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장면1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과 미군이 무더기로 몰살당하는 위기 상황을 맞아 해결책을 고심하던 당국은 바이러스의 치료약을 만들 수 있는 숙주원숭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생존한 환자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영화 <아웃브레이크>의 줄거리)

#장면2

2차 세계대전은 암호와의 전쟁이었다. 일본군의 암호 해독능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심하던 미군은  절대 깨지지 않는 암호 ‘윈드토커'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나바호족 암호병과 그들을 보호할 특수부대원들을 사이판 전투에 투입시켜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화 <윈드토커>의 줄거리)

#장면3
2007년 7월 분당 샘물교회 신도들이 탈레반에 납치되었을 때 아랍 문화를 이해하는 아랍어 전공자를 찾지 못한 당국은 외교협상에 매우 불리한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었으며 조속한 시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언어는 근육처럼 수축, 팽창하고 못 쓰게 되기도 한다.

한 언어의 어휘는 세상을 이해하고 지역 생태계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한 문화가 이야기하고 분류하는 사물들의 목록이다. (109쪽) 때문에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중(言衆)들의 전체 삶의 모습을 살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아 바라보는 생태학적 사회관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언어의 소멸현상을 추상화시켜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언어학자들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써야 한다거나 경제성장을 위해서 경쟁력 있는 언어를 일제히 사용하자는 정치인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기능이며 언중은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다. 이기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언중이다. 만약 그들에게 당신은 왜 자랑스러운 자신의 언어를 버리느냐고 따져묻는다면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언중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언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마치 생물학 책이나 경제학 책, 환경학 책, 사회학 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옳게 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사용하고 전달해줄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18쪽) 하지만 일반적인 언어학자들이나 언어 사용자들은 '문법'과 '사전'을 먼저 생각한다. 저자들은 언어에 있는 문법과 사전은 다분히 인위적인 환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다양한 측면 중 한 부분만 반영할 뿐,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본성을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98쪽) 언어는 일상이기 때문에 마치 근육과 같다. 쓰지 않으면 지방으로 쌓였다가 당뇨병에 걸려서 잘려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언어의 소멸은 잘려나간 지방덩어리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두 가지 논점이 생긴다. 첫째는 그것이 잘려나가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며, 둘째는 그것이 잘려나가서는 안 된다면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언어를 지켜낸다는 것은

#장면1은 신종 바이러스라는 대 재앙이 찾아왔을 때 백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숙주를 찾아내는 상황이다. 인류의 재앙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해야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불치병에 대한 치료약재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문명이 풀지 못한 문제의 해결책이 엉뚱하게도 산간오지에서는 전통적인 처방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은 적지 않았다. #장면3으로 옮겨오면 좀더 의미심장해진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군대란 단 한번의 전쟁에 소용이 되는 것이니 그만큼 불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필요 불가결하다" 이것을 현실에 적용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그 잘난 '영어'만을 몰입할 것이 아니라 '만국어'에 몰입시킬 것을 제안한다. 세계의 모든 언어와 문화에 능숙하다는 것은 엄청난 경쟁력이다. 지구촌은 어떤 나라가 어떤 나라와 엮일지 아무도 모른다. 이에 대한 비용을 들여서 대비를 하는 나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득을 독차지한다. 우리 국민 수십명이 탈레반에 포로로 잡히고 처형까지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고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를 적절히 했다면 반복적인 피해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세계를 '스캔'한다. 한국인들이 세계를 바라본 저마다의 '스캔파일'은 일정한 성격을 가진 파일로 압축이 된다. 세계의 곳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스캔할 것이고 이 파일들을 온전히 모으면 그것은 지구가 지구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가 온전히 담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스캔파일들이 자꾸만 삭제된다는 데 있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나 심각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인류는 스캔파일 더미에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꼭 필요한 상황에서 그 파일이 소멸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힘들게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자꾸 파일이 삭제되는가? 아마도 가장 서열이 높은 언어는 잘 보이는 곳에 배치되고 그렇지 않은 언어들은 내팽개쳐지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의 서열은 누가 결정하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들의 정치경제적 힘의 논리에 따라 가치판단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주변적이냐 도회적이냐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차이이다. (219쪽)

역사를 헛된 피로 물들게 한 유럽이나 중국 등 소위 '세계의 중심'이라는 나라들이 타 언어에 대해서 가한 정신분열적 행태를 살펴보았을 때(257쪽), 만약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에게 두 개 이상의 언어는 어울리지 않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수천 개의 언어가 너무 과분하다. 우리는 그것을 관리할 수준이 되는지 냉정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언어는 과거의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경험세계라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만약 세계의 모든 언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설을 세워 보자. 그들은 언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 이외의 많은 언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개별 언어의 운명을 걱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는 회의적이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언어의 소멸 방지'로는 절대로 갈 수 없고, 기껏 해야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사실 그것만 달성하는 것도 엄청난 변혁이다. 언어 사용자들의 삶의 수준을 보존해주고, 가정과 학교를 통해서 언어가 자라나는 길을 보살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정책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배려, 환경보호적 관점, 인권과 권리의 보장, 모국어나 공식적 언어로의 격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생의 기미가 없는 언어들은 포기하더라도, 가능성 있는 언어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든다. 언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쓰임'이지 세력이 아니다. 나에게 언어의 사전적, 문법적, 추상적 관점 외에 생물학적, 환경적, 물리적, 사회적 관점들을 환기해준 무척 고마운 책이다.




댓글(1)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누가 말을 짓는가?(말이 사는 힘을 가지려면…!)
    from 깨몽 누리방 2012-02-09 12:07 
    말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국어학자입니까? 아닙니다! 말을 만드는 이는 바로 그 말을 쓰는 뭇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 좀 앞선 이들이 길을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말글사는 이[언어대중]들과 함께 갈 때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좋으니 앞으로는 이것을 쓰시오’하듯이 말을 던져놓는 것은 뭇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주의입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저는 결코 국립국어원을 적(敵)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깨몽 2012-02-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옳은 말씀입니다.
사투리는 우리말 뿌리를 되짚을 수 있는 좋은 유산이라 봅니다.(저는 가끔, '우리말이 보석이라면 사투리는 원석'이라 견주고 있습니다.)
그런 사투리를 엉터리 표준말 뜻매김으로 다 죽여놓았습니다.
제가 보기로는 일제가 우리말을 죽인 것보다 국립국어원이 우리말을 죽인 것이 더 심하지 않나 싶습니다.(물론 거기에 세월 흐름도 한 몫해서...)
특히 입말을 깔보지 않고 그것이 우리말글이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입니다.(물론 편하게 쓰다보니 낮잡아 쓰는 말들도 많지만, 그것도 역시 말이 가지는 여러가지 속내 가운데 하나겠지요...)
http://2dreamy.wordpress.com/2011/12/25/우리말을-살리려면-사투리부터-살려야/
http://2dreamy.wordpress.com/2011/12/17/고을말을-깔보고-죽이는-표준말-잣대-어느-우스개/
http://2dreamy.wordpress.com/2012/01/21/5월을-사투리-살려-쓰는-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