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제민주화' 1년 결산



2008년 벽두에 나를 흔들었던 화두는 '경제민주화'였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명박 후보가 단지 '경제'라는 두 글자로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보고 치욕스러웠다.
그 두 글자는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의 수사였던 '경제'와 토시 하나 다르지 않았고, 키는 1cm도 자라지 않은 상태였다.
정치민주화를 제물로 한 경제성장은 먹고살기 바빴던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의 유예'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지금도 똑같은 '유예'를 요구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처음에는 주변 언저리부터 살폈다.
마침 좋은 소재가 있었다.
경제민주화와는 상관 없을 것 같지만,
경제민주화는 물론 민주주의 자체를 뿌리부터 위협하고 있는 '삼성왕국'과 '법률사무소 김앤장'은 벽두의 좋은 주제임이 틀림없었다.

 

사실 그 전에 <한국경제 새판짜기>와 2007년의 핵폭풍 <88만원 세대>를 교양수업처럼 들었던 터였다.
대선과 맞물리면서 김상조 교수(한국경제 새판짜기 공저자)와 우석훈 박사는 경제라는 화두를 바르게 피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세상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의미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즉, '세상이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잘못돼 가고 있으며, 바꾸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막연히나마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우석훈과는 그 후로도 계속 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석훈이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4부작을 최근에야 완결지으며,
<88만원 세대>(경제대안시리즈1부)에 이은 2,3,4부를 계속 쏟아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딴지일보 김어준에 의해서 <호러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나는 이 평가가 너무 희화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김어준은 우석훈에 나오는 등장인물(?), 즉 우리들이 죽거나 도태되는 현상 자체를 너무 피상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오늘도 수십 명이 짧은 생을 포기하고 한강물로 뛰어드는 생생한 현실을 '호러'라는 장르에 대비할 수 있을까.
'호러'라는 수식어는 우석훈이 그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표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실제 우석훈이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사람들이 죽어 떨어져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펑펑 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석훈의 지론에 '경제학'이라는 단어를 허락할 수 있다면 '감수성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그는 자칭 '비주류' 혹은 'C급 경제학자'이다.
경제학은 아무리 복잡한 수식을 동원해도 그 안에는 몇 개 안되는 명제들을 토대로 삼기 마련인데,
우석훈은 경제학의 토대를 존중하기보다는 토대 아래 쓰러져가는 형이하학적 경험치들을 일반화하고 수식화하는 데 골몰한다.
때로 많은 비약으로 인해 그의 주장이 결함투성이라는 판단이 들 때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도 그 못지 않게 감수성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보다.
전쟁으로 따지면 그는 '전사'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깝다. 그것도 눈물이 많은...


 
장하준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교양과목 삼아 읽었던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장하준, 한국경제의 길을 말하다>라는 책은 논외로 하더라도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통해 장하준의 '전사적 면모'를 만나게 되었다.

장하준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독특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일반 독자로서 그의 지론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는 '엘리트'이다. 그는 엘리트 경제정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급하게 말하면, 마치 박정희의 경제 책사 오원철(吳源哲)씨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화두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국가'와 '통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책'이라는 형식으로 수렴된다.

그의 주적은 '신자유주의'인데, 우리는 장하준으로 인해 '신자유주의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상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장하준은 '투쟁 의지'가 결여돼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는 '질서'가 투쟁보다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이룩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하준의 '사회적 대타협론'은 그의 '대 신자유주의 공세'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내공을 좀 더 쌓아 장하준, 우석훈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





요즘 대학원생, 직장인, 학부생, 휴학생들과 함께 마르크스 자본론 강독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일반독자로서 읽은 경제학 해설서들을 밑천 삼아 자본주의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평가받는 대 학자의 저서를 읽고 싶은 욕망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는다고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경제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 토대 하나 정도는 세울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뜻 있는 자에게 길이 보이는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세미나 공간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직장인, 학부생, 대학원생이 중심이 된 마르크스 강독회의 멤버가 되었다. 강독의 방식은 고전적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갔다.
일단 마르크스를 읽고 나서 옆의 멤버가 이를 요약하고 간사가 정리하고 나서 토론을 하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강독을 해야 한다"는 지인의 조언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였다. 

그들에게 우석훈과 장하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나의 천학비재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지 못했다. 이 점이 아쉽고 좀더 내공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경제학자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한 학생으로부터 '뉴 케이지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어서 인용한다.  

"그들이 현대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정확하고 마르크스를 넘어서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안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였다. 국가가 경제상황을 통제하고 분배를 해야 한다는 단순한 대안으로 하나같이 동일하게 수렴되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 역시 기업과 결탁할 수 있다는 참으로 현실적인 가설을 들이댄다면 그들의 입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는 자신의 논지를 종합해서 '투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세상만사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이치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찾기 위해서는 투쟁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정부조차도 투쟁을 통해 획득된 것이며, 투쟁의 반대급부로 복지와 인권이 수립되기 때문에 투쟁 의지를 놓으면 아무런 변화도 이끌 수 없다고 마르크스는 강력히 주장한다.

올해는 우석훈과 장하준의 담론에 흠뻑 젖으면서 두 경제학자를 한 이야기 안에 집어넣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심사와 관점 자체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둘은 쟁점의 여지조차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역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현실에 대해서 느끼는 좌절과 그에 비례하는 '애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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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1-1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런 글이 다음 메인(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2036495)에 올라갈 줄이야.. 정치하지도 못한 글이라 자면서 자꾸 후회했는데..다음 관리자가 나를 편애하는 듯 ㅋㅋ

2008-11-12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11-12 16:04   좋아요 0 | URL
오~ 선생님 ㅎㅎ
감사합니다. 머리 뒤쪽이 화끈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