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저의 미션은 토론입니다. 발제는 말그대로 제멋대로 한 것입니다.
저도 준비를 갖추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침 10시 반부터 시작이기 때문이죠.
피드백을 포함한 후기는 추후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진보를 넘어서 진화매체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 지방, 약자, 일상, 문화로 살펴본 정론매체의 쇄신 방향

승주나무 (블로거)



 

※ 글에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 이명박과의 한판승부에서 승리하면 민주주의가 회복될까?
- 조중동을 응징하면 언론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이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싸움에 대한 무용론이 아니라, 전선을 가다듬고 좀더 넓혀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이다. 현재 싸움의 국면은 국지전이 되었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다. 

■ 정동영 학습효과


정동영 전 장관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가 실패하는 과정과 사례 자체가 정론매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정동영 전 장관이 두 번에 걸친 선거 패배의 쓴잔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갔다. 가는 길에 그는 “BBK에 함몰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소회했다. 다시 말해 정동영 후보는 줄곧 이명박 후보의 프레임 안에서 놀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대 후보의 광고를 해주는 격이 되었다. 가장 뼈아픈 실책은 그 다음이다. 선거 때 거쳤어야 할 중요한 검증의 기회를 날려버린 점이다. 대등한 대결로 몰고 가지 못하고 애초부터 엄청난 표차로 승부가 갈릴 것이라는 정황이 여기저기 드러나면서 맥빠진 선거, 맥빠진 검증이 되었고,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이 오만과 독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자기모순 사례. 선관위 공식 방송토론 때 정동영 후보는 “함께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수치다”는 말로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정 후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 수치스럽다면 토론회장을 나가거나 애초부터 거절을 했어야 하지만,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TV 토론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 후보의 장점이자 단점인 젠틀맨십과 겸손이 도덕성을 절대적 가치로 보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도덕성이 현실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한계를 파악했다면 선거전략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것을 정론매체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정론매체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조중동, 정부에 대한 반박 내지 네거티브를 논조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프레임에 빠져 있다. 정동영이 빠졌던 바로 그 자리다. 앞서의 두 가지 질문도 지금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네거티브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프레임을 따르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수세적인 위치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수세적 위치에 있다는 것은 5:0으로 지고 있는 팀이 남은 시간을 버텨내는 것처럼 고단한 과정이다.

그 다음은 자기모순이다. 조중동과 정론매체가 강자 대 약자라면, 정론매체 역시 그보다 약한 자들 앞에서 강자로 군림하지는 않았는지 자기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비율의 삼각형과 같이 조중동 삼각형과 정론매체 삼각형, 그리고 더 작은 삼각형이 비례관계에 있지 않은가.


셋째는 진보나 정론에 대한 집착이다. 이런 가치들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자기단련을 통해 구체화시키고 일상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송영승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경향은 지난 몇 년 동안 신문의 질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악전고투해고, 오피니언 리더로부터 이를 인정받은 바가 일반 독자에게 확산된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만 옳다. 시민들은 경향과 한겨레의 ‘일관된 악전고투’를 인정해 지지를 보냈지만, 이를 통해 아직 경향과 한겨레가 달성하지 못한 ‘진화된 매체’에 응원을 보낸 것이다. 정론매체는 당연히 이번 기회를 정론매체 도약 원년으로 삼고 현재의 모습을 재정비하고 국민이 진짜 원하는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어쩌면 조중동과의 싸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다. 


정동영과 정론매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다. 정동영의 경우는 선택의 순간이 분명했으나, 정론매체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언론의 새로운 문법이 절실한 시점이다. 


■ 지방, 약자, 일상, 문화

물리적인 의미의 ‘촛불’은 사실상 역할을 다했다. 현재는 촛불의 중대고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다른 에너지로 분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촛불 쓰나미’를 대면할 지도 모른다. 촛불 쓰나미에 대한 우려는 지식인 사이에서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정론매체의 데스크와 만난 자리에서 ‘촛불’을 맹신하지 말 것과 과다한 지면을 자제할 것, 촛불이 가져올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를 할 것을 요청했다. (후마니타스 관계자)

정부와 여당 등 키맨들이 두 달 동안 굳히기에 들어가면 촛불 시민들의 좌절감이 커질 수밖에 없고 무력감으로 인해 전보다 더 정치혐오감에 빠질 우려는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그 순간이 되지 않도록 시민사회와 정론매체가 사력을 다해야 하겠지만, 여론을 책임지는 매체라면 냉정하게 시뮬레이션해볼 필요가 있다. 

지방, 약자, 일상, 문화는 촛불이 분화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이자 정론매체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네 개의 키워드는 하나의 본질에 대한 다른 얼굴일 뿐이다. 



① 지방


신문을 펼쳐 들면 ‘지방면’이라는 게 나온다. 지방면을 ‘국제면’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느 것을 먼저 읽고 싶을까? ‘국제면’은 관심도가 높기 때문에 발췌 수준의 보도만으로도 열독률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면은 다른 접근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매체의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경향신문의 경우 30면 내외의 지면 중에서 1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나마 하단광고를 제외하면 신문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내용인데, 나도 급할 때는 전국면을 ‘pass'할 정도로 전국면은 2등면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전국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구색맞추기로 기사를 배치하는 것에서 무슨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까? 전국면에 대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국면’ 자체를 없애고, 지면의 이슈에 따라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최소한 가독률을 높일 수 있다. 경향신문의 경우 1면에 ‘책읽는 경향’을 배치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결단과 창의력을 ‘전국’에 할애해야 한다. 지방지나 지방문제에 대해서 정론매체는 자신들에 대해서 조중동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의 모습은 중앙과 지방이 엄존하며, 지방은 필연적으로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중앙’의 위상을 가지고서는 ‘더 큰 중앙’에 맞서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중앙과 지방의 약자연합군이 절실한 상황이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하면서 전국의 시민기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 지방의 시민기자에 의하면 토호세력과 기득권 언론이 결합해 이권을 독점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풀뿌리이지만, 현재 지방의 풀뿌리는 빈사상태에 놓여 있다. 지방언론사는 인건비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최소생계비에 가까운 봉급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쯤해서 지방과 중앙의 협력모델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일종의 뉴스연합을 이루어, 지방언론은 부족한 코텐츠(책이나 문화 등)를 중앙으로부터 지원받고, 중앙은 지방언론으로부터 지방의 주요 뉴스를 제공받는 식이다.
지방지의 역시 중앙과 관계를 맺으면서 상호 소통하고 자극을 받을 수 있고, 중요한 현안에 대한 취재지원 등을 통해서 지방의 여론이 건강질 수 있다. 

중앙 대 더 큰 중앙의 대결은 소모전 양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승패도 없고 지리한 공방만 반복되는 구조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협력모델은 ‘작은 승리’를 조금씩 축적해나가는 구조다. 지역의 상황에 맞게 협력하면서 필요하다면 통폐합을 하고 경영을 탄탄하게 만들 수도 있다.


※ 얼마 전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 누리꾼들이 의견광고를 게재했다. 누리꾼들은 전국에 분포돼 있었는데, 정작 신문이 나오자 지방의 누리꾼은 경향신문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에서 우편으로 우송해줄 정도로 유통망이 시원치 않다.

나 역시 제주 출신으로 경향신문의 존재 자체를 깨닫는 데 3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때문에 ‘신문유통원’에 상당히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경과를 보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차라리 지방의 독자들이 촛불을 들어야 할 판이다. 지방 독자의 읽을 권리를 촉구하고 정론매체를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특집으로 다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 작은 승리의 사례가 몇 가지 있다.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일자와 2007년 7월 1일자에 각각 조그마한 승리가 보도되었다. 2007년 7월 1일자에는 전라선 열차의 배차의 부당함에 대한 제보에서 출발하는데, 전국의 배차 시간표를 분석해 전라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고 끝내 2008년 1월 1일부터 2대의 증편을 이끌어냈다. 열차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불편이 작은 기사 하나로 해결된 것이다. (오문수 시민기자)

2008년 8월 1일에는 용산구청 관할인 봉래초등학교(손기정체육공원 부근) 앞 육교 상하행선에 보통 어른 키보다 높게 광고판이 설치된 이유로 육교가 마치 감옥 같이 답답했다. 나는 복수의 관할 구청 담당 공무원을 상대로 취재하고 자료를 검색한 끝에 2008년 3월 21일에 개정되고 올해 7월 1일 시행된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과 2002년 1월 1일에 개정된 <서울특별시 육교사용료 징수조례>에 관련 규정이 나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토대로 고발기사를 작성한 끝에 육교의 광고판을 모두 걷어낸 사진 한 장을 얻을 수 있었다. (오승주 시민기자)


② 약자

부자신문은 부자와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지만, 정론매체는 약자들의 빼앗긴 권리와 이익을 되찾아줄 의무가 있다.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볼 시점이 왔다. 한겨레의 안수찬 기자는 발제문에서 “2008년판 ‘광범위한 재야’는 앞으로도 죽 한겨레/경향을 성원할까?”라고 썼지만, 이 질문을 바꿔서 “2008년판 한겨레/경향은 광범위한 재야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혹은 “광범위한 재야에 다가간 걸까?”로도 바라보아야 한다. 


일반 독자는 대표적인 약자이다. 일반 독자에게 정론매체는 언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정론매체는 일반 독자와 시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정세적으로 대변한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거나 그들에게 지면을 허락하는 데 상당히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사례가 있다. 나는 현재 시사IN 독자편집위원장(정확히는 ‘준비위원장’) 자격으로 매주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앞으로 한 달 내에 시사IN에서는 언론사에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비록 온라인에 국한돼 시도되는 일이지만, 홈페이지에 올라간 기자들의 기사 절반을 털어낼 것이다. 그 자리에는 ‘독자들의 목소리’를 담을 것이다. 독자들의 기사는 기자들의 기사와 동등하게 다뤄지고, 기사에 대한 비판은 기사 바로 밑에 달린다. 얼핏 보면 오마이뉴스를 연상할 수 있는데, 오마이뉴스에서 부족한 것이 전문성과 정제된 언어라면 시사저널 시절부터 리라이팅 훈련을 받은 시사인의 기자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고 시사인을 실질적으로 일으켰던 숨은 고수들이 시사인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것이다. 시사인은 현재 정치 편향적이고 나이가 들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분명 이것은 모험이며 상당한 진통과 논란이 예상된다. 한겨레에서 ESC를 만들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언론이란 본래 까칠까칠한 사람들의 잔치판이므로, 논쟁의 한가운데서 자기 포지션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③ 문화

삼성사태로 우리가 배운 것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결합돼 가공할 만한 무기가 돼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법, 언론, 정계를 모두 장악한 거대자본에 맞설 수 있는 힘은 문화에서 나온다. 거대자본과 부자신문의 천박성은 문화의 역습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향신문의 주간지 뉴스메이커는 2006년 12월 12일 법률사무소 갬앤장에 관한 취재를 보도한 적이 있는데, 김앤장의 협박에 못 이겨 급기야 사과를 포함한 굴욕적인 정정 보도를 내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정 보도문의 마지막 문장은 기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오랜 상처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본지의 제목 ‘김앤장은 론스타게이트의 숨은 목통?’과 본지에 실린 일부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발언은 주장이라는 것을 밝혀드립니다.”


경향신문은 이후로 김앤장 보도에 대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는데, 경향신문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에서 김앤장에 대한 비판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법률사무소 김앤장>이라는 책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기대 김앤장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다룰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책의 형태로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언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언론과 출판의 활발한 교유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은 언론과 출판 교유의 독특한 모델로 남아 있지만, 순수하게 언론사에서 주도한 단행본이 출판시장에서도 평가를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후마니타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북), <ESC>(한겨레출판)이 그것이다. 물론 기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도 분명하지만, 시행착오를 자산으로 출판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줄 것을 주문한다. 


현재 인문과 사회 등 교양서적은 처세, 자기계발 등 신자유주의류나 문학류에 밀려 매우 궁색한 처지이지만, 특별한 돌발변수가 없는 한 독자들은 4년여의 시간 동안 많은 학습을 하게 될 것이다. 출판계에서는 5년 이후에 열릴 새롭고 건강한 시장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크다.

정론매체는 기사 기획 단계에서부터 출간 계획과 시스템을 정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책을 많이 팔아 이익을 남기자는 말이 아니라, 신문보다 책으로 소비하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거나 책을 언론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시사저널 사태의 정면에 뛰어들어 언론소비자운동에 매달렸지만, ‘언론’의 한계를 절감했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인스턴트’이기 때문에 시류를 좇을 수밖에 없고, 휘발성이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언론의 신속성과 출판의 지속가능성이 결합된다면 정론매체는 한 차원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 글을 끝내며 -
진보를 넘어서 진화매체로

한겨레 ESC 매거진을 보거나 책 <ESC>를 보며 당혹해하는 독자라면 그의 이름은 ‘보수’일 것이다. 얼핏 보면 조중동의 주말판을 연상케 하지만, 한겨레의 고민이 담겨 있는 콘텐츠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겨레의 고경태 ESC 매거진팀장은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가 마련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대놓고 ‘한겨레 독자들은 보수적’이다고 말했다. 이때 보수란 ‘진보를 고수’하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진보는 실력이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때 진보란 ‘진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386이 보여준 흐름을 거칠게 표현한다면, 즉물적 저항에 매진한 단련되지 못한 끓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87년의 승리 이후에 2차 목표를 설정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났다. 생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품었던 가치를 버리고 배반을 택한 경우다. 이들은 결국 우석훈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88만원세대, 177~178>


나머지 한 부류는 ‘가치’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데, 가치에 몰두한 나머지 ‘보수’가 돼 버렸다. 고경태 팀장은 고객의 소리에서 보수주의자로 추정되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민원을 들었다고 한다. 


“ESC는 아무래도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36.5도시가 좀 나았지 않나. 그런데 딸내미는 좋아하더군. 열심히 신문 보면서 볼펜으로 답을 쓰더라니까”

멈춰 있는 진보는 이미 보수다. 보수도 진정한 보수는 아니고 어중간한 보수다.
비유하자면 진보는 강물에, 보수는 강둑이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 생명을 촉촉이 적셔주지만 보수는 강물이 범람해 생물에게 해를 주지 않게 버팀목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에는 현재 진보도 보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립은 지긋지긋하다. 발랄한 창의력으로 무장한 진화매체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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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1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