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13일 홍대 근처 <상상마당>에서 김연수의 신작 소설 출간기념 낭독회(북살롱)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사운드트랙>이 있는 소설을 만났다. 북살롱에서는 자연스럽게 음악이 흘러나왔고 김연수는 여섯 쪽이나 되는 단원을 뭉텅이로 낭송하는 기술을 뽐냈다. (김연수 낭독회에서 들었던 음악이 듣고 싶은 독자들은 김연수 블로그에서 <아키라디오>를 클릭하면 된다) 독자들과 함께 한 낭독회는 시트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큰웃음'을 선사했다. 김연수는 남은 장작을 땔감으로 쓰듯 연변에서 품고 살았던 사진집과 자료집을 행운의 독자에게 선사했다. "소설이 다 끝났으니 제게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서요"라는 말과 함께. 선물을 받지 못해 아쉬운 독자들은 김연수의 목소리를 군불 삼아 '밤의 노래'를 되살리려 애썼고, 나는 지금 김윤아의 '야상곡'(夜想曲, 사운드트랙 두 번째 수록곡)을 들으며 다리 잘린 여옥이(김해연의 애인)를 회상한다. 
 


▲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린 예스24 북살롱에서 김연수는 신작 <밤은 노래한다>의 구절을 사운드트랙과 함께 낭독했다. 김연수는 독자와 함께 하는 낭독을 몹시 좋아한다. 낭독을 하면 시간이 잘 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1930년대가 아니었다면 등장할 수 없었던 인물


김연수의 신작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를 들고 나는 '1930년대'라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1930년대는 현대사에서도 잘 소개되지 않는 대목이다. 1930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대륙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들은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奉天; 현 瀋陽) 외각의 류타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32년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일본의 괴뢰국가(傀儡國家)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괴뢰국가 수립 이후 전방(동만, 즉 간도)과 후방(조선)의 항일연합투쟁을 두려워한 일제는 '간도(間島)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생단'을 창설해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조선인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했다. 때문에 항일 유격근거지 내에서 조선인이면 일단 민생단의 스파이라고 한번쯤 혐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간도 전역에서 민생단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민생단투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돼 최소 500여 명의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이 체포·살해되거나 도망가야 했으며, 많은 하부조직들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와 중국 공산당, 심지어 같은 조선인에게 공격을 받게 된 조선인들의 기막힌 사연과 그 잔인한 시간을 수진무구하고 별볼일 없는 청년 김해연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소설의 이야기틀이다.

김해연이라는 이름은 이상의 본명인 '김해'경과 본인의 이름 김'연'수에서 따온 거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김해연'이라는 관광가이드를 통하지 않고는 이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김해연이라는 인물이 별로 맘에 내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스펀지처럼 사랑에도 잘 젖고 혁명에도 잘 젖는 듯 보이지만, 반대로 두 가지 모두 제대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김연수는 "김해연이라는 인물은 바로 현대의 여러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최근 인기리에 상영되는 영화 <모던보이>의 이해명처럼 탄탄대로를 달리며 부르주아의 모퉁이에서 별 유감없이 살아가는 만철의 '드문' 조선인 기사로 일하며 '이정희'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정희가 사실은 중국공산당의 당원으로서 첩보활동을 하고 있는 요원이었던 것이다. '이해명'이 사랑한 '조난실'과 비슷하다. 조금 더 오래된 영화를 원한다면 <플래툰>의 크리스 신병처럼 젊은 시절의 번민을 이겨내기 위해 살점이 찢기고 나부끼는 전쟁터에서 적군보다 더 두려운 동료들의 전쟁을 견뎌야 하는 잔인한 운명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 사람(김해연)은 '아이'고 '소년'이다. 사랑을 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세상이란 원하는 대로 돌아가 주지 않는다. 그는 '아이'의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만나며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다." 김연수의 인물평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우리들'이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김연수는 1930년대의 다양한 인물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 국제주의자, 민족주의자, 친일파, 난봉꾼, '이상' 같은 아웃사이더 등 시대가 만들어낸 온갖 사람들이 살아가는 1930년대를 끝으로 김연수의 이분법적 사고와 결별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분법적 사고로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1930년대를 살아가는 '김해연'의 상황이다.  


▲ 소설을 쓰는 내내 품에 안았을 것 같은 사진자료집에 손수 사인을 해서 독자에게 선물했다. 김연수의 선물을 받은 독자 3명은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소설가가 애착하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내가 애착하는 사람은 고생고생하면서도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지도 못하고 누군가 기억해주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소설가는 이들의 인생에 묘하게 끌린다."

힘없는 약자와 기억될('기억할'이 아니라) 가치조차 없는 군상들을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소설가의 펜끝에서 되살아난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선망의 눈빛으로 본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역사책 속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역사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우리들은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 틈으로 소설이 들어온다. 소설은 역사가가 쓰기 싫어하는 것을 다룬다.

서금원의 바이올린은 실명하기 전 그가 만들었던 사제폭탄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그 가락에 맞춰 혁명가요를 부르며 학교 마당을 빠져나갔다. 지난 몇 주 동안, 반민생단 투쟁을 거치면서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던 태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들 날창 하나면 38식 보총을 가진 적군 10명쯤은 상대할 수 있다는 듯 기세가 동등했다. 박도만은 적이 찹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반면에 여옥이는 벌써 부녀대원 사이로 들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밤은 노래한다>, 256~257쪽

항일전설집에서 연길작탄(깡통에 탄약을 넣어 수류탄처럼 터지게 만든 폭탄)을 만들어 혁명에 큰 보탬이 되었다던 송원금의 화신인 서금원을 비롯해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보여준 우스꽝스러운 행동들과 넘치는 자신감은 꽤나 역설적이다. 작가는 매우 공력을 많이 들인 대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한 듯 자세히 설명했다.

"희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도 믿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만약 그런 것(혁명 따위)을 믿었더라면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무척이나 탐이 났다는 소설의 제목 <사랑하라, 희망없이>를 예로 들었다. 소설의 결말과는 별개로 이곳이 자신이 도달한 지점이라고 김연수는 고백했다. 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에 했지만, 소설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쓰는 동안 도대체 자신이 이 소설을 왜 써야 하는지 몇 번이고 되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못 상투적인 고백 하나를 더 보탰다.

"제 인생의 긴 나날이 이 책에 묻어 있어서 특히나 정이 가는 책이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이라는 둔탁한 팻말을 만들어 그것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로소 작품에 헛된 의미를 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애초에는 '현대사'나 '현실',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리는 소설가의 관점을 부여하려 하였지만,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어린애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김연수를 읽는다면 독자인 나도 어른이 될 방도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 몹시 침울하고 멍한 듯하면서도 한 곳을 분명히 주시하는 듯한 어두운 표정의 남자는 어린애에서 어른으로 가는 잔인한 여행의 길잡이 김해연이다. 김연수에 의하면 소설가 이상의 본명인 '김해'경과 작가 본인의 이름 '연'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이 소설을 집필하며 두 가지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믿는다'와'혁명'이라는 것은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