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전선과 세가지 시나리오

촛불의 전선이 '일상'으로 옮겨졌다. 쇠고기가 동네 정육점까지 들어오고 소비자의 판단에 촉각이 곤두섰다.

세 가지 길이 있다.
1. 동네 정육점과 고기집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매출이 활발할 경우 지금까지 정부의 논리가 맞았고 촛불을 들고 모였던 시민들은 불량세력으로 매도될 확률이 많다. 어느 식당 주인의 이야기처럼 광화문의 촛불이 대한민국의 민심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는 결과에 직면한다.
2. 적지않은 식당에서 쇠고기 관련된 상품 자체를 포기하는 것처럼 미국산 쇠고기와 한우 쇠고기가 동시에 몰락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는 쇠고기 자체에 대한 피로감과 논쟁에 대한 혐오감의 표출로 해석될 수 있다. 승자 없는 전쟁이다.
3. 한우농가의 어려움을 보듬어주고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심판을 내리는 현명한 소비자의 탄생이다. 가장 긍정적인 시나리오로 이명박 정부는 촛불에 담긴 민심의 엄정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이 일상의 전투에 비하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은 '워밍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제 국민들이 심판대 위에 올라갔다.


광고주 압박 운동과 식당 거부 운동

<죽음의 밥상>을 쓴 피터 싱어는 "이제는 식탁을 먹거리도 투표하듯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내 배를 채우는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식자재가 정당한 방법으로 생산되었는지, 비인간적인 과정을 통해서 동물을 학살하지는 않았는지, GMO 조작 식품 등 소비자에 대해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광고주 압박운동에 대입해 본다면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이 왜곡언론의 광고주인지 판단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상품에 대한 투표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용하는 식당에서 왜곡언론을 구독할 경우 그 식당을 거부하는 행위 역시 투표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광고주 압박 운동의 경우 상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넘어서서 기업에 대한 협박이나 영업방해까지 확대되었다는 검찰과 조중동의 논리가 궁색하기 짝이 없지만, 압박운동 측도 논란에서 벗어날 만큼 정교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회사 홍보부서에 전화를 해서 항의하거나 게시글을 남기지 못하는 대다수 일반 소시민에게 이 미션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식당'에 주목하는 이유는 '신문'이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식당에 들어가면 대개 널브러진 신문을 찾는다. 하루에 2~30명은 족히 된다고 할 때 어떤 신문이냐에 따라 여론의 왜곡과 확산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리 동네 식당들을 조사해본 결과 대체로 식당은 조중동 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 조중동에서 경향이나 한겨레 신문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얼마 전 식당 아저씨와 논쟁을 했을 때도 조선일보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언론소비자운동'에서 '식당'이 매우 중요한 전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동네 식당 조사하기와 식당 지도 만들기

우리 회사에서 자주 가는 식당 3곳을 조사했다.
A식당은 조선일보, B식당은 한국일보와 스포츠조선, C식당은 중앙일보와 일간스포츠를 구독하고 있었다.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회사 주변에 갈 만한 식당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조선일보를 구독한다고 해도 아예 발을 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만약 강경하게 소비자운동을 전개하고 싶다면 도시락을 싸고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조중동 구독 식당의 이용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도 언론소비자운동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식당에서 "어떤 신문을 구독하느냐"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식당주인은 압박을 받게 돼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주의할 점이 있는데, 식당주인을 설득하거나 어떤 신문을 구독하도록 강요한다는 인상을 풍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식당주인도 나와 같은 동등한 선택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요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그 식당의 출입을 줄이거나 거부함으로써 식당주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광고주 압박운동의 댓글까지 조사한다는 검찰이라고 하더라도 정당한 나의 권리에 대해 위법이라는 허울을 씌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광고주 압박 운동과 이 운동을 비교했을 때 '일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적인 차이이다. 우리는 대다수가 생활인이며 일상의 지배를 받는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것은 일상이 아니라 비상시라고 할 수 있고, 광고주 압박 운동 역시 비상시이다. 일상은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것이므로 촛불의 뜻을 펼치기에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공간이다.

이 운동의 포지티브도 가능하다. 광고주 압박운동은 조중동의 광고주 전화번호 등 정보를 공유해 압박을 하는 것이지만, 경향이나 한겨레 등 정론매체를 구독하는 식당의 목록을 공유하는 것은 위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조사해서 정론매체를 구독하는 곳을 공유하고 이 식당을 이용해준다면 다른 식당주인들이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식당과 조중동의 오래된 침묵의 카르텔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이러한 캠페인에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이것이 포지티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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