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2년생의 지성은 종교적 회의와 철학적 성찰 속에 침잠해야 한다

대학 시절 나의 행보 중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두 사람을 만난 일이다. 한 명은 유대교로부터 극렬한 저주를 받고 파문당한 철학자 스피노자이며, 나머지 한 명은 평생을 간질과 주색, 노름, 종교적 회의, 무신론적 유혹에 시달렸던 소설가 도스또옙스끼였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답게 인격이 있는 신을 이성 체계의 정점으로 대체했다. 신은 육체를 가지면서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혼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원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가지며 모든 유한한 물질의 근거를 제공한 무한한 존재이며 이 질서 안에 편입돼 있다. 우리가 만물과 대면하는 것은 곧 신의 흔적을 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유대 교회로부터 파면당하고 바루크(Baruch)라는 유대식 이름을 버리게 된 이유다.

도스또옙스끼는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공포와 범죄의 세계'를 창작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도스또옙스끼의 작품 속에는 독실한 신자에서부터 무수한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운명이 얽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적 회의에 가장 괴로워한 인물이 바로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이다. 도스또옙스끼는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고통스러운 회의의 과정을 통해 달성된 신념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모순들을 숨기지 않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말해라. 대답해. 네가 종국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평화와 안식을 주겠다는 목적을 갖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주 자그마한 생물, 자그마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바로 그 아이를 불가피하게 괴롭힐 수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그 아이의 눈물을 기초로 건물을 세워야 한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는 건물을 짓겠느냐? 사실대로 말해라."
- 이반이 알료사에게,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315쪽에 재인용



나는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심취했다. "최고의 지성은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신에게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 동조해 복수의 종교 단체(사이비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었던)에 가입해 활동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내면 속에서는 아직도 유신론과 무신론이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처럼 오랜 전통 속에서 격렬히 토론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말하기 민망하겠지만, 세계의 지성들이 동경해마지 않는다는 '대학2년생' 시절이라는 게 있다. 초년생 때는 철이 없었고, 졸업생 때는 취업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생활인이 평생 동안에 아무 걱정 없이 지성에 심취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는 고작 대학2년생 1~2년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 시절에는 반드시 '종교적 회의'라는 터널을 지나쳐야만 종교관이 비옥해질 수 있다. 만약 이 터널이 생략된다면 사회적 중추가 되어서 십일조나 갉아먹고 우파의 논리를 뻐꾸기처럼 읊어대는 보수적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이명박 장로를 추종하고 사학법의 취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미국의 기독교 세력들, 탈레반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빈껍데기 신앙만이 가득한 세월을 살다가 하느님 없는 무덤을 맞이할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적 회의의 터널이 있는 곳을 아는 듯하다. 하지만 열렬한 히친스주의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히친스가 바라는 것도 아니며 또다른 종교를 만드는 것일 수 있다. 
 

 

히친스는 무신론의 종파를 세우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영국 포트머스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유대계 어머니에게 활달한 기질을 물려받았다.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졸업 후 좌파 성향의 뉴스테이츠맨지(誌)에 들어갔고 그리스 특파원 등을 거쳐 198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네이션·배니티 페어 등 유력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키신저 재판' '미국을 만든 사람 토머스 제퍼슨' '왜 조지 오웰이 중요한가' 등 10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우아한 영국 억양, 유려한 문체, 명쾌한 논지, 신랄한 기지로 수많은 팬과 동수의 적을 만들었다.

히친스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다른 말로 하면 <반신론(反神論)> 정도 되겠는데, 이 말 안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때의 '반(反)'은 anti를 뜻하는 '반대하다'와 '반성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히친스의 이 책을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읽거나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읽거나 큰 차이가 없겠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도킨스에게 내가 말했어요. '여기 1000명이 있다고 치자. 설령 그들 모두를 무신론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쳐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도킨스가 '아니, 왜?' 하더군요. '그래야 논쟁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어요. 완승에는 뭔가 빠진 게 있어요. 내가 전적으로 옳다 해도 반대파가 살아남길 바래요. 논쟁은 어느 쪽이 이기냐에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우리를 계몽합니다."
- 2008.1.19, 조선일보 인터뷰
 

 

그러니까 히친스의 관점에서는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서술할지라도, 독자는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하나의 포인트다. 인류가 탄생하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종교가 비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보다 종교가 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가 더 많으며, 이보다 종교가 군림한 시간이 더 길었다. 요컨대 종교의 적은 타 종파가 아니라 이성이다.
종교와 이성 사이에는 터널이 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던 비참과 회의의 터널이다. 이 터널을 통해 수많은 지성들이 빛을 밝혀 왔다. 하지만 터널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고한 자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지독한 독단으로 사람들에게 전혀 감흥을 주지 않아 결국 잊혀졌다. 때문에 나는 종교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비참과 회의의 공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겁쟁이라고 규정한다. 이성과 '고통의 관계'를 갖지 못한 모든 종교 관념은 인간의 지성을 유아기 수준에 머무르게 한다.

히친스의 주장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가 던지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성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고, 종교는 끊임없이 답을 만들어 낸다. 질문이 먼저인가, 답이 먼저인가. 그것을 명확히 가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잘못된 질문에는 잘못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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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03-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승주님.
잘 지내시죠? ^^
요즘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승주나무 2008-03-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ud-S 님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돼지처럼 마니마니 먹어서 감기는 안 걸리겠지만, 그 대신 살덩어리가 ㅠㅠ
님도 건강하시고, 간만에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당~~

2008-03-1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