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교육부의 유아기적 사고방식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항상 '문제'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는다. 교육은 항상 문제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화법으로 문제를 지적했고, 그만큼 많은 해법이 쏟아졌다. 해법이라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때 제시가 가능하다. 문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죄다 '헛발질'일 뿐이다. 문제를 모를 때는 차라리 방치하는 게 낫다. 헛발질을 자꾸 하다 보면 실타래가 자꾸 엉켜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바로 무수히 엉킨 실타래와 같다. 최근 이 실타래에 한 줄이 더 엉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교육부가 천명한 이른바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이다. 교육부는 진단평가를 정례화하고 뒤처지는 학생과 학교를 지원해 지역·학교·학생별 학력차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올해 10월 초6·중3·고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초등 3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실시한다. 매년 3월에는 초4~중3학년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가 시행되니 초6·중3학년은 1년에 두 번 시험을 치르는 꼴이 된다. 교육부의 관점에서 보면 '학력'은 '성적'과 동의어다. 일제고사를 실시해서 성적이 처지는 녀석들이나 그런 학교는 '학교 끝나고 남으라'는 식인데, 이보다는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를 한줄로 세워서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대개 어떤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로 반응한다. '문제'를 중시하는 경우와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이다.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는 한 가지 문제만을 연상하는 1:1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해법을 제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의 객관식 풀이 능력을 잘 모르니까 이번 기회에 통제하기 쉽게 1등부터 100등까지 '해쳐모여'를 시키려는 교육부의 처사가 그것이다. 반면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다발'이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이들은 교육부의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과 '일제고사'는 오히려 정부보다 보습학원이 절실히 원했던 자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의 저자인 김덕영 씨는 객관식을 유아기 시절에 뗐어야 할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유아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배우듯이, 정답과 오답이라는 흑백논리를 강요해 사고를 단순화시킨다는 것이다. (272쪽) 나이가 들면 서서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주관적인 세계관을 정립하는 단계, 즉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교육부 역시 유아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력'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식'을 틀렸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

 

교육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교육문제와 관계 있는 사람들 역시 '해법'과 '문제'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정치인이나 정부는 당연히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교육 전문가나 학자들은 '문제'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본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교육 관련 서적들은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철수와영희, 2008.3월)와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포럼, 2008.2월), 그리고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 2007.6월)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책들은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관점으로 보면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교육 해법'은 너무나 먼 이야기인 듯하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은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교육의 문제점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이 있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씨는 어느 해인가 4ㆍ3 강연에서 "제주도 안에서는 제주를 쓸 수 없다. 그래서 도망쳤다"고 말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그것이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란 독일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과 사회학의 대가인 헬무트 플레스너가 사용한 개념이라고 하는데, 그는 바로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독일을 보니까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밖에 가 있다고 해서 '다른 눈(other eye)'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성찰하고 지치도록 고민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끝내 '끊어진 고리'를 찾았을 때 쓰는 말로 해석된다. 단지 밖에서 배운 것에 불과하다면 미국의 경제학(주로 한물 간 시카고 학파)을 배우고 와서 신자유주의 이론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수많은 학자들의 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실제로 저자약력을 살펴보면 김덕영은 독일에서 사회학·철학·역사·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공부하였는데 독일의 학풍과 교육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독일의 위대한 학자들의 저서를 원서로 읽으며 자신만만했던 김덕영은 그러나 입학하는 순간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저자약력)

 

본문에서는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화가 소개되는데, 단지 세 줄에 지나지 않는 칸트의 사상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리포트를 준비해서 교수와 직접 토론을 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독일은 담당 교수가 학생과 과제를 가지고 직접 토론을 하며 면밀히 검토한 끝에 세심히 코멘트를 달아주고 원고를 돌려주는 방식이다) 글쓴이에게 잊지 못할 가르침이 되었던 담당교수의 코멘트 전문을 싣는다.

 

"칸트 윤리학의 기본적인 의도와 논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난 후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면 된다. 대학의 기초적인 지적 훈련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221쪽)

 

이런 이유로 독일의 대학에서는 학문의 엄밀성과 명증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교수는 공천장을 받아들고 끝내 강의를 제끼고 말았으며, 대학생들은 시시콜콜한 연예담을 예사로 늘어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칸트며 플라톤, 게오르그 짐멜을 거론하던 고등학생의 기억은 온데간데 없다.

역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더욱 명쾌하게 보이나 보다. 서문부터 던지는 질문이 거침없다. "한국이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교육은 앞으로도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출산율 저하로 또는 이농으로 걱정하면서,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진 놀이터는 걱정하지 않는가?", "왜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당연시하는 대학의 서열화를 외국인들은, 그것도 이른바 선진국의 국민들이 모르고 있을까?" 서두에서 던진 질문들은 본문에서 세세히 다뤄진다. 그러나 이 질문들이 귀결되는 지점은 한 가지이다. 바로 '인간 존중 교육'이다.

 

'인간 존중 교육'을 위하여

 

글쓴이가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교육의 밑바탕을 이루어야 하며, 서로 부딪힐 때는 당연히 인간 존중을 교육의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반 인간 교육이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글쓴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축구 선진국에선 정장기에 있는 유소년 선수들의 경우 훈련 시간이 많아야 하루 2~3시간인데 반해, 한국에선-2002년 일산백병원이 축구 선수 13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최대 7시간, 평균 4.57시간이나 된다. 한국의 축구는 한마디로 성적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학원 축구인 셈이다."
(동아일보 2004.6.15일자 "'축구 꿈나무'의 눈물", 34쪽에서 재인용)

 

어디 학원축구뿐이랴. 개성적이며 아름다운 몸을 가꾸는 복장은 청소년들의 성장하는 정신과 함께 몸의 논리를 구현할진대 군대나 감옥, 수도원, 공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유니폼'은 다름아닌 감시의 의미일 뿐이다. (30쪽) 지난 2002년에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 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며 절규했다. 학원은 학생의 일상생활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데 기숙학원이나 자물쇠반에서 이루어지는 행태들은 산업혁명 당시 중노동을 견디다 버려지는 유럽의 애띤 소년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교육의 현장에서 '인간의 얼굴'이 조금씩 회복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즉 한국 사회는 이제 '국가(사회)의 개인들'에서 '개인들의 국가(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역량이 생기는 것이지, 지금처럼 한줄로 늘어놓고 훈시를 하듯 일방적으로 정책을 주입시키는 것은 '글로벌한 자살한위'나 다름없다.

 

대체로 신선한 관점이며 타당한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현지의 입장'에 대해서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스쿨의 전면적인 지방대 배분이라든가 논술시험을 담당교사가 출제하는 방법, 객관식의 폐지, 모든 시험을 토론과 논술로 치르자는 결론적 주장은 장기적 과제는 될 수 있지만, 당장 밟을 수 있는 땅은 아니다. 예컨대 담당교사의 시험 출제라든지 모든 시험을 토론이나 논술로 출제하자는 주장은 출제 이전에 담당교사의 역량이나 교사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학자와 정치인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무척이나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부터 끊어진 고리는 분명히 적임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정치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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