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에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던 <공공미디어연구소 포험>의 주제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의 도약이었습니다.
그때 블로거 자격으로 토론자로 초청돼 참석했는데, 동영상을 담아 왔습니다. 개념동영상으로 편집해 보았습니다.

동영상과 아래의 발제문에서 한겨레의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이 얻은 결론은 "한겨레와 경향의 내부모순과 신문시장의 학살적인 불법, 탈법 구조를 바로잡지 못하면 진보적 매체의 미래는 없다"였습니다.

여기서 지식채널e 파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겨레가 창간된 과정을 알지 못하는 독자가 이렇게 많았다는 데 대해서 한겨레기자들이 놀랐다는 점과, 경향신문은 그보다 더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기야 저도 서른 살이 되도록 경향과 한겨레를 알지 못했으니,
갈 길이 멀긴 먼가 봅니다.

토론자 중에 경향과 한겨레는 전국지가 아니라 서울의 일간지일 뿐이라고 지적했는데,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수찬 기자의 동의 하에 발제문 전문을 책갈피에 넣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원하시는 분들은 활용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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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전략으로서의 저널리즘 지향 >

- 진보 신문, 대중 신문, 고급 신문, 정론 신문 등의 활로를 중심으로

 

안수찬 <한겨레> 기자

 

※ 언론학을 전공하지 않아 관련 개념의 사용에 서툴고, 언론인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현실 파악에도 한계가 많습니다. 아래 글은 원활한 토론을 위한 화두를 던진다는 차원에서 편안하게 쓴 것입니다. 발제문의 품격에 어긋나는 구성과 표현에 대한 너그러운 양해 바랍니다.

 

 

■ 배제를 통한 성취의 정치 공학

 

청계천은 모든 면에서 ‘이명박 사태’를 독해하는 참고 문헌이다. 청계천 재개발(복원이 아니라) 사업 당시, 시민사회의 주요 부문 모두가 이를 반대했다. 환경단체, 문화단체, 역사학계, 영세 상인, 심지어 출퇴근 시민들까지 비판적이었다. 결국 시민사회 인사들은 ‘논의의 틀’ 자체를 깨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도 이명박은 이를 강행했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로서의 청계천 재개발은 연착륙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청계천 재개발의 폐해가 훗날 입증된다 해도 그것은 ‘평화의 댐’과 같을 것이다. 그 사업을 추진한 정권에게 위기의 요소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계천의 성공은 이명박의 차지이고, 그 실패는 포스트 이명박의 몫이다.

이명박은 청계천 재개발 사업에서 정치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 여론은 참고할 대상이지 수렴하여 반영할 대상이 아니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이성과 의지로 뭉친 영웅적 개인의 결단이지, 말 많은 자들의 훈수가 아니다. 여론을 수렴하는 ‘제스처’는 취해야겠지만, 중요한 결정권을 시민사회에 내주거나 그들에게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리더가 성취하면 그제야 뒷말을 그만두는 게 이른바 시민사회다….

이명박의 ‘의지’에는 피해의식과 소명의식이 결합돼 있다. 지난 10년간 핍박받았다는 생각,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겠다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그의 이념이 뉴라이트건 선진화담론이건 이런 논리 구성 방식 자체를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지적 능력을 낮게 보는 프로파간다에 나는 반대한다. 그는 다른 방식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의 리더십은 박정희 또는 노무현의 그것과도 닮았다. 박정희와 노무현 역시 피해의식과 소명의식을 겸비한 의지적 리더였다. 그들이 그러했듯이 이명박 역시 임기 마지막까지 ‘반대 여론을 배제한 뒤 뚝심 있게 추진하여 성과로 보여주면 역사 속에서 평가받을 것’이라 믿고 제 길을 걸어갈 것이다. 현행 대통령 직선 단임제는 이를 합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촛불 집회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 사태’는 앞으로 4년 6개월간 계속될 것이 확실하다.

넓은 의미에서 정부 수립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이 이러한 ‘철인 리더십’을 도모했다.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도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최근 촛불 정국이 특별해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88년 이전에 일어난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은 ‘사회적으로’ 입력돼 있지 않다. 그것은 70년대의 김지하에게 50년대의 한국전쟁이 결정적이지 않았던 이유와 같다. 2008년의 시민사회는 군사 정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대당은 90년대 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80년대식의) 일관되고 배타적인 저항이 아니라 ‘양면적이고 논쟁적인’ 어떤 것이었다.

문민정부 때는 기존 재야 세력의 일부가 정치권으로 편입돼 들어갔다. 국민의 정부 때는 사실상 재야 세력의 대부분이 국가 권력 및 그 주변에 자리 잡았다. 참여 정부는 ‘재야 세대’의 후배격인 386 세대를 흡수했다. 민주화 이후 각 정부는 재야 또는 시민 세력을 일정하게 포섭 또는 수렴했다. 각 정권의 위기 때마다 시민 사회 내부에는 옹호의 논리와 반대의 논리가 논쟁을 펼쳤다. 국가권력이 벌거벗은 채로 시민 사회 전체와 맞선 적이 없다.

그러나 이명박의 ‘의지적 리더십’은 시민사회 대다수 또는 전체를 일거에 배제하는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가 권력이 시민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국면에 대한 경험은 ‘기억 가능한 역사 공간 안에서는’(즉 1988년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중도개혁 정당이 소수 세력으로 전락하고, 진보정치세력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제도정치권 밖으로 밀려나고, 시민단체 활동이 불법화 되며, 노동조합이 탄압받고, 서민 대중이 광범위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는 사태의 동시적 발생은 ‘국가권력에 대당 하는 광범위한 재야’가 다시 형성되고 있음을 웅변한다. 광우병 쇠고기 협상은 그 재야에 불씨를 던진 대표적 사건일 뿐 그 전부가 아니다.

동시에 2008년의 ‘재야’가 80년대의 ‘재야’와 다른 점도 있다.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오늘의 ‘재야’는 과거만큼이나 광범위하지만,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다원성을 갖고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내장한 재야는 특정 국면에서 얼마든지 분화될 수 있다. 독재/반독재의 단일대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광범위한 반정부 세력의 형성, 그러나 단일/집중화되지 않는 의제(역량)’의 특성은 기존 시민/사회/노동 운동계는 물론 기성 언론에게 하나의 과제이자 도전이다. 운동권과 언론은 이런 문제를 접해본 적이 없다.

최근 촛불 정국을 둘러싼 <한겨레>와 <경향신문>(이하 한겨레/경향)의 궤적을 평가하기 위해선 이처럼 ‘과거에 겪은 듯 하지만, 실은 전혀 새로운’ 국가권력 대 시민사회의 전면적 대립의 국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공정과 균형, 대변과 주창

 

미리 밝히자면, 필자는 “모든 언론이 ‘주창 저널리즘’에 빠져 이념 전쟁을 치르고 있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언론은 없다”는 최근 일부 언론학자들의 의견에 반대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한국의 언론 특히 신문이 집합적으로 다뤄져도 좋을 만큼 동등한 의미에서의 ‘모든 언론’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주창 저널리즘은 그리 나쁜 뜻은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공정과 균형의 기계적 외피를 뒤집어쓴 객관 저널리즘을 비판하는 자세다. 대통령의 말과 서민의 말을 기계적으로 병립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통령의 말이 왜 틀렸는지를 깊이 취재해 기사로 입증하려는 자세다. 여기에서 ‘주창’은 기자 또는 매체의 책임 아래 진실을 확증하여 밝힌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진실 확증 과정에 이르기 위해 여러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고루 담는 취재윤리 차원의 공정성도 포함한다. 문제는 주창 저널리즘 자체가 아니라, 주창 저널리즘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진실의 주창’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마도 최근 제기되고 있는 비판 또는 성찰은 ‘정파 저널리즘’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정파 저널리즘은 ‘노사모’ 또는 ‘황빠’의 논리 구조를 따르는 자세다. ‘노무현이기 때문에’ 지지하고 보호하려는 자세다. 정파 저널리즘에는 진실 확증과 선악 구분을 향한 언론(인)의 의지가 결여돼 있다. 당연히 저널리즘의 적이다.

그들 언론학자들이 제기하는 비판은 아마도 촛불 정국에서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의 보도가 각각의 정파 저널리즘에 입각했다는 의심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중동은 ‘한나라당-보수 세력’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 변형하여 보도했고, 한겨레/경향 역시 ‘반 한나라-진보개혁 세력’을 위해 마찬가지의 행태를 취하지 않았느냐는 논리다.

대단히 뻔뻔한 기자들만이 이 비판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분을 다투는 취재 현장과 복잡하고 중층적인 신문 제작 시스템의 과정에서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눈으로 다뤄야할 모든 사실을 충분히 공정하게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각자의 내면에 자리한 정치 지향이 은연중 증폭되는 것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걸러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기자와 매체는 없다.

‘정도의 문제가 있다’고 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조중동은 ‘더 많이 왜곡’했고, 한겨레/경향은 ‘조금만 실수’했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즉 조중동은 ‘정파에 완전히 복무’했고, 한겨레/경향은 ‘정파에 큰 신경 쓰지 않았다’는 설명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대답의 논리 구조는 언론 윤리 차원에서 의미있는 자기 성찰일 수는 있어도, 최근 사태를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최근 두 달 동안 조중동이 시민사회 전체의 비판에 직면한 반면, 한겨레/경향이 새롭게 주목받은 이유를 공정/균형 보도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지난 두 달간 언론 시장, 특히 신문시장은 ‘기호 시장’에서 ‘정치 시장’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이 변화가 일시적인 것인지 장기적인 것인지가 한겨레/경향의 마케팅 포지셔닝의 핵심 변수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건 아니건, 바로 이 변화가 독자들로 하여금 한겨레/경향을 ‘새로 발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 드라이브에 대한 저항감을 정보/해석/관점의 수준에서 충족시켜줄 정치 매체가 필요했는데, 이를 한겨레/경향이 충족시켜준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시민들의 그런 저항감은 지난 20년 이래 가장 광범위한 것이었고, 그만큼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매체에 대한 갈증도 폭넓은 것이었다. ‘이명박 지키기’ 프레임에 돌입한 조중동의 보도는 이들이 느끼는 현실 감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시민들은 자신의 박탈감을 설명하고 대변하여 북돋아줄 매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난 10년간 ‘그런 신문이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로 하여금 한겨레/경향을 집어 들게 만드는 일이 생겨났다.

다시 말하여 한겨레/경향이 저널리즘의 차원에서 특별한 성취나 발군의 실력을 보여 ‘여러 신문 상품’ 가운데 차별적인 구매자 층을 형성했다기보다는 ‘기존 신문 상품’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심리의 결과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농심라면은 싫다. 매운 맛이 조금 떨어지면 어떤가. 삼양라면 먹겠다. 그렇다고 삼양라면이 건강에 좋으냐고? 그건 아니지만, 기왕 먹을 거라면 삼양을 택하겠다는 거지.’ 이 정서-논리 구조에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을 대입하면 작금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는 1988년 창간 당시, 그리고 1989년 공안당국의 탄압 시기를 빼놓으면, 가장 대대적인 독자의 환호를 접하고 있다. 경향도 비슷할 텐데, ‘독립언론’ 선포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광범위한 독자들의 성원을 목도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런 시민사회의 성원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한겨레/경향은 신문 시장에서 유력 언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이제부터다. - 과연 그럴 수 있을까? 2008년판 ‘광범위한 재야’는 앞으로도 쭉 한겨레/경향을 성원할까?

 

 

■ 진보적 대중지 vs 고급 정론지

 

한겨레는 창간 이래 중요한 내부 논쟁을 이어오고 있다. 여기에서 그 논쟁의 미세한 결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거칠게 보아 ‘진보적 대중지냐 고급 정론지냐’의 화두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화두에는 크게 네 층위의 논점이 있다. 첫째, 저널리즘의 자세다. 진보 지향을 강조할수록 진실의 확증과 명확한 관점의 제공이라는 ‘뉴 저널리즘’의 흐름과 가깝다. 정론 지향을 강조할수록 공정 보도와 객관적 태도 유지라는 ‘객관 저널리즘’의 흐름과 가깝다.

둘째, 타깃 독자층의 설정이다. 대중지의 지위를 강조할수록 서민대중(노동대중)을 주 독자층으로 상정하게 된다. 고급지의 지위를 강조할수록 화이트칼라를 주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게 된다.

셋째, 수익 창출 모델이다. 대중지의 지향은 신문 시장 점유율에서 최고 수준에 올라서는 이른바 ‘1등지’의 소망과 잇닿아 있다. 고급지의 지향은 점유율이 아닌 열독집단에서 차별화를 이뤄 광고/판매 가격의 차별화까지 성취하려는 구상과 관련이 있다.

넷째, 제 정파, 특히 진보 세력과의 관계다. 진보지 지향은 한겨레의 태생적 역할이 진보개혁 세력의 확대 발전 및 이를 통한 역사 발전의 기여에 있다는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정론지 지향은 국가권력은 물론 보수/중도 야당 및 진보 정치 세력에 대해 언론으로서의 중립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올해로 창간 20주년을 맞는 한겨레가 그동안 겪어온 질곡을 짧은 문장에 모두 담을 수는 없겠지만, 대단히 거칠게 정리하자면, 진보적 대중지의 지향에서 고급 정론지의 지향이 강화되는 궤적을 밟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각 시기별로 ‘진보’, ‘고급’, ‘정론’ 등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고, 각 세대와 사람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창간 무렵인 1988년, 한국 사회의 ‘진보’란 김대중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 창간 세대가 생각했던 ‘고급지’란 르몽드처럼 일체의 그래픽과 편집기교 없이 중후한 텍스트를 한 면씩 털어 넣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은 ‘타깃 독자층’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한겨레는 살아남아야 했고, 이 상품을 구독할 구매자와 이를 평가하여 광고를 실어줄 광고주가 필요했다. 그리고 결과론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겨레를 지켜준 것은 ‘서민 대중’이 아니라 ‘화이트칼라 중산층’이었다. ‘조직된 운동’(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이 아니라 ‘양심적 시민’이었다.

흥미롭게도 한겨레는 여러 신문 가운데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독자 비중이 가장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스스로를 ‘진보 또는 개혁 지향’이라 생각하면서도, 정치 국면에 따라지지 정당을 바꾸는 ‘이념적 가변성’이 높다. 지난 20년간 한겨레는 김영삼 지지자가 떨어져 나가고, 김대중 지지자가 떨어져 나가고, 노무현 지지자가 떨어져 나가도, 바로 이들 ‘이념적 중립 지대에서 다소 왼쪽에 있는 화이트칼라 중산층’ 덕분에 그나마의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창간 이래 한겨레 구성원의 절대 다수는 그 스스로가 한때 ‘운동 분자’였다. 그러나 입사 이후 일련의 신문 시장 상황을 지켜본 한겨레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조직된 운동’에 대한 실망감을 키우게 된다.

운동이 시민사회를 이끌고 시민사회가 ‘좋은 정당’에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구조 속에서 한겨레 정도의 언론이 적절한 중재자 또는 소통자 역할을 하는 시장 모델은 적어도 지난 20년간 이렇다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운동단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진보세력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태도는 취재윤리의 차원은 물론 시장 전략으로도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 20년간 일관되게 척박한 길을 묵묵히 개척했다는 높은 자긍심(아마도 이를 뒤집으면 자만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으로 뭉쳐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한겨레 사람들은 ‘조직된 운동’의 역량을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또는 어느 집단 및 세력을 ‘대변’하여 ‘주창’한다 해도 그들이 곧 이 신문의 지속적인 구독자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느낀 열패감이 없지 않다.

현재 한겨레는 ‘고급지’까지는 아니지만 ‘정론지’의 지향을 어느 때보다 벼리고 있다. 각 기사와 칼럼에 대한 한겨레 내부의 활발한 비판은 대부분 이런 잣대로 이뤄지고 있다. 어느 정치세력이 보더라도 신뢰할만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깊이 있는 관점과 비전을 함께 제시한다는 목표다. 민주 정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태도는 더욱 강화됐다. 그것이 무엇이건 정치세력의 특정 지향과 연관된 방식으로 언론 활동을 하여서는 신문 시장에서조차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한겨레는 지난 20년간 절절히 겪었다. 진보를 자처하는 ‘조직된 운동’으로부터 한때의 타박을 듣더라도 종국에는 언론의 새 표준이 되겠다는 정서 또는 열망이 무르익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을 확증하겠다는 ‘뉴 저널리즘’의 진정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고급지건 정론지건 권위지건, 지금까지 생산했던 뉴스와 질적으로 차별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조건이 있다. 바로 취재조직의 고급화/차별화다.

심층보도에는 돈이 들어간다. 우선 유능한 기자를 뽑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적절한 보상 구조를 갖춰야 한다. 개인의 헌신과 성실에 기대는 뉴스룸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기자들의 절대 수도 문제다. 200여명의 취재/편집 인력으로는 매일매일의 지면을 만들기에도 벅차다. 서구의 유력지 대부분은 1천여명 이상의 취재/편집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만큼 돈이 더 들어간다.

뉴스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필수적이다. 무선 전송이 가능한 노트북, 고화질의 디지털카메라 겸용 캠코더,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휴대폰 등 취재용 개인 장비는 물론, 체계적이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좋은 편집/디자인을 위한 시스템 구축, 원활한 인쇄와 배달을 위한 윤전/발송 체계 구축 등은 모두 돈의 문제다. 그리고 한겨레는 가난한 신문사다. 마음은 ‘전혀 다른 신문’에 가있는데 몸은 ‘20년 전과 똑같은 신문’에 머물러 있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금 마련이 관건이다. 국민주이건 후원금이건 모금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 시민사회가 모아줄 있는 돈은 최대치가 수십억원인데, 이는 중소 신문사의 한해 인건비 수준이다. 현재의 신문 가격을 획기적으로 높이거나 광고 단가를 대폭 인상하는 방법으로 투자금을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가격 인상에 따른 구독자 수 감소, 단가 인상에 따른 광고 급감 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일련의 ‘과도기’를 감내하면서 판매/광고 부문의 체질 개선을 선도할 수도 있겠지만, 줄잡아 2~4년 정도가 소요될 그 과도기를 버틸 운영자금 역시 부족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방식의 ‘뉴스룸 체질 개선’을 원활하게 시도할 수 있는 신문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밖에 없다.

여기에 한겨레, 그리고 경향이 처한 딜레마가 있다. 그리고 그 고뇌가 깊어질 무렵, 촛불 정국이 시작됐다. 광범위한 재야가 등장했다. 전혀 기대/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겨레/경향은 분명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진보적 대중지냐 고급 정론지냐’의 전통적 논쟁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조선일보의 성공 모델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 시장을 선도하는 유일한 성공 모델 - 조선일보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 한국 신문 시장에서 모범으로 삼을만한 유일한 모델은 조선일보다. 이 신문사가 전두환 정권 시절 여러 특혜 속에 대대적인 자본 투자를 이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 글의 주된 목적이 아니므로 생략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다음이다. 군사 정권의 특혜를 받은 것은 동아일보나 한국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을 배경삼은 중앙일보를 제외하면, 유독 조선일보만 90년대 이후에도 지속적인 사세 확장에 성공했다. 조선일보가 성공한 비결은 하나로 축약된다. 바로 ‘정파 저널리즘’이다.

한때 ‘야당지’라는 평가까지 들었던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일보는 70년대 이후 일관된 극보수 지향성으로 기사를 ‘정파적으로 소화하는’ 독자층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보수 편향적 정치지형이 크게 작동하긴 했지만, 시장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일보가 이를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입맛이 ‘학습’되듯이 소비 행태도 사회적으로 학습되는데, 조선일보는 한국 신문 독자의 절대 다수를 권력 지향적 뉴스에 길들여지도록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중앙일보는 이와 같은 ‘정치 신문 시장’을 버리고 새로운 신문 시장(아마도 자유주의적 화이트칼라 독자층을 타깃으로 삼은 ‘문화 컨텐츠 시장’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동아일보를 제치고 2대지로 등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 기대와 달리 조선일보의 옹성을 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매체의 변화에는 막대한 투자 자본을 인내하게 하는 삼성이라는 배경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 모델’은 다른 매체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대상이다.

조선일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겨레 역시 1988년 당시에는 ‘정치 신문 시장’ 패러다임에 기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87년 12월 대선의 열패감이 이 신문의 창간과 일간지 시장 진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정도와 파급력은 다르지만, 오마이뉴스의 탄생 역시 ‘노무현 신드롬’이라는 정치 언론 시장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 언론 시장은 대단히 정치 지향적이고, 결정적 국면에서는 정파 지향적이다. 이 구조에 편승하여 매체를 만들고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여러 언론이 정치 구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간 때의 기대와 달리 한겨레가 곧장 유력지로 발전하지 못한 일이나, 오마이뉴스/프레시안 등 이른바 대안 인터넷 매체들이 고전하고 있는 일 역시 정치 언론 시장 구조에서 비롯한 바가 있다. 2000년대 들어 정치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눈에 띠게 감소한 것이다.

조선일보 모델의 탁월함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정치 신문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여 사실상의 독과점을 형성한 뒤에는 ‘지속가능한’ 구매층을 창출하는 일에도 열성을 기울였는데, 언론-대학-정당-관료-기업으로 이어지는 ‘보수 담론 벨트’를 안착화시킨 것이다. 이에 비해 진보/개혁 진영의 담론 벨트는 지난 10년간의 민주정부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며 파편적이다.

앞서 한국 언론이 동등한 의미에서 ‘모든 언론’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 언론 시장, 특히 신문시장은 조선일보의 정치 신문 패러다임을 제대로 극복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 대당 또는 하위 개념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그 외곽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는 노력은 초기 자본의 한계로 인해 번번이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한겨레/경향에게 ‘촛불시민’은 어떤 의미일까.

첫째 시나리오 - 만약 촛불시민이 지난 20년간의 모든 시민적 저항을 뛰어넘는 거대한 정치적 역동성의 진정한 원천이자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면, 한겨레/경향은 이 국면을 통해 한 단계의 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의 지향은 정론지 또는 고급지라 할지라도 역동적인 정치 상황, 특히 시민사회 전체가 자신을 대변할 매체를 잃어버린 상황에서는 한겨레/경향이 거의 유일한 대체제다. 1988년 한겨레 창간 때와 맞먹는 에네르기가 지속된다면, 모든 문제는 아니어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적어도 신문 시장의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1만명의 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신문 발행에 따른 적자를 가중시키지만, 그 숫자가 10만, 20만이 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많으면 달라진다’.

두 번째 시나리오 - 촛불시민이 가진 광범위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그 다원성으로 인해 지속성을 담지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한겨레/경향이 촛불시민의 최초 모습에 대한 잔상을 갖고 정치적 역동성을 높이려 의도적인 프레임 형성에 나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론지, 고급지, 다른 신문 등에 대한 지향을 놓치고, 조선일보의 하위 프레임만 작동시키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는 ‘둠 시나리오’다. 촛불정국 때 얻었던 ‘신뢰할만한 신문’이라는 평판까지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필자는 촛불 정국 자체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쪽에 가깝다. ‘광범위한 재야’가 형성된 것은 맞지만, 이는 ‘조직된 운동’이 지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역량이 단일화/집중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특정되지 않는 ‘불만 대중’의 존재가 정치적 역동성으로 이어지려면 운동과 정당의 권위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어야 할 텐데, 현재 상황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지만, 한국 신문 시장, 특히 한겨레/경향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감’할 수밖에 없다. 비약적 발전이 가능할 조건이 형성되는 것은 어렵지 않나 한다.

 

■ 무엇을 할 것인가

 

한겨레/경향은 최근 두 달 동안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사회를 ‘정세적으로 대변’했다. 국가권력과 시민사회가 극단적으로 괴리된 상황에서 언론이 마땅히 해야할 일은 했다. 그런 점에서 공정보도의 규준으로 한겨레/경향을 조중동과 같은 반열에 올려 평가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보도의 기술과 취재의 기법에서 더욱 세련되고 완벽해야 하겠지만, ‘언론역사의 관점’에서 보아 한겨레/경향은 그다지 치명적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광범위한 재야의 지지와 호감을 얻었다. 이것이 한겨레/경향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이 대목에서 냉정한 시장 판단이 필요하다. 대대적인 자본 투자 없이는 중소 신문인 한겨레/경향이 조중동을 압도하고, 나아가 그들의 정파 프레임을 넘어서는 뉴스를 생산할 수는 없다. 이는 기자/매체의 성실성 또는 이념지향과는 무관한 문제다.

광범위한 재야가 일거에 그리고 압도적으로 한겨레/경향의 소비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현실은 그 반대다. 독자가 늘었지만, 이는 한국 신문 시장의 강고한 옹성을 넘어서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 조중동’ 패러다임은 한겨레/경향을 위한 보약일수는 있지만 일용할 양식은 아니다.

한겨레/경향의 지향을 진보정론지 또는 진보고급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때의 한겨레/경향이 구현해야 할 미래는 뉴스의 표준을 생산하고, 소외된 자들과 지속적인 연대를 형성하며, 심층 정보와 깊이 있는 해설을 제공하면서, 민주 시민 교육의 허브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분절화된 여러 매체를 각각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매체가 더 번성할 수 있는 ‘진보 매체 시장’을 창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장의 창출은 매체 개별의 시도가 아니라 각 언론사 및 시민사회를 가로지르는 연대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꿈꾸는 것은 거대하고 강력한 ‘참언론재단’의 형성이다. 권력과 기업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공 기금을 형성하고, 이 기금으로 뜻있는 신문, 인터넷 매체 등을 지원하면서 각 언론사의 규모를 키우는 동시에 이들간의 시너지를 유도하는 것이다. 중소 규모의 진보개혁 매체가 독자적으로 도모할 수 없는 규모의 경제를 공공 언론 재단을 통해 구현하는 구상이다. 오마이뉴스에 돈을 지불하고, 한겨레의 주주로 참여하고, 프레시안의 후원회원이 되는 열망을 집합적으로 모아 효율적으로 발현하는 계획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가 있다. 제 역할을 하려면 상당한 규모의 종잣돈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운영하는 절차도 마련해야 한다. 재단과 각 언론사의 관계 설정도 과제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재단의 형성을 통해 한겨레/경향에 새로운 동력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의 역동성 또는 정치적 격변에 기대어 조선일보와 함께 ‘적대적 공존’을 꾀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유력지의 반열에 오른 진보 또는 개혁 성향의 언론은 모두 80년대 이전에 시장에 안착했다. 초국적 미디어기업과 다양한 인터넷 매체가 탄생한 90년대 이후 신생 매체가 유력지가 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창간 초기에 규모의 경제를 형성하지 못한 한겨레/경향이 미디어 기술 환경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고 극보수 신문이 독점적 지위를 형성한 한국에서 유력지 반열에 올라선다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다. 적어도 일개 언론사 차원의 혁신 노력으로 이런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당장의 ‘대변’이 아니라 ‘지속적인 정론’을 원하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스스로 자본이 되고 시장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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