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은 '계급'을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다

요즘 실크세대, 88만원 세대, 박권일, 변희재, 우석훈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지면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는데, 출판계 선배들이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석훈, 박권일, 변희재의 칼럼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각자 평가받는 몫은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조선일보의 지적 물타기에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노 지식인은박권일이 "계급문제를 쓸 경우 책이 안 팔릴 수도 있기 때문에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혔다"라는 말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그들은 계급론을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권일 스스로 <88만원 세대>의 약한 고리라고 자아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자아비판인지 들djqhwk.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쉽다. 그래도 새로운 형태의 계급모순들을 세대모순의 형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일부

박권일은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계급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었고, 남은 문제들이 미제 상태로 있었다고 평가하는데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88만원 세대> 자체가 새롭게 강화시킨 문제들이 있다. 계급 문제는 인간이 잉여물을 생산하는 순간부터 존재했던 근본문제다. 때문에 어느 나라이든 계급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미군정, 이승만 정권, 6.25, 군부독재, 이명박 정부 등으로 계승되면서 계급문제의 싹이 잘려 버렸다. 계급문제를 언급하는 순간 '빨갱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상황은 진정한 의미의 분서갱유가 이루어져서 우리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기다려야 했다. 계급문제를 겨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 지식인은 서태지와 촛불 등을 거론하며 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지식인들의 헛발질이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들을 망쳐놨다고 개탄했다. 서태지는 87과 가장 가까운 문화적 현상으로 평론가들이 찬사해 마지 않았던 서태지 열풍(대단했다)가 지금 이루어놓은 게 뭔가가 그의 반문이다. 촛불도 다르지 않다. 촛불의 역사적 한계가 분명하고 메시지의 한계가 분명한데도 지식인들은 찬양조로 반응하다 보니 촛불이 주는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 공전의 히트를 뒤로 읽어 보면

<88만원 세대>가 던져준 질문과 사회적 의미, 그리고 판매고(이것 또한 빠뜨릴 수 없다)에 대한 찬사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래서 이 현상을 뒤로, 혹은 거꾸로 읽어 보려고 한다. 나 역시 88만원 세대에 열광했고, 우석훈에게 열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1. <88만원 세대>가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시대, 아니 우리 세대조차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즉 <88만원 세대>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향할 담론들을 담아내고 있지 않다. 계급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닿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전술도 없다. (그래서 변희재 같은 사람조차 빈틈으로 들어왔을 정도로) 우리 당사자들의 주된 전략은 바로 '연대'다.

"똑똑하고 덕이 높은 녀석들은 적장끼리도 친구가 된다. 하지만 같잖은 놈들은 같은 팀끼리도 죽을 때까지 아귀다툼을 한다" - 파스칼의 팡세 일부(글자만 거칠게 다듬음)

세대론은 전략적인 면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의 삶 자체가 투쟁이라면 투쟁의 성과는 '연대'를 위해서 얻어진다.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서로 연대하면서 극복하는 것이 싸움의 도다. '계급'은 거대한 적을 상대할 뿐이지만, '세대'는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낸다. 세대끼리도 싸울 수밖에 없고 그들 사이에 연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2. 386,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정명을 얻지 못했다. 노 지식인의 비판이 다시 등장하는데, 386이라는 말은 80년대에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싸워 왔던 역사를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다. 더구나 세대론으로 포장된 수사다. 88만원 세대는 여기다가 '돈'이 덧붙는다. 그는 지식인들이 너무 대중의 눈치만 보면서 용어 선택도 '문자메시지'에너 나올 것 같은 것들을 쓴다고 비판했다.

<실크세대>라는 말도 우연히 이슬처럼 사라질 뿐이다

변희재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앞서 지적한 386과 88의 용어적 결함을 극단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만 덧붙인다. 이것은 차라리 박권일의 평을 빌리는 게 좋을 듯하다.

(변희재는) TV 탤런트 분석서 <스타비평>이 데뷔작이며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동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안티포털 운동가'로, 요즘엔 <조선일보> 논객으로 활약중인 인사다.

실크세대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이름이냐면 실크세대와 실크의 의미만 놓고 보면 알 수 있다. (실크세대라는 말의 정의는 변희재의 칼럼에서 그대로 쓴다)

실크세대: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를 말한다.

실크 :
명주실 또는 명주실로 짠 피륙.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실크에서 어떻게 실크로드라는 말이 연결될 수 있을까. 실크로드 시이오 동아리 사람들에게나 통할 용어임이 분명해졌다. 그냥 자기들끼리 쓰는 용어를 88만원 세대를 대체한다 어쩐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흰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크로드'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도 적절치 못하다. 실크로드는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여 중국과 서아시아ㆍ지중해 연안 지방을 연결하였던 고대의 무역로로서 고대 중국의 특산물인 명주를 서방의 여러 나라에 가져 간 데서 온 말이다. 중국의 한무제 때 대신(大臣) 장건(張騫)을 시켜 서역의 길을 개척하면서 생긴 말이다. 우리는 흔히 '비단길'로 알려져 있지만, '비단'은 그야말로 구실에 불과했다.
한(漢)나라 때, 신강(新疆)의 이리(伊犁) 일대에 오손(吾孫)과 대원(大宛)이라는 작은 두 나라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좋은 말들이 생산되었다. 당시 한나라 사람들은 이곳에서 태어난 좋은 말을 '서극천마(西極天馬)'라고 불렀다. 실크로드는 한무제가 서역의 말을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말을 얻으러 가기 위해 만든 길이다. 당시 중국에 말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한무제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서역이라는 장대한 길을 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세대론'에 갖다 붙이기에는 썩 반갑지 않은 말이다. 우리나라 세대들은 모두 한무제의 욕망에 봉사한 그 길의 이름을 써야 한단 말인가. 실크세대를 고안한 사람의 인문학적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실크세대'이다.


촛불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회상

촛불집회가 한창 뜨거웠을 때 나는 일주일에 3~4일 정도 광화문에 '출첵'했다. 시민기자, 블로거기자로 현장을 기록했고, 많은 학생, 어르신을 만나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10여 차례 현장에 다니면서 회의가 밀려 왔다. 내가 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촛불에서 해야 할 일은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강행군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이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회의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회의의 대강을 체감하게 된 것은 나의 독서 지향점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다. 나는 촛불에 다닐 때만 해도 우석훈, 장하준의 책을 즐겨 읽었다. 이것은 이명박이 '경제'라는 화두를 천박하게 사용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촛불현장에서의 회의가 우석훈, 장하준에 대한 회의와도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셰익스피어를 읽게 되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자본론을 읽는 집단을 알게 되었고 3개월 넘게 자본론을 읽고 있다. (1-하권을 읽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시사IN 신년강좌에서 만난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위 책의 공통점은 고전이거나 근본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나는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그저 성실하게 사회를 읽으려고 하고 책으로부터 지적 교신을 얻으려는 장삼이사에 불과하다.

장삼이사조차도 '근본적인 것'이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명망 있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문제는 추구하지 못하고 자꾸 대중의 눈치를 보는 비겁함을 보이는 것이 실망스럽다.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지식인의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는 장삼이사의 비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2-0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9-02-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할 때 추천을 안 하셨군요 ㅋㅋ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침에 댓글을 보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2009-02-11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