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씨가 꼭 읽어보라고 한 책 중에서 <빨간머리 앤>이 있었다.

빨간머리 앤은 어릴 때 만화 프로그램으로 보았는데,

그림이 여자애들(그 당시의 관점으로) 스타일이라 별로 끌리지는 않았는데, 보다 보니 그 감수성과 캐릭터에 반하게 되었다.

특히 린드 아줌마의 엄격하면서도 차분하고 따뜻한 성격은 <빨간머리 앤>의 주요 인물들을 대표한다.

매슈나 마릴라 역시 '화음'처럼 다채로운 캐릭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인격이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세파를 견뎌내며 방어적이 되고 거칠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순수한 본성과 감수성을 소중하게 길러 온 인물들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개울은 숲 속 상류에서는 은밀한 비밀로 가득한 웅덩이와 폭포를 이루고 구불대며 세차게 흐르지만, 린드 부인네 집 앞을 지날 때는 얌전하고 조용한 시내로 변했다. 개울물조차 레이첼 린드 부인의 집 앞을 지날 때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예절을 갖춰야 한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 13쪽


나도 어릴 적에는 상상력이 가득한 소년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운데, 집에 갔다 돌아와 보니 현관문 꼭대기 현관문틀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 숫자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고 보지 않으려면 보이지도 않는 표시였다. 누가 문틀에 박힌 숫자를 신경쓰겠는가. 그런데 나는 그것이 우주 외계인이 남긴 표식이라고 생각해서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고민한 끝에 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쏜살같이 도망나왔다. 마치 뒤에서 외계인이 쫓아오기라도 한 듯이.

빨간머리 앤을 읽고 나서야 나는 상상력과 감수성은 과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 영화 <타짜>의 아귀

빨간머리 앤은 풍부한 상상력이 나오는 사춘기 소녀가 나오는 소설에 멈추지 않는다.
그 상상력은 저마다 사정이 있고 상처가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가 느끼는 '사랑'은 어떨까? 모든 상상력은 사랑으로 향하며, 상상력은 촉감으로 만져질 것만 같다.

보편적인 감수성, 보편적인 상상력, 보편적인 사랑..

나는 이 책을 이 정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나머지 부분들을 읽고 나서 이 책에 관한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을 써보고 싶다.
읽기도 전에 이렇게 김칫국물을 마시게 하는 책은 참 오랜만이다.

 

덧 : 제목에 대해 부응하는 글 내용이 없어서 덧붙여 둔다. 최근 고단하고 힘든 일이 많이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나는 얼핏 이것이 '상상력 부족' 때문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보편적인 상상력은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데, 빨간머리 앤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상상력만으로 상황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나가는 모습은 또 하나의 감화다. 시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뿌리를 적셔 가듯, 나는 <빨간머리 앤>에서 상상력과 감수성을 한껏 적셔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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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완역판이 열권이 넘는데 큰 맘먹고 읽어야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