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김유정 전집 - 개정판
김유정 지음, 전신재 엮음 / 강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유정 탄생 100주년에 부쳐]실소의 미학

서론


김유정 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선 남다른 문체와 해학성, 소박한 인물 창조, 시골 농촌의 내외(內外)를 꿰뚫은 묘사 등이다. 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 그만의 강력한 개성을 만들어 낸다. 사실 소설가를 비롯하여 예술 종사자들에게 개성만큼 소중한 것은 드물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목가적인 소설이니, 농촌소설, 순수문학 하는 말로 치부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기존의 유정에 대한 평가는 다소 산만한 점이 없지 않다. 일단 유정의 소설 탐색을 질서 있게 구획하고 있는 평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필자는 이에 유정의 소설이 명백한 소설론 위에 씌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유정의 소설을 보면 몇 가지 공통되는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구연체(口演體)와 같이 끊어지지 않고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의 억양을 살린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언어의 문제를 검토하며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대부분의 소설에 나타나는 해학성이다. 해학성 또한 구분 없이 쓰이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이 글에서는 그의 해학을 세 가지로 구분할 것이다. 처절한 현실감의 증폭, 한국인 특유의 건강함, 생명의 치열한 몸부림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학이 미적 기교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모순·갈등과 긴밀하고 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등장인물 군(群)이 향인(鄕人)이나 따라지 등 소시민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유정 소설의 인물 계보를 분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사실적 소설 쓰기이다. 유정 소설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실존 인물의 원용 또는 변용, 실제 지명 등의 사용이다. 이 점은 리얼리티를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되고 있다.
유정의 소설은 이른바 '순수문학'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구분되어 있다. 그가 순수문학을 의식적으로 취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연관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대한 일례로 참여와 순수의 역사를 보자면, 참여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얼마 안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순수는 인류의 탄생기부터 끊임없이 변모해 왔고, 그 안에서 참여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순수와 참여의 관계는 극단적인 갈등 관계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혹은 인간과 관련된 것은 순수하다. 특히 당대처럼 문학에 대한 탄압이 무시무시했을 때는 외부적인 안식처가 된다. 순수를 외부적인 안식처라고 했다고 해서 현실도피인 것은 아니다. 순수로 사회모순을 그려 낼 수 없다는 판단은 순수라는 그릇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견일 따름이다. 그리고 어느 평자의 말처럼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소설들은 그 시대 나름의 어드밴티지(advantage)를 부여해야만 읽을 수 있다. 우선 시의성도 시의성이어니와 어디를 가나 진지하고 암울하기 때문에 읽는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정의 해학은 하나의 발견에 속한다.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필자는 유정이 소설언어에 대한 자각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먼저 그의 시대 상황과 개인사를 살펴본 후, 작품을 분석하며 몇 가지 특징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김유정이라는 작가의 면모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자전소설인 『생의 伴侶』, 『두꺼비』,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나, 해학이 곧잘 드러나 있는 작품,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 작품인 『산ㅅ골 나그내』, 『총각과 맹꽁이』, 『노다지』,『소낙비』, 『금따는 콩밧』, 『떡』, 『만무방』, 『솟』, 『봄·봄』, 『안해』, 『가을』, 『땡볕』『봄과 따라지』등이다.

본론


1. 시대상황
ㄱ. 문화운동의 수난
1930년대는 농민의 수난사와 문학계의 변화가 주목된다 .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들은 또다시 야망의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찍이 1910년에 완전히 한국을 독점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고, 1931년 또다시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는데 그것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이다.
이러한 침략전쟁에 임하며 일본군은 약해진 후방을 이용해 항일민족주의세력(抗日民族主義勢力)이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한층 험악한 탄압정책(彈壓政策)이 개시했다. 3.1운동 이후 얼마동안 그들이 표방했던 문화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일본도(日本刀)를 찬 경찰이 백성들을 마구 탄압하고 우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 속에 한국의 문화계는 이전보다 더 심한 탄압과 구속을 받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 현상은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사건은 KAPF** 맹원들의 검거였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바로 그해, 1931년 2월부터 8월 사이에 주요 KAPF 멤버 70여명이 검거되고 1934년에 이르러 2월부터 12월까지 약 80명이 다시 검거됨으로써 마침내 내리막길에 있던 KAPF는 해산되고 말았다. (1935년 5월 22일 당국에 해산계를 제출함)
또 제1차로 KAPF 멤버들이 검거될 때 좌익적(左翼的) 또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경향을 함께 지녔던 문인들의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도 해산되고 말았다.

*만주사변(滿洲事變)
) 1931년 9월 18일 류타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으로 비롯된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부)에 대한 침략정책. 만주에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특수권익이 있었으나,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고, 소련이 1928년부터 추진한 제 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이 관동군을 자극하여,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대좌 등이 중심이 되어 전만주를 점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奉天; 현 瀋陽) 외각의 류타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만철 연선(沿線)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32년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일본의 괴뢰국가(傀儡國家)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提訴)에 따라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리허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국(政局)은 정당내각(政黨內閣)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이 침략행위는 37년의 중일전쟁과 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 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朝鮮 Proletariat 藝術家同盟)의 약칭.
1925년 8월 박영희(朴英熙)·김기진(金基鎭)·이호(李浩)·김영팔(金永八)·이익상(李益相)·안석영(安夕影)·송영(宋影)·이기영(李箕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모임. 그 이전, 22년 이적효(李赤曉) 등의 염군사(焰郡社)를 중심으로 한 활동, 23년의 박영희·김기진 등의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의 운동이 있지만 이렇다할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카프가 사회적 거취를 분명히 한 것은 26년 《문예운동(文藝運動)》이라는 기관지를 내면서부터인데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본뜬 이 운동은 몇 차례의 방향전환을 거듭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1차 방향전환은 27년의 자연발생적인 단계에서 계급 이데올로기에 의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단계였고, 2차 방향전환은 31년을 전후하여 소장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카프를 초강경 노선으로 끌고 간 데서 시작되었다. 일체의 중도적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전투적 계급주의를 내세웠으며 <전위(前衛)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는 등의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이 때의 중심인물은 안막(安漠)·김남천(金南天)·임화(林和) 등이었다. 다음에 온 전환은 이른바 검거사건으로 이어지는 35년의 해산이었다. <무산자(無産者) 사건>·영화 <지하촌(地下村) 사건> 등이 발단이 되어 1931년 2월부터 8월까지 70여명이 검거되었고, 34년 2월부터 12월까지 80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이것은 세칭 <전주(全州) 사건>이라는 어느 연극단체의 삐라 살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로써 카프는 35년 5월에 이르러 경찰당국에 해산계를 내게 되는데, 짧은 기간 동안 갓 도입한 이론에 대해서 활발한 논쟁을 벌인 반면, 거기에 수반하는 문학작품은 거의 생산하지 못하였다.

***신간회(新幹會)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항일단체. 1927년 2월 <민족 단일당 민족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사회 양주의자가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 운동단체이다. 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유억겸(兪億兼)·신석우(申錫雨) 등 34명이 발기인이 되어 초대 회장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권동진(權東鎭)을 선임하여 출범하였다. 신간회는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이라는 정강정책(政綱政策)이 밝힌 바와 같이, 일제하의 합법단체이면서도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이며, 급진적인 행동강령을 내세운 민족적 대표기관이었다. 여기에는 좌익계를 포함한 전민족 진영이 가담하여 전국에 200여명의 지회(支會)·분회가 조직되어, 30년 현재 회원수가 약 3만 9,000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 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반항적 기세를 선동하여 사안(事案)의 분규 확대에 힘쓰고…>라고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이를 계획하다가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44명이 체포되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렸다. 한편, 신간회의 중앙간부진용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데 불만을 품은 좌익계가 민족주의계의 중요 간부들이 각종 사건에 관계되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운동을 벌여 1931년 5월, 5년만에 해산되었다.




ㄴ. 출판사업의 융성
이러한 일제의 엄격한 통제도 문화 전반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서구문명의 도입과 그 발전은 3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의 원인은 전국민의 독립의지에서 비롯되고, 그 구체적인 행동은 서구의 고급문물에 대한 무조건적 수입이었다. 일제를 자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문화는 얼마든지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929년에는 「삼천리(三千里)」, 「문예공론(文藝公論)」, 「조선문예(朝鮮文藝)」 등이 창간되었는데 30년데에 들와 와서도 이와 같은 출판문환는 나날이 번성해갔다. 「신민(新民)」, 「신인간(新人間)」, 「신동아(新東亞)」, 「동광(東光)」, 「비판(批判)」, 「혜성(彗星)」, 「실생활(實生活)」, 「신계단(新階段)」, 「중앙」, 「학등(學燈)」 등의 크고 작은 잡지들이 30년대 들어와서 발간되기 시작했고, 1935년에는 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의 복간, 1936년에는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의 창간을 보게 되었다.
이렇듯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작품이 없어서 출판을 못할 정도로 작품활동이 극도로 팽창하여 외세의 제한을 뚫고 발전해 갔다.

ㄷ. 농촌의 수난
농촌의 궁핌화는 토지수용(土地收用)-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식량 수탈-고리채 등의 과정을 밟아 행해진다. 일본의 한국 토지 조사는 1910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난다. 그것은 <일본인의 사적(私的) 토지 수탈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그 토지 수탈은 1911년 토지수용령(土地收用令)에서부터 본격화 된다. 그렇게 수탈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거쳐 일본 농민들에게 배부된다. 합방 전에 동척(東拓)에 투자된 2,430정보가 1914년에는 653,956정보로 늘고, 1918년에는 다시 4500정보가 늘 정도로 토지 수탈은 악랄하게 행해진다. 1919년 이후에는 상당량의 토지를 빼앗긴 한국 농민들에게 식량 수탈이 시작된다. 한국쌀을 빼앗아간 대신에 한국 농민들에게는 만주의 잡곡이 주어진다. <총독부는 산미 증산 정책을 통해 한국 농민으로 하여금 자기가 먹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조건에 묶어> 놓은 것이다. 또 농민의 궁핍화를 촉진한 것은 고리대(高利貸)인데, 그 고리 대금은 대부분 일본 은행의 산업 자금이다. 그 결과 농민의 궁핍화는 극대화된다.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소작농의 75%에 이르는 농민이 빚을 지고 있는데, 그것은 식산은행(殖産銀行)의 것이 39.2%, 동척(東拓)의 것이 14.6%, 금용 조합의 것이 17.4로 합계 70%를 넘고 있으며, 이자는 연 15∼35%의 것이다. 그 결과 농촌에서는 자작농의 감소와 소작농의 증가라는 계층적 분화가 촉진되며, 이농·이민현상이 생겨난다. 다음의 표는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표1> 1925년도 이농자
(1) 산업으로 분산 : 23,728(15.82%)
(2) 공작 잠업으로 분산 : 6,879(11.24%)
(3) 노동자·고용인 : 69,644(46.39%)
(4) 일본 이주 : 25,308(16.85%)
(5) 만주·시베리아 이주 : 4,224(2.88%)
(6) 가족 분산 : 6,835(4.55%)
(7) 기타 전업 : 3,492(2.27%)
합 150,112(100%)


이농자의 반 이상은 도시에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 농촌이 빈곤해지니까 도시까지 빈곤해진 것이다.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도시 생활자의 32.11%가 면세자로서 무직·극빈의 상태에 있다. 그 결과 생존권에 대한 투쟁으로 농촌에서는 소작쟁의(小作爭議)가, 도시에서는 노동쟁의(勞動爭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2. 작가의 개인사
-문학을 중심으로

김유정의 개인사를 굳이 그의 문학을 통해서 밝히려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생 여정을 문학 안에 담으려고 했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쉽게 지나갈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은연중에 자신의 출신 지명이나 현존했던 인물들을 혹은 실제 있었던 사실을 소설로 옮겨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예컨대 유정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뚝건달 뭉태(『총각과 맹꽁이』, 『안해』, 『봄봄』 등)는 현존했던 건달이며, 『봄봄』에서 데릴사위라는 미명으로 노동수탈을 당하는 사건은 실레마을의 봉필이라는 인물의 딸들과 데릴사위에 얽힌 사건을 따온 것이다.
김유정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1908년 1월 11일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할아버지 김도사(金都事-司馬 任禁府都事)댁이라는 설이 그것이고 아버지가 강원도 춘성면 출신이고 김유정은 서울 출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다른 여타의 기록에서는 江原道 春城郡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문학적 여정을 논하므로 출생지에 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겠다.

옥이는 도사댁 문간에서 개똥어머니를 놓치고는 혼자 우두커니 떨어졌다.
『떡』 중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고불꼬불 돌아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음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洞名)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隨筆, 『내가 그리는 新綠鄕』 중에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강원도는 유정의 고향이자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안에서 고향의 산천은 물론이고 그와 얽혀 지내는 향인들의 삶까지도 구수하고 詩的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 『떡』의 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사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관직명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낙비』에 나오는 이주사(李主事)도 역시 성만 달리할 뿐 그의 아버지 김주사(金主事-司馬 任軍部主事)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주사인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6살 때, 아버지가 8살 때 돌아가신다. 그 후로 형의 난봉과 폭행은 가족을 공포로 몰아넣고 유정의 생애에도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사람 대하기를 극히 싫어하는 이상스러운 성질의 청년이었다. 범상에서 벗으러진 상태를 병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큰 병의 일종이겠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었다. 그리고 제풀로 돌아다니며 눈칫밥에 자라난 소년이었다. 그러면 그의 염인증(厭人症)도 여기에 뿌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형님이 한 분 있었다. 주색에 잠기어 밤낮을 모르고 난봉꾼이었다. 그리고 자기 일신을 위하여는 열 사람의 가족이 희생을 하라는 무지한 폭군이었다. 그는 아무 교양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다만 그의 앞에는 수십만의 철량이 있어 그 폭행을 조장할 뿐이었다.
부모가 물려주는 거만의 유산은 무릇 불행을 낳기 쉽다. 더욱이 이십오륙의 아무 의지도 신념도 없는 청년에 있어서는 더 이를 말이 없을 것이다. 그도 이 예에 벗어나지 않았다.…그는 술을 마시면 집안 세간을 부수고 도끼를 들고 기둥을 팼다. 그리고 가족들을 일일이 잡아가지고 폭행을 하였다. 비녀쪽을 두발로 잡고 그 모가지를 밟고 서서는 머리를 뽑았다. 또는 식칼을 들고는, 피해 달아나는 가족들을 죽인다고 쫓아서 행길까지 맨발로 나오기도 하였다. 젖먹이를 마당으로 내팽개쳐서 소동을 일으켰다. 혹은 아이를 우물 속으로 집어던져서 까무러친 송장이 병원엘 갔다.
이렇게 가정에는 매일같이 아우성과 아울러 피가 흘렀다. 가족을 치다치다 이내 물리면 때로는 제 팔까지 이로 물어뜯어서 피를 흘렸다.
『生의 伴侶』 중에서

이 소설은 유정이 죽기 전에 자전소설로 쓰다가 미완에 그친 장편 중 한 대목이다. 여기에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한 개인의 성격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의 소설 중에는 유난히 내외적 억압에 의해서 행동이나 성격이 비틀어진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유정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1920년부터 제동보통학교를 다니고, 1923년에는 4년제 휘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5년을 다녔다. 조카 영수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유정은 음울한 분위기와 고뇌의 향취가 흠씬 풍기는 러시아 소설을 주로 읽었다고 한다. 1929년 21세의 유정은 연희 전문학원 문과에 입학하고 박록주(朴綠珠)라는 기생에게 구애한다.

그 상대가 화류계의 인물이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명렬군보다는 다섯 해가 위였다. 삼십이 가깝다면 기생으로 한고비를 넘어 시들은 몸이었다. 게다가 외양도 출중나게 남달리 두드러진 곳도 없었다. 이십 전후의 팔팔한 친구로는 도저히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의 머릿속에 따로이 저의 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극히 존경하는 한 여성이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여성을 저쪽에 끌어내놓고 연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명주는 우연히 그 여성의 모형이 되고 말았을 그뿐이겠다.
『생의 伴侶』 중에

기생을 사랑하는 대목은 그의 또 다른 자전 소설인 『두꺼비』에도 나오는데, 모두 주인공보다 다섯 이상의 연상이다. 그것은 어렸을 적 여의어 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 받지 못한 유정이 내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연희학원을 중퇴한다. 23세에는 고향에 내려와 야학을 시작한다.

망할 년두 참. 게다가 년이 시큰둥해서 날더러 신식 창가를 가르쳐 달라고 들병이는 구식 소리도 잘 해야 하겠지만 첫째 시체 창가를 알아야 부려먹는다 한다. 말을 그럴 법하나 내가 어디 시체 창가를 알 수 있냐. 땅이나 파 먹던 놈이 나는 그런 거 모른다, 하고 좀 무색했더니 며칠 후에는 년이 시체 창가 하나를 배 가주 왔다. 화로를 끼고 앉아서 그 전을 두드리며 네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피었네 피었네 연꽃이 피었네. 피었다고 하였더니 볼 동안 옴쳤네. 대체 이걸 어디서 배웠을까. 얘 이년 참 나보단 수단이 좋구나, 하고 나는 퍽 감탄하였다.
그랬던 나중 알고 보니까 년이 어느 틈에 야학에 가서 배우질 않았겠나. 야학이란 요 산 뒤에 있는 조그만 움인데 농군 아이에게 한겨울 동안 국문을 가르친다. 창가를 할 때쯤 해서 년이 춘 줄도 모르고 거길 찾아간다. 아이를 업고 문 밖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엿듣다가 저도 가만가만히 흉내를 내 보고 내 보고 하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집에 와서는 히짜를 뽑고 야단이지. 신식 창가는 며칠만 좀더 배우면 아주 능통하겠다.
『안해』 중에서

야학을 하면서 아마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위기의식과 사명감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의 소박한 군상들을 몸소 부딪치며 소설화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음직도 하다. 그리고 충남 예산(禮山) 금광 등을 전전한다.

꽁보는 더펄이 뒤를 따라오르며 달달 떨었다. 이게 지랄인지 난장인지, 세상에 짜정 못해먹을 건 금점 빼고 다시 없으리라. 금이 다 무언지. 요짓을 꼭 해야 한담. 게다 건뜻하면 서로 뚜들겨 죽이는 것이 일. 참말이지 금쟁이 치고 하나 순한놈 못봤다.
『노다지』 중에서

금광 경험이 유정에게 미친 영향은 인상적이다. 금을 소재로 한 작품만 『노다지』, 『금』, 『금따는 콩밭』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 본능의 한 전형을 말해줄 뿐 아니라 당시 시대상황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부터 유행한 광산은 조선으로 넘어와 농민들은 빚만 지는 농사 대신 광산으로 뛰어들었고, 『금따는 콩밭』과 같이 밭을 파내기까지 하는 활극을 연출해 냈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했음을 반증하기도 하거니와 그로 인한 도덕성과 인심의 추락은 유정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소설화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소설에 나와 있는 생애이다. 그 이후로는 서울로 올라와서 작품 활동을 하고 九人會에 가입하고 하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연보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작품론
(1)언어
그의 언어는 해학과 관련하여 더욱 강한 무기가 된다. 그가 쓰는 문장은 표준어라기보다 口語體에 가깝고 그것도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경우나, 그 지방의 특성에 맞게 변용되어 쓰는 것을 그대로 원용한 경우여서 김유정 전집을 제외하고는 다른 텍스트들이 모두 표기상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일례를 들자면 핀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전집에서는 <핀퉁이 ;『총각과 맹꽁이』>라고 했으나 소담출판사본(신동욱 외 편)에서는 <핀둥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 텍스트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다.
구어체 문장과 비속어와 육두문자(肉頭文字) 섞인 농촌 어휘가 풍부하게 구사되면서 독특한 묘미를 풍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농촌을 그릴 수 있게 되며 생동감을 느낀다. 『안해』를 보자.

우리가 요즘 먹는 것은 내가 나무장사를 해서 벌어드린다. 여름 같으면 품이나 판다 하지만 눈이 척척 쌓였으니 여름을 꺼먹느냐. 하기야 산골에서 어느놈 치고 별 수 있겠냐. 마는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들이고 그담날엔 읍에 갔다가 판다. 나니깐 참 쌍지개질도 할 글력이 되겠지만, 잔득 나무 두 지개를 혼자서 번차례로 이놈 저다놓고 쉬고 저놈 저도 놓고 쉬고 이렇게 해서 장찬 삼십 리 길을 한나절에 들어가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은제 한 지개 한 지개씩 팔어서 목구녕을 추길 수 있겠느냐.

이렇게 짧은 호흡을 유지하면서 리듬감 있게 묘사해 나간다. 마치 옆에서 말하는 강담사(講談士)와 같다.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
『봄봄』
"살재두 나는 인전 안 살 터이유!"
『총각과 맹꽁이』

이 두 상황은 모두 배신을 당하거나 억압을 당하는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푸념 혹은 비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학적 언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웃음과 감동과 싸늘한 현실인식을 동시에 던져준다.

구루루 주는 밥이나 얻어 먹고 몸 성히 있다가 연해 자식이나 쏟아라. 뭐 많이도 말고 굴대 같은 아들로만 한 열다섯이면 족하지. 가만있자, 한놈이 일 년에 벼 열 섬씩 번다면 열다섯섬이니까 일백오십 섬. 한 섬에 더도 말고 십 원 한 장씩만 받는다면 죄다 일천오백 원이지. 일천오백원, 일천오백 원, 사실 일천오백 원이면 어이고 이건 참 너무 많구나,. 그런줄 몰랐더니 이년이 배속에 일천오백 원을 지니고 있으니까 아무렇게 따저도 나보담은 났지 않은가.
『안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엉뚱한 주인공의 생각은 건강한 활력이 되어 힘든 인생사의 한 희망이 된다. 그것은 또한 희망을 가질 만한 것이 이런 엉뚱한 것 밖에 없다는 현실 상황의 반증이 되기도 한다.

(2) 해학
ㄱ. 처절한 현실감의 증폭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꿈쩍 않는 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적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대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다 끝내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소박한 심정으로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시대적 슬픔까지 아울러서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서 해학을 제거했을 때의 그 살벌한 적나라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것이리라. 해학의 미적 효과는 숭고미의 엄숙성을 부정하는 표현적 기교이고, 중압감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효과를 가진다.

역시 떡이 나오는데 본즉 이것은 팟떡이 아니라 밤 대추가 여기저기 뼈저나온 백설기. 한번 덥석 물어떼이면 입안에서 그대루 스르르 녹을 듯 싶다. 너 이것도 싫으냐 하니까 옥이는 좋다는 뜻으로 얼른 손을 내밀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먹었을까. 그 공기만한 떡덩어리를. 물론 용감히 먹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빨리 먹었다. 중간에는 천천히 먹었다. 그러나 이내 다 먹지 못하고 반쯤 남겨서는 작은아씨에게 도루 내주고 모루 고개를 둘렀다. 옥이가 그 배에다 백설기를 먹은것도 기적이려니와 또한 먹다 내놓은 이것도 기적이라 안할 수 없다. 하기는 가슴속에서 떡이 목고멍으로 바짝 치뻗히는 바람에 못 먹기도 한 거지만. 여기다가 더 넣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입안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다음 꿀 바른 주왁 두 개는 어떻게 먹었을까. 상식으로는 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여간 너 이것은 하고 주왁이 나왔을 때 옥이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받았다. 그리고 한놈을 손끝으로 집어서 그 꿀을 쪽쪽 빨드니 입속에 집어 넣었다. 그 꿀을 한참 오기오기 씹다가 꿀꺽 삼켜본다. 가슴만 뜨끔할 뿐 즉시 떡은 도루 넘어온다. 다시 씹는다. 어깨와 머리를 앞으로 꾸브리어 용을 쓰며 또 한번 꿀떡 삼켜본다. 이것은 도시 사람의 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허나 주의할 것은 일상 곯아만 온 굶주린 창자의 착각이다. 배가 불렀는지 혹은 곯았는지 하는 건 이때의 문제가 아니다. 한갓 자꾸 먹어야 된다는 걸삼스러운 탐욕이 옥이 자신도 모르게 활동하였고 또는 옥이는 제가 먹고싶은 걸 무엇무엇 알았을 그뿐이였다. 거기다 맛갈스러운 그 떡맛. 생전 맛 못보던 그 미각을 한번 즐겨보고자 기를 쓴 노력이다.
『떡』 중에서

생전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옥이의 눈으로 당시의 가난하고 처참한 세태를 나타낸다. 어릴 적 한문을 배웠던 유정은 "마땅한 생업이 없으면 마땅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 그러한 논리는 순수의 상징인 어린이 옥이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옥이는 자기 아버지더러 "망할새끼 저만 처먹을랴고 얼른 죽어버려라 염병을 할 자식."이라고 마음속으로 욕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놈팽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뜩이나 없는 밥을 혼자 너무 많이 먹고 게다가 옥이의 몫까지 먹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봉변을 당하는 이유는 인물들이 꾸는 소박한 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을 행복하게 살 이유가 있고, 행복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정당하게 표현된다. 대부분 이야기의 반전은 그들의 소박한 꿈이 작용했을 때 정점을 이룬다.

사랑하는 안해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고 집도 있었고 그때야 어딜 하로라도 집을 떠러져 보았으랴. 밤마다 안해와 마주앉으며 어찌하면 이 살림이 좀 늘어볼가 불어볼가. 애간장을 태이면 가튼 궁리를 되하고 되하였다. 마는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농사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남는 건 겨우 남의 빗뿐. 이러다가는 결말엔 봉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루는 밤이 깊어서 코를 골며 자는 안해를 깨웠다. 밖에 나가서 우리의 세간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 하였다. 그리고 저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찍어 들었다. 벽을 바른 신문지는 누렇게 끼렀다. 그 우에다 안해가 불러주는 물목대로 일일이 나려 적었다. 독이 세 개, 호미가 둘, 낫이 하나,로부터 밥사발 젓가락 짚이 석단까지 그 담에는 제가 빗을 얻어온데, 그 사람들의 이름을 쭉 적어놓았다. 금액은 제각기 그 아래다 달아놓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쭉 적어놓았다. 금액은 제각기 그 아래다 달아놓고 그 옆으론 조금 사이를 떼어 역시 조선문으로 나의 소유는 이것밖에 없노라. 나는 오십사 원을 갚을 길이 없으매 죄진 몸이라 도망하니 그대들은 아예 싸울 게 아니겠고 서루 의론하야 어굴치 않도록 분배하야 가기 바라노라 하는 의미의 성명서를 벽에 남기고….
『만무방』 중에서

유정의 소설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과 지식인의 등장 등이다. 이 둘은 서로 비슷한 것이기도 하면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에 나오는 중심인물의 지적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감동과 슬픔은 한층 더해진다."고 하였고, 그 후로도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지식인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인들이 그 사회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의 대표자가 될지언정 당대사회의 대표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유정의 지론이다. 그래서 중심인물들은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을 파악할 줄 모르며, 파악하는 것조차 염두에 없다. 다만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이것으로 보아 유정 소설의 무게중심은 희망찬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희망이 좀 덜한 현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고난과 갈등은 마땅히 설명할 것이 아니라 소설의 문장으로 이야기하여야 한다. 그런 소설언어 속에서 독자는 주인공 개인의 비참함뿐만 아니라 그 전형을 통해서 당대의 상황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ㄴ. 한국인의 건강함
제목을 한국인이라고 달기는 했지만, 그것은 세계의 서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건강함일 것이다.

"저 사촌형님께 쌀 두 되 꿔다 먹은 거 부대 잊지 말구 갚우." 하고 부탁할 제 이것이면 필연 아내의 유언이라 깨닫고는,
"그래 그건 염려 말아!"
"그리고 임자 옷은 영근 어머니더러 사정 얘길 하구 좀 빨아 달래우."
하고 이야기를 곧잘 하다가 다시 입을 일그리고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땡볕』중에서

이러한 모습은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에도 나오는데, 농부들이 지바고의 진찰에 보답하여 닭이니 염소니 달걀이니 하는 것들을 막 싸고 온다. 지바고는 안 받겠다고 사양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진찰을 받으면 병이 더욱 도져서 죽는다는 논리로 막무가내 두고 간다. 그리고 투루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에서도 쓰러지는 나무에 눌려 죽게 된 농부가 빚진 닭 두 마리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빚지고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서민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지루한 한겨울 동안 움추렸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녹고 보니 여기가 근질근질 저기가 근질근질. 등어리는 대구 군실거린다. 행길에 삐쭉 섰는 전봇대에다 비스듬이 등을 비겨대고 쓰적쓰적 부벼도 좋고. 왼팔에 걸친 밥통을 땅에 나려논 다음 그 팔을 뒤로 제쳐 올리고 또 바른팔로 다는 그 팔굼치를 들어 올리고 긁죽긁죽 긁어도 좋다.
『봄과 따라지』 중에서

따라지의 사전적인 의미는 1. 노름판에서의 한 끗 2.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람 또는 사물을 말한다.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깡통을 들은 거지가 봄의 기운에 저도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온 모습이다. 이 따라지는 아무리 경찰에게 맞고, 골목으로 끌려가 혼쭐나도 절망할 줄 모른다. 아무리 현실이 고되더라도 결코 꺾일 줄 모르는 조선인의 건강함을 일개 따라지를 통해 작가는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ㄷ. 생명의 치열한 몸부림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 귀때 하나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걸 웃더니(그러나 암만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봄봄』중에서

이 작품은 지주를 대신하여 마름이 소작인을 착취하는 실태를 그렸다. 마름이 곧 지주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노동력의 착취, 소작인의 비극, 비인간적인 횡포를 비판하고 있지 않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해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해학적으로 빗겨가고 있다. 농촌의 구조적 모순이나 갈등, 그리고 횡포와 착취를 공격하여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해학적으로 접근하여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고 제시할 뿐이다.

우선 내가 무릎 장단을 치며 아리랑 타령을 한 번 부르는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봄의 산아 잘 있거라, 신연강 배 타면 하직이라. 산골의 계집이면 강원도 아리랑쯤은 곧잘 하련만 년은 그것도 못 배웠다. 그러니 쉬운 아리랑부터 시작할밖에. 그러면 년은 도사리고 앉아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치며 흉내를 낸다. ……그래도 하나 기특한 것은 년의 성의는 있단 말이지. 하기는 그나마도 없다면야 들병이커녕 깻묵도 그르지만 날이라도 틈만 있으면 저 혼자서 노래를 연습하는구나. 빨래를 할 적이면 빨랫방추로 가락을 맞추어 가며 이팔청춘을 부른다. 노래 한 장단에 바늘 한 꿰엄씩이니 버선 한 짝 기우려면 열 나절은 걸리지. 하지만 아따 버선으로 먹고 사느냐. 노래만 잘 배워라. 년도 나만치나 이밥에 고기가 얼른 먹고 싶어서 몸살도 나는지 어떤 때에는 바깥 밭둑을 지나가려면 뒷간 속에서 콧노래가 흥이 겨울 적도 있겠다.
『안해』중에서

가난에 찌들리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방편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들병이로 나서겠다는 말이다. 그것도 생김이 박색중에서도 상박색인 안해가 말이다. 그러나 꿈쩍도 안할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주룩들지 않고 자신의 엉뚱한 논리로라도 밀고 가려는 생명의 본능은 우리가 놓치지 않고 찾을 수 있다.

4. 인물 계보

얼핏 보면 유정의 작품에서 동일 주제가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한 작가일수록 주제는 더 깊게 다루고, 폭을 넓혀가기 때문에 반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 주제를 다룬 다른 작가, 예컨대 朴趾源을 들 수 있고, 沈熏을 들 수 있고, 李陸史를 들 수 있다.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다룬다. 유정에게 있어 하나의 주제는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엄중한 적 앞에 주인공들은 비틀어가기도 하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이제 가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 해결해나가려 하는지 계보를 통해 살펴보자.
ㄱ. 지푸라기 잡는 유형

가장 커다란 고난을 수화지화(水火之禍)라고 한다. 그 중에서 주인공들의 고난은 물에 비유된다. 즉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유형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덕순이는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간다. 불가사의한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 월급을 주고 옷과 밥을 먹여준다는 동네 노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정의 주인공들은 속설이나 옆 사람의 말에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쉬우니까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금따는 콩밭』에서도 영식이는 수재의 발림에 넘어가 밭을 절단 내고 만다. 딴에는

1년 고생하고 킥 콩 몇 섬 얻어먹느니보다는 금을 캐는 것이 슬기로운 짓이다. 하루에 잘만 캔다면 한 해 줄곧 공들인 그 수확보다 훨씬 이익이다. 올 봄 보낼 제 비료 값, 품삯, 빚해 빚진 7원 까닭에 나날이 졸리는 이판이다. 이렇게 진지하게 살고 말 바에는 차라리 가로 지나 세로 지나 사내자식이 한 번 해 볼 것이다.
『금따는 콩밭』

라는 것이다.

"여보게, 자네에게 청이 있네."
재성이 목이 말라서 바득바득 따라온다.
그 청이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에게 돈을 다 빼앗기곤 구문이겠지. 시치미를 딱 떼고 나 갈 길만 걷는다.
"여보게 응칠이, 아 내 말 좀 들어!"
그제서는 팔을 잡아낚으며 살려 달라 한다. 돈을 좀 늘일까 하고 벼 열 말을 팔아 해 보았더니 다 잃었다고. 당장 먹을 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 노름 밑천이나 하게 몇 푼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벼를 털었으면 거저 먹을 것이지 어줍잖게 노름은…….
"그런 걸 왜 너보고 하랬어?" 하고 돌아서며 소리를 빽 지르다가 가만히 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잠자코 돈 2원을 꺼내 주었다.
『만무방』

재성이는 그 돈으로 다시 노름판으로 끼어 들 것이다. 노름을 하지 않고는 밑천을 마련할 길이 없다. 『소낙비』에서도 춘호는 자기 처더러 몸을 팔고 2원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몸을 팔아 번 돈 2원으로 노름 밑천을 삼겠다는 것인데, 그것도 역시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ㄴ. 비윤리적인 행위 유형

가난에 찌들어 복만이는 제 아내를 소장사에게 팔았다. 유정 소설에서는 특히 성매매나 인신매매 등의 소재가 많이 나온다. 『솥』에서는 근식이는 들병이와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솥을 갖다 바친다. 그것은 자기 생활에 권태감이 밀려와서가 아니다. 유정 소설 어디를 봐도 그런 고상한 취미를 가진 등장인물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이다. 유정소설에는 이 작품 외에도 『총각과 맹꽁이』, 『안해』, 『산골나그내』등에 들병이라는 소재가 나오는데, 들병이란 '술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여자'로서 상황에 따라서는 몸을 팔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소설 속에서 보면 결코 비윤리적이지 않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아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필자가 사는 제주도는 그런 경험이 잘 없겠지만, 제주도를 떠나 본토에만 가도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상황을 잘 인식해야지만 인물들의 절실함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ㄷ. 뚝건달 유형

아무리 노동을 해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에 유정의 소설에는 성실과는 오래 전에 담쌓은 건달이 많이 등장한다. 『소낙비』의 춘호, 『떡』의 덕화,『 만무방』의 응칠이, 『총각과 맹꽁이』의 뚝건달 뭉태가 그런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 유형들은 모두 가난의 소산들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비윤리적인 점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정의 소설에는 부부의 유형이 나오는데, 대체로 부인은 현실적이고 행동적인 데 반해서 남편은 이상적이고, 체념적이거나 건달들이다. 어느 사회건 어려운 시대에는 여성이 억척어멈이 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 같다.

결론

이렇게 몇 가지 유형을 통해 김유정의 소설을 분석해 보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김유정은 자신의 해학을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작가가 언어라는 무기를 날카롭게 깎아내듯이 해학이라는 무기로 모든 현실을 묘사해놓았다.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고 낼 수 있는 웃음 속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농촌을 노래하는 목가적인 문학과는 다르다. 관광객이 농촌을 다녀오는 것과 그 농촌의 일원으로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그래서 유정이 노래하는 풍경과 산골의 아름다움은 공허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끝없이 생겨날 것 같은 생명의 원형을 유정은 잘 묘사해 놓았다. 그리고 가난 앞에 우리가 쏟아낼 수 있는 것은 무기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가난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힘을 준다.
필자가 보건대 그 때의 고난과 지금의 고난은 차이를 둘 수는 없겠으나, 지금의 우리가 조그만 고난 앞에도 쉽게 주저앉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이성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은 노력들은 애초에 접어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유정의 인물들은 전혀 얼토당토한 한 가지 속설에 매달리고 끝까지 실행해 나간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에 '실패'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의 실패와 구별되는 점도 많다. 한 가지만 들자면 그들의 실패는 '경험하여 본 실패'이며, 우리의 실패는 '경험하지 못한 실패'이다. 따라서 그들의 실패는 얻어먹을 것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미련하게 행동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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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