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 감춰진 감시와 통제의 실체



▲ 책을 보다가 한용운 시인의 사진과 만났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기습을 당한 것이다. 사진은 당시 '염라장'이라고 할 정도로 악명높은 장치였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활동가들이 범죄인 취급을 당했다. 사진 하단에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이 보이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보안법'이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산책자)라는 책은 단순히 경성 일제 치하의 사진과 역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역사에 박힌 사진'이거나 '사진에 박힌 역사'의 이야기다.
나는 처음에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아내의 디카를 혼자 쓰다시피 하고 있다. 상이 나에게 와서 인사하는 게 좋고, 사진을 뽑을 때 사진이 나에게 점수를 주는 것 같아서 긴장되기 때문이다.

여권사진을 만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규정이 자못 복잡하다. 귀는 드러내야 하고, 입은 머금어야 하고, 흰색 의상을 입어서는 안 되고, 눈동자는 선명하게 보여야 하고... 이런 시시콜콜한 규정까지 다 정해놓고 있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의 저자는 '사진'에 담겨 있는 특성인 '객관적 표상'은 사진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국가기관 같은 외부에서 규정될 때가 많다고 분석했다. 철저히 관리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사진의 규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진은 정치적이다. 1970년대 도입된 주민등록증 제도는 간첩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탄생했다. 시,도민증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신분 확인이 필요해지자 발급된 것이다. 하지만 사진의 정치학이 가장 왕성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역시 일제 치하다.

우리 민족의 거목처럼 존경스러워 보이던 한용운 선사(시인)가 범죄인처럼 측면과 정면사진 속에 갇히고 아래 범죄사실이 적시된 자료를 보는 마음이 참으로 혼란스럽다. 갑자기 거인을 소인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바로 '사진의 마술'이다. 나와 한용운 선사 사이에서 '사진'은 마치 유리벽처럼 작용하는데, 나는 관객의 입장이며 사진의 주인은 아니다. 한용운 선사 역시 사진의 주인이 아니다. 사진의 주인은 일제다. '죄인' 한용운을 찍은 일제에게 한용운은 한낱 범죄인이거나 관리대상일 뿐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나 지도자, 사상가, 지식인들은 사진이라는 1차 감옥에 갇혀야 했던 운명이었다. 일찍이 사진의 효율성과 기능을 알고 있던 일제로 인해서 우리들과 사진과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염라대왕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사진'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수형기록표, 1919년(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진은 일찍이 경찰 행정에서 효용가치가 '발견'되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사상 운동가나 독립운동 인사들의 감시와 검거를 위해 사진이 활용된 것이다. 사진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는 '염라장'(閻羅帳)이라는 명칭이 증명한다. 염라장은 사진이 첨부된 요시찰 인명부나 사진첩을 가리키는 이칭이다.
1929년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사상운동자 명부 작성"에 수집된 사진만 2천여 장이며, 1920년 7월부터 1935년까지 전과자의 범죄 수법과 지문, 그리고 사진을 모아놓은 자료는 35만 4,736매에 달한다.

사진이 부착된 주민증이 없는 사람은 즉시 사살하라는 지시가 내려간 적도 있었다. 1932년 만주국을 세워 그 일대를 통치했던 일제는 비적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만주 장백현에 거주하는 수만 명에 이르는 이주 조선인들에 대한 집단적인 관리 시스템을 운용하게 된다. 장백경찰서가 1947년 7월 1일 배포한 포고문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주민증은 현내 거주자 는 전부 가질 것, 만일 주민증 없는 자는 비적으로 인정하여 즉시 총살함
2. 조선인, 만주인 남녀 16세 이상은 전부 주민증 본인 사진 2매씩 첨부해서 당자에 7월 말일내로 제출할 것, 거주지가 불분명하거나 독신으로 있는 자는 신원을 조사한 후 발급할 것.


장백현 내에 이주한 동포는 2만6천명이었다.

사진은 그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서도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사진 촬영의 금지를 정해놓은 법률만 해도 요새지대법과 군기보호법, 국가총동원기밀보호법 등으로 다양했다. 군기보호법은 사진 촬영을 광범위하게 규정해놓은 법이다. 이 법은 육군형법(시행령), 해군형법(동 시행령), 해군치죄법, 육해군법회의사소 재판강제집행법, 육군군인속위경죄처분예, 해군군인군속위경위처분예, 계엄령, 군용전신법 등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수의 법령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 때의 법 시행절차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데, 일본에서 법률이 제정되면 식민지 조선에 자동으로 시행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군기보호법은 군사시설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금지 법령이어서 일반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는데, 사실상 조선의 모든 영토를 실질적인 제한구역으로 설정한 법률이 바로 '국가총동원기밀보호법'이다. 요새지대가 아닌 지역의 철교, 항만 시설 중 특정 지점 등의 촬영도 금지되어 점차 한반도 전역이 사진 통제 구역으로 변해가게 된다.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해당 구역에서 사진 재료를 구매하기만 해도 법에 저촉되어 제재를 받았고, 레닌의 사진만 소유하거나 집에 걸어놓아도 압수하는 등 사진의 촬영행위, 재료 구매, 배치에서부터 사진 규격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통제와 감시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사진에 담겨 있는 감시와 탄압의 문맥을 비틀면 '공포'가 읽힌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와 사람들은 사진을 염라대왕보다 무서워했다면, 사진으로 이들을 관리하려 했던 일제의 공포심은 어떠했을까?

철권통치와 탄압을 일삼는 자들은 겉으로는 무서운 표정을 짓지만, 마음 속에 꽈리를 트는 공포를 지우지 못해 더욱 악독하게 달려들기 마련이다. 사이버 모욕죄로 온라인을 통제하고 방송을 손아귀에 넣고, 사법권을 남용해 시민단체를 깔아뭉개려는 이명박 정부의 마음 속에 담겨 있는 깊은 공포심이 또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두렵다. 이 공포심에서 일제의 향기가 솔솔 올라온다.

참 사진 하나로 별 이야기를 다 꺼낸다.


▲위 글은 <경성, 사진에 박히다>(산책자)를 참조했다. 이 책은 사진 한 쪼가리를 가지고 '사진에 박힌 우리의 근대는 어떠했나?' 라는 물음은 근대의 기원을 찾으려는 속 깊은 작업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탐색해봄으로써 우리들의 '근대'를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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