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리스 - 태양에 가까이 다가간 연인들
- 이카로스論




2000년 10대 소녀의 성적 각성을 위트 있게 그려낸 <팻걸>의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시선이 1835년 왕정복고시대의 프랑스 파리로 옮겨졌다. 영화 서두에서는 "잘난 신사와 귀부인들이 남몰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고 있을 무렵"이라고 소개되는데, 소설의 주인공 '발망이 아이들을 다 버려놓은 시대'(극중대사)다. ‘예술 포르노’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성적 상상력에 천착해온 감독에게 매력적인 공간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사랑'의 이미지를 획득했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서사논리에 합당하고 복장과 극본, 갈등구조, 조연들의 기여도는 놀랄 만큼 다채로운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이카로스 연애론이다.

이카로스는 유명한 신화 '다이달로스 이야기'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미노스 왕에 의해 크레타섬에 갇힌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이고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로 날아 탈출하였다. 이카로스는 새처럼 나는 것이 신기하여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채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태양열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에게해에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 모티브를 이용해 <미스트리스>의 그림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함에 빠지게 만든다. 사랑은 태양보다 강력한 인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태양에 실제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데, 실제로 그것을 감행하는 사람들은 이카루스의 후예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때문에 사랑에 관한 두 개의 언어가 그림 안에 펼쳐지게 된다.


▲ 유혹적인 미모와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벨리니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은 아시아 아르젠토

이카로스족은 사랑의 황홀함에 취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다. '늙은 정부'라는 의미의 미스트리스인 벨리니에게 화려한 아름다움과 나약한 여성스러움을 동시에 소유한 애인 마리니는 전쟁터의 말의 비유를 전하는데, 그것이 곧 이카로스 선언이다.

“전쟁터의 말은 대검에 얕게 찔리면 쾌감으로 느끼고 더 달린대. 그러다 심장까지 뚫리는 거지”

 


▲ 마리니 역을 맡은 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국내의류 광고에도 출연해 잘 알려져 있다.

 

<미스트리스>의 감독은 마리나와 벨리니를 이카로스 전설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벨리니를 가장 아름다운 스페인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시대상황이라는 제약에 국한하지 않고 15세기 팜므파탈 그리고 1900년대 중반 최고의 섹시스타 ‘리타 헤이우드’ 스타일을 입혔다. 페인 투우사와 이탈리아 공주의 사생아라는 이미지는 이카로스 선언을 끝간 데까지 몰고갈 만한 동력을 제공한다. 여성스런 외모와 섬세한 성격이지만 본능적으로 이카로스족의 피를 타고난 무일푼 신사 마리니 역시 연약한 모습뿐만 아니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불어넣음으로써 이카로스 전설을 완성시키는 한 축으로 설 수 있다. 벨리니를 얻기 위해 흔쾌히 결투를 벌이고, 벨리니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시도 등 일련의 저항은 이카로스 전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양념 역할을 한다. 그에게 강력한 남성성을 부여해준 장면은 역시 결투 장면이다. 결투장면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게 없지만, 결투에서 마리니가 보여준 순간적인 행동 하나가 남성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구체적인 장면묘사는 '스포일러'이므로 생략한다. 단, 영화에서 그 장면을 놓치지 말기를..

 

태양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고통과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아프지만 뿌리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이카로스는 결국 땅의 가장 깊은 곳까지 추락하고 말지만 그의 후예들은 태양을 꿈꾼다. 그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태양에 다가갈 수 없는 자들은 '말(言)'을 이용해 올라간다. 말로는 태양을 열 번도 더 넘게 오르락내리락할 수는 있다. 때문에 사랑의 실체보다 사랑에 관한 평판과 뒷담화가 성찬을 이룰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태양을 쬐고 사는 나라에는 이카로스족과 호사가가 무리를 이루어 산다. 호사가들은 태양에 가까이 갈 용기도 의지도 없기 때문에 대체로 이카로스족을 욕하고 공격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이카로스족을 욕해도 태양 자체를 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호사가들, 즉 당시 귀족들의 모순이 <미스트리스>에서는 매우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카로스족이나 호사가들은 크게 보면 결국 태양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태양을 쬐고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태양을 동경한다.

누구나 이카로스가 될 수는 없지만, 동경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카로스족이 땅속 깊은 곳까지 추락하기라도 하면 그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진다. 이제까지 퍼붓던 욕바가지는 모두 '찬사'로 옷을 갈아입는다. 즉 이카로스족을 제외한 태양나라의 주민들은 이카로스에 대한 질투와 동경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산다. 마음 속으로는 모두 이카로스처럼 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이카로스의 삶을 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카로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우리들의 욕망은 '용기(또는 비겁)'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통제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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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지독한 사랑, 미스트리스
    from 타인에게 말걸기 2008-08-06 23:40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본 영화예요. 미스트리스는 "늙은 정부"라는 뜻이라는데, 또다른 뜻은 새디즘의 지배와 복종관계에서 지배쪽의 여성을 뜻한다고 하네요. 제가 느낀 영화의 코드도 새디즘적인 것이었어요. 영화를 소개하는 내용에는 프랑스 귀족사회 이면의 숨겨진 사랑에 대해 그리고 있다고 하네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9세기 파리라는 시대적인 맥락이 중요하게 다가오지는 않네요. 영화는 그야말로 지독한 사랑의 이야기예요. 새디즘 같은 부류의 사랑은 경험..
 
 
smirea 2008-08-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영화 봤는데, 굉장히 새로운 접근이네요.^^
음, 저는 사랑의 정신적인 부분을 배제한 육체적이고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부분들에 대해
담고 있다고 보았어요. 그것은 동물들의 교미와도 비슷하리 만큼요.

아름다운 것은 곧 추하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트랙백 걸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