥)을 중시하는 나에게 '박쥐'라는 영화는 너무 뜬금없었다. 주인공이 뱀파이어가 되는 과정이 너무 엉성해 '박찬욱 영화 맞아?'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상현(송강호)가 어떻게 해서 뱀파이어가 되었건 간에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 살아가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다. 하기야 나도 직장 잘 다니다 반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을 보고 "왜 그랬어?"라고 따지듯 묻는 지인들에게 "사연이 복잡해"라는 말 이외에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초반부 스토리에서만 '왜?'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영화 전체에서 '왜'는 마치 금칙어와 같다. 금칙어를 대신해서 차지한 개념은 '바로 지금'이다. 그것은 태주(김옥빈)의 돌변이다. 마치 조용한 연못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상현의 등장에 태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한복집에서 말 잘 들으면서 조용하게 살아온 태주는 상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현을 만나고 나서 인생의 섬광을 느꼈고, 섬광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태주의 돌변이 믿기지 않고 환타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황석영을 보라. 황석영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보다 극적인 변화는 언제든 누구에게서든 일어난다.

인생은 고요한 연못과 같다. 누군가 돌을 던지기 전까지는 다 그렇다. 돌을 맞고 파문이 일다가 다시금 고요히 잠잠해지기는 하지만 '파문'을 만나 파문 속으로 몸을 던지고 아예 해일이 되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을까?




캐릭터를 폭발하게 만드는 힘이 영화에는 있다

영화 <박쥐>를 보고 내내 못마땅하다가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각각 캐릭터들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이다. 소설가든 영화감독이든 가장 어려운 것이 캐릭터의 창조이고, 그 다음이 상황의 설정이다. 나머지는 이것들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박쥐>는 캐릭터가 살아서 날아다닌다. 그것은 단지 연기자들이 연기를 잘 했기 때문이 아니다. 연기력보다는 연기자들이 편안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민 때문에 50명 중에 1명만 살아남는다는 신약 실험에 투신했지만 사실은 상현의 욕망을 숨기기 위한 기제였을 뿐이라는 것이 태주에 의해서 드러난다. 태주 역시 강우에게 학대를 받은 사실이 없지만 상현이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 '학대 받는 여자'가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빛이 날 때가 언제인가? 바로 '욕망'이 작용할 때다.

나는 박쥐의 부제를 <욕망의 저항사>라고 쓰고 싶다. 은폐하려는 자(상현)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망각한 자(태주)로부터 깨어나려는 욕망. 하지만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은 결코 신사적인 결말을 만날 수 없다.

"하나의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의해서 제압될 뿐이다"(스피노자)

욕망의 이데아가 있다면 나는 태주의 욕망이야말로 욕망의 이데아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욕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판타지적 욕망이다. 현실적 욕망은 상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상현의 욕망은 반거충이 욕망이다. 항상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욕망의 편에도 이성의 편에도 설 수 없는 <박쥐> 같은 존재가 바로 상현이다. 내가 제목에 도달한 길은 이와 같다.

상현의 캐릭터를 욕망과 이성의 대결구도로 본다면 상현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상현은 욕망의 이데아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이성도 대표할 수 없다. 상현은 '갈등'과 '고뇌', '방황'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상현의 마지막 결단을 보면 이성이 욕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과연 이성이 승리를 했을까. 이성은 욕망의 엄청난 힘에 눌려 '자폭'을 한 것뿐이다. 고뇌하고 갈등을 한다는 것은 이성이 받쳐줄 때의 일이다. 고뇌와 갈등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성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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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5-1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에서도 호평을 받았나봐요. 기사라 주르륵 떴어요.
-마치 조용한 연못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현상의 등장에 태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앞부분에 모두 '현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상현'으로 고쳐야겠어요.^^

승주나무 2009-05-17 01:17   좋아요 0 | URL
박찬욱 감동의 인지도와 칸의 수상 내역.. 그리고 실제 영화를 접하면서 받는 느낌을 순수학 구획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영화에 대해서 고민을 오랫동안 했지만, 칸의 수상 내역이 호평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지도 모르겠지요. 확실한 것은 판에 박힌 독법으로 <박쥐>에 다가가면 열이면 일곱여덟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란 점입니다. <사이보그는..>필이 조금 나거든요^^

오탈자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어요~~ 현상현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