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과 막걸리정치라는 말이 한때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적이 있었다. 산업개발 초기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도 역시 유아기였는데, 이때 여당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고무신과 막걸리를 제공하면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유혹했다. 이때부터 선거라고 하면 항상 '경품'을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도 그 어린 나이에 "이번 선거에는 뭐 받아 올거야, 엄마?"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품- 이를테면 빨래비누나 플라스틱 바구니 같은 것-을 제시한 후보에게 관심을 보였고,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치' 대신, 유권자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고민했다. 현대사의 부끄러운 페이지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귀엽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서울 한복판에서 공당이라는 것들이 공공연하게 대규모사기극을 벌였고, 서울을 책임지는 사람은 이 범죄에 발을 담갔다 놨다 하면서 슬슬 약올리는 행동을 했다. 선거도 다 끝났는데, 또다시 '말의 함정'이 자꾸 만들어지고, 말의 안개가 자꾸 생긴다. 이미 총선에 대한 재신임 선거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입건자 중 당선자가 46명이라고 하니 이 중에서 얼마나 많은 티오가 생길지 기대해도 좋다. 이것을 '재보궐선거'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규모가 몹시 커서 '미니총선'이라고 할 만하다.

 

미니총선으로 가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고무신 선거와 뉴타운 선거의 닮은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알아야 한다. '선심성 공약'이라는 정부수립 이후의 가장 강력한 공약이라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욕망이 반영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차이점은 더욱 무시무시하다.

우선 유권자들의 욕망의 크기가 거대해졌다는 점이 첫 번째 차이점일 것이다. 뉴타운 하나 만드는 데 고무신이 몇 개가 소요되는지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익'에서 '사익'으로 유권자들의 요구가 이동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누구나 고무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거구와 선거구 간에 위화감이 생길 것도 없었다. 시골에서 '고무신'이라면, 서울에서는 '운동화' 쯤으로 품목의 사소한 차이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고무신'이라고 하면 틀리지 않다.

그리고 고무신의 먼 사촌 격인 공약이지만 교량이나 학교, 도로 등을 짓겠다는 공약은 그나마 건전한 공약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물론 개 후보나 소 후보나 다들 그런 공약을 하나씩 내세웠기 때문에 '건설공약 인플레'가 몹시 심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공익'이거나 '공익 명분'이었다.

이에 비해 뉴타운 공약은 어떤가? 철저히 지역색을 띠고 있고 철저히 자본주의와 이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웃해 있는 구와 뉴타운 구는 단번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뉴타운은 규모에 있어서도 상당히 심각하지만, 이것이 '공익'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그러니까 '공약(公約)'이 아니라 '사약(私約)'이 공공연하게 유통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주의와 경제지상주의가 결합된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신제품이다. 뉴타운 공약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병통이 따로 놀았지만, 뉴타운으로 인해 결합된 것이다.

뉴타운 공약이 과연 구와 구 사이에만 위화감을 일으키는가. 뉴타운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같은 지역구 내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긴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점점 그것은 끝내 막연한 기대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뉴타운은 서울 안에서 구민들을 분열시키고, 같은 구 내에서도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는 몹시도 위험한 상품인 것이다.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제도가 얼마나 공적인 기능에서 멀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뉴타운 선거'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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