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이에스시 - 일상 탈출을 위한 이색 제안
<Esc>를 만드는 사람들 엮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노는 게 '전쟁'이군




갑자기 임권택 감독의 1997년작 <노는 계집 娼>이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제목에 '놀다'는 말이 있지만, 정작 노는 계집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던 영화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놀아나는 계집'이라고 몰래 써놓았다. '재미', '논다'는 것은 한켠에서는 재미 없는 일이기도 하고, 재미를 위해서 재미를 희생하는 싸늘한 냄새도 난다. 재미를 위한 책에 <창>을 붙인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한다.
'재미'에 대한 7인7색을 보면 고경태 편집장은 "그저 '재미'"를 김은형 기자는 "노는 게 전쟁이군"를 주장한다. 나에게 한표를 하라면 후자에 던지겠다. 김중혁 소설가도 결과의 명사가 아니라 과정의 명사로서 "그냥 재미로"를 말하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닿기가 쉽지 않아서다. 재미는 창조이기 때문에 녹록치 않다. 재미없는 인간들이 재미 없는 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유머나 농담의 기술을 한동안 익히려고 설쳐댔던 적이 있었는데, 정곡을 찌르는 유머 한마디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단숨에 녹여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할 때 '말 한마디'는 '농담'일 거라고 확신한다.

ESC는 나에게 별세계다. 촌놈이라서 더욱 그렇다. 도시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책을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촌놈이 읽기에는 재미의 벽이 단단하다. 하지만 재미에 대한 역발상은 충분히 매콤한 맛이 있었다. "하늘의 출입구 공항 사귀기"는 인천공항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얼마 전에 일본에 가려고 인천공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책의 내용과 같아서 정말 재미있었다. 주방에 대한 이야기도 나를 환기시켰다. "주방은 집안에 펼쳐진 캔버스다."(232쪽) 이 말은 얼마나 멋진가. 주방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을 만한 매력적인 화두다.

중간에 분명히 ESC를 눌렀을 만한 부분이 자주 걸렸지만, 나는 ESC를 누르지 않고 드레그를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새로운 세계를 소개해준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니까.



재미를 강요하는 수도권 거주자를 위한 지능형 광고?


이번에는 이 책에 대해서 좀 까칠한 인상을 담으려고 한다. 너무 까칠해서 악플 수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겸손하게.. 이 책이 '재미'를 표방하면서 거기에 제대로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재미가 들어가는 핵심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고경태 편집장은 재미론에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전우익 선생의 책을 가리키며'여민동락'(與民同樂)을 표방한 듯 보였지만, 실제 재미의 기록들에 가서는 그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었다고 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여민동락의 핵심은 나와 너와 우리일 텐데, 이 책에는 '나'보다는 '유행'이라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쓴 듯 보였다.
<홀랜드 오퍼스>(1995)라는 영화에서 클라리넷을 부는 거츄드 랭은 클라리넷을 참 재미없게 분다. 홀랜드는 그 점이 못마땅해 재미를 일깨워 주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재미를 주기 위해서 악보를 던져버리고, 형편없는 밴드의 멋진 음악을 들려준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머리색을 닮은 저녁 노을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 거츄드 랭이 재미를 찾는 과정이다. <ESC>에서 그런 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를 동반하지 않는 재미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외'를 만들지 않을까? 기자들이 열심히 나를 멋진 곳으로 데려다주기는 하지만 내가 함께 해볼 만한 것을 찾기가 현실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쯤 되면 '미를 위한 조건'을 강요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ESC의 연재가 다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쇠똥 냄새 나는 시골 판 ESC가 나오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다음은 지능형 광고 논란이다. 책의 내용이 '소개'다 보니, 소비자보다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그보다는 광고주의 입장에서 서술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돈 없이 즐기는 것은 많지 않고, '소비 친화적'인 내용이 많다. ESC 매거진의 색깔이 이와 같으면 할 수 없지만, 좀더 소비자의 입장에서, 또는 비소비의 입장에서 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돈 없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거 없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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