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렇게 글을 전투적으로 써야 겠다.
박지원의 글을 좀처럼 볼 시간이 안 된다. 만사 접고 푹 빠지고만 싶다

 

연암 박지원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아마도 병법을 알았던 것인가.

 

   글자는 비유하면 군사이고, 글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敵國)이고 전고(典故)와 고사는 전장의 보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묶어 문장을 만듦은 대오를 편성하여 행진하는 것과 같다. 음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文彩)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烽火)에 해당하고, 비유(譬喩)는 유격병에 해당하며, 억양 반복은 육박전을 하여 쳐죽이는 것에 해당하고, 파제(破題)를 하고 결속하는 것은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사로잡는 것에 해당한다. 함축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사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무릇 장평 땅에서 파묻혀 죽은 조나라 10만 군사는 그 용맹과 비겁함이 지난날과 달라진 것이 아니고, 활과 창 들도 그 날카로움과 무딘 것이 전날에 비해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염파가 거느리면 적을 제압하여 승리하기에 충분했고, 조괄이 대신하면 자신이 죽을 구덩이를 파기에 족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군사를 잘 쓰는 장수는 버릴 만한 군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이것저것 가리는 글자가 없다.

 

   진실로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호미ㆍ고무래ㆍ가시랭이ㆍ창자루를 가지고도 굳세고 사나운 무기로 쓸 수 있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훌륭한 깃발의 정채를 띠게 된다. 진실로 올바른 문장의 이치를 깨치면 집사람의 예삿말도 오히려 근엄한 학관에 펼 수 있으며, 아이들 노래와 마을의 속언도 훌륭한 문헌에 엮어넣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문장이 잘 지어지지 못함은 글자 탓이 아니다.

 

   자구(字句)의 아속(雅俗)을 평하고, 편장(篇章)의 고하(高下)만을 논하는 자는 실제의 상황에 따라 전법을 변화시켜야 승리를 챙취하는 꾀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하지 못한 장수가 마음속에 아무런 계책도 없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면 견고한 성을 맞닥뜨린 것과 같다. 눈 앞의 뭇과 먹이 꺽임은 마치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놀라 기세가 꺽인 군사처럼 될 것이고, 가슴속에 기억하면 외던 것은 마치 전장에서 죽은 군사가 산화하여 모래밭의 원숭이나 학으로 변해버리듯 모두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논리를 잃고 요령(要領)을 깨치지 못함을 걱정한다. 무른 논리가 분명하지 못하면 글자 하나도 써내려가기 어려워 항상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깨치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면서도 오히려 허술하지 않은가 걱정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항우가 음릉에서 길을 잃자 자신의 애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과 같고, 물샐틈없이 전차로 흉노를 에워쌌으나 그 추장은 벌써 도망친 것과 같다.

 

   한마디의 말로도 요령을 잡게 되면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돌격하는 것과 같고, 한 조각의 말로써도 핵심을 찌른다면 마치 적국이 탈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저 공격신호만 보이고도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과 같다. 글짓는 묘리는 이렇게 하여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이 우리나라의 역대 과거문장을 모다 열 권짜리 책을 만들고 이름을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여기 수록된 글들은 마치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승리를 거둔 병사와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문체와 격식은 다르고 정밀함과 조잡함이 섞였으나 모두 승리할 비책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날카로운 창과 예리한 칼날은 무기고같이 삼엄하며, 시기에 따라 적을 제압함은 군대를 지휘하는 묘리에 부합한다. 이를 계승하여 문장을 지을 사람은 모두 이 길을 따르리라. 반초가 서역 50여 국을 정복한 것이나 두헌이 연연산에 전공을 개신 것도 그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옛 전법을 흉내내다 실패하는 수도 있고, 옛 전법을 역이용하여 승리를 얻는 경우다 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전법을 구사하는 것은 또한 그 시점이 중요한 것이지 고정된 전법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 騷壇赤幟引

 

 

 

소단적치인 : 引은 문체의 명칭으로 序와 마찬가지이다. 소단적치라는 책에 붙인 서문이란 뜻이다. 소단은 원래 문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과거 시험장을 가르킨다. 적치는 한 나라의 한신이 조 나라와 싸울 때 계략을 써서 조 나라 성의 깃발을 뽑고 거기에 한 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세우게 하여 적의 사기를 꺽어 승리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범이나 영수의 비유에 쓰인다. 요컨대 소단적치란 과거에서 승리를 거둔 명문장들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이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 운치)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이란 봉화요, 비유한 유격(游擊)이요, 언양반복(抑揚反覆)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요, 파제(破題 첫머리에서 시제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요,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요, 여운을 남기는 것이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무릇 장평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적과 다르지 않고 활과 창의 예리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괄이 거느리면 자멸하기에 족하였다. 그러므로 용병 잘하는 자에게는 버릴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만나면 호미자루나 창자루를 들어도 굳세고 사나운 병졸이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 끝에 매달더라도 사뭇 정채(精彩)를 띤 깃발이 된다. 진실로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면, 하인들의 상스러운 말도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잇고 동요나 속담도 고상한 말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능숙하지 못한 것은 글자의 탓이 아닌 것이다.

 

   대저 자구가 우아한지 속된지나 평하고 편장의 우열이나 논하는 자들은 변통의 임기응변과 승리의 임시방편을 모르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스럽지 못한 장수가 마음에 미리 정해 놓은 계책이 없는 것과 같아서, 갑자기 어떤 제목에 부딪치면 우뚝하기가 마치 견고한 성을 마주한 것과 같으니, 눈앞의 붓과 먹이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먼저 기가 질려 버리고 가슴속에 기억하고 외우던 것이 모래 속의 원학(猿鶴)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글 잘 짓는 자는 그 걱정이 항상 스스로 갈 길을 잃고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무릇 갈 길이 밝지 못하면 한 글자도 하필하기가 어려워져서 항상 더디고 깔끄러움을 고민하게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얽어매기를 아무리 튼튼히 해도 오히려 허술함을 걱정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오추마가 달리지 못하고, 강거가 겹겹이 포위했지만 육라가 도망가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기를 눈 오는 밤에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하니, 글을 짓는 방도가 이정도는 되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친구 이중존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고금의 과체(科體 과거 시험에서 보이던 여러 문체의 글)를 모아 10권으로 편집하고 그 이름을 『소닥적치』라 했다. 아! 이는 모두 승리를 얻은 병졸이요, 수백 번의 싸움을 치른 산물이다. 비록 그 격식이 동일하지 않고 정교한 것과 거친 것이 뒤섞여 들어갔지만, 각자 승리할 계책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가 있다. 그 예리한 창끝과 칼날이 삼엄하기가 무기고와 같고, 때에 맞춰 적을 제압하는 것이 늘 병법에 맞는다.

 

   앞으로 글을 하는 자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정원후의 비식과 연연산에 명을 새긴 것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인저, 여기에 있을 것인저! 비록 그렇지만 방관의 거전은 앞사람의 자취를 본받았으나 실패했고, 우후의 증조는 옛법을 역이용하여 승리했으니, 그 변통하는 방편은 역시 때에 있는 것이요, 법에 있지는 아니한 것이다. (法 ⇔ 時)

 

   붓과 먹이 날카롭고 글자와 글귀가 날고 뛴다. 이야말로 문예계의 염파와 이목이라 하겠다.

 

   세상의 이른바 '글제를 고려하여 거기에 꼭 들어맞게 지은 글'이란 것으로 과거를 위한 글을 짓게 되면, 납이 섞이고 철이 섞여서 겉으로는 마치 정련된 것 같지만, 속을 보면 실을 참작해서 관대히 보아줄 곳이 있다. 진실로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꼭 들어맞도록 하여 한 글자도 겉도는 말이나 두서없는 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 중에서도 상승일 것이다.

 

   주제를 결정하여 글을 엮기를 『울료자』에서 병법을 말할 때나 정불식이 군사를 출동할 때처럼 한다면 당연히 공령문의 상승이 될 것이다. 편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심복하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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