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장을 지탱하는 모든 소유권과 기타 권리들은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장 역시 정치의 산물인 것이다.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인 기원을 갖는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경제적 권리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례들 중에는 아이디어를 소유할 권리(19세기에 지적소유권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일하지 않을 권리(많은 가난한 어린이들은 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였다)가 포함된다.
                                                                                                     - 책 270쪽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까지의 거리이다. 혹은 그 둘 사이의 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프롤로그에서는 삼성과 노키아를 모델로 한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가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가상으로 정리돼 있고, 에필로그에서는 한 유망 있는 개도국의 중견기업이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모두 우리의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따라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읽어도 이 책이 주려는 메시지를 알 수 있다.

그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과 그들에게 허구헌날 매를 맞는 개발도상국이나 약소국의 처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는 점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돈만 아는 수전노이자 약자들의 고통 같은 것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비정한 집단이라는 식의 감정적 캐릭터와 나쁜 사마리아인들 역시 시장의 구조에 지배되어 있으며 스스로 어떤 저항을 할 수조차 없는 구조적 캐릭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비근한 예로 재벌기업집단의 행태를 바라보면 무한한 이윤을 위해 온갖 불법, 편법을 저지르는 처사를 주도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즉 그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인간적인 연민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불쌍하지 않은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들의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행태들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은 악감정을 품은 캐릭터처럼 보인다.


1. 사악한 삼총사(IMF, WTO,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 지원을 볼모로 법제도를 신자유주의에 맞도록 바꾸도록 협박한다. 한국은 IMF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을 개방했다. (58~62쪽)
2. 사마리아인들은 개도국에 세금이나 관세를 낮추라고 강요한다. 그러면서 세금을 이용해 꾸며놓은 인프라는 공짜로 향유한다. (143쪽)
3. 수백년 동안 정부의 철통같은 보호 아래 육성된 산업을 보유한 사마리아인들은 과거의 일을 까맣게 잊고 이제는 정부의 모든 보호와 육성을 포기하고 완전개방, 완전자유화를 실천하라고 강요한다. (83~85쪽을 포함한 책 내용 전반)
4. 경기 침체기에는 국가 부채를 늘려 재정을 확대하고, 자연스럽게 재정 적자를 확대하고 저이율로 자금이 원활히 융통되게 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반대로 흑자 예산, 고이자율 정책, 은행의 자기자본비율 강화, 즉 '자폭'을 강요하여 개도국을 말려 죽이려 한다. (240~241쪽)


사마리아인들을 만난 개도국은 난감한 상황을 만나는데, 문제는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난다는 점이다.

1. 개도국은 1980년, 1990년대 사마리아인들의 협박을 못 이겨 자본 시장을 개방한 뒤로부터 금융위기를 훨씬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139쪽)
2. 개도국이나 잠재성 있는 중견 기업들은 사마리아 인들과 통합되면 기술이전 등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데, 이는 꿈도 못꿀 일일 뿐만 아니라 점령 자본에 의해 시장에서 공중분해되거나 기업의 알짜정보나 자본, 잠재적 가치에 대한 현실적 수익 등을 강탈당할 수 있다. (141~144쪽)
3. 개도국은 사마리아인에 따라 '경기장을 평평히 만들기 위해' 관세율을 '적정 비율'로 낮추었다가 쪽박을 찼다. 예컨대 WTO 협정 이후 인도의 평균 관세율은 71%에서 32%로 축소되었지만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7%에서 3%로 겨우 4% 줄었을 뿐이다.
4. 개발도상국이나 극빈국은 부정부패가 심하다. 재정이 부족하므로 징수 시스템을 개발할 수도 없고, 공무원에게 봉급을 제대로 줄 수 없기 때문에 징수나 감시 기능이 약하다. 그러면 공무원은 다른 수입처를 찾게 되는데, 그것이 부정부패이다. 반면 기업들은 이런 환경에 한 번 '해먹기가' 수월해진다. 다국적 자본이나 사마리아인들이 군부나 독재정권을 후원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257~259쪽)


'선진제도'의 도입도 일방적인 게임이 되기 십상이다. 저작권, 관세 자유화, 자기자본비율 등을 대체로 사마리아인들이 만들어낸 제도인데, 개발도상국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거나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게임방식'을 적용하고 싶어한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보았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행태는 18~19세기 식민지 팽창정책에 빠져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연상시킨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정책을 쓰다가 세계대전에 빠졌다. 그것은 당연하다. 식민지는 한정돼 있는데, 제국주의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빅뱅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업그레이드된 빅뱅은 무엇일까?


   
 
개발도상국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훠씬 더 느리게 성장할 것이다. 반면 개발도상국들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안적인 정책들을 허용하면, 장기적으로는 나쁜 사마리아인들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나쁜 사마리아인 부자 나라들이 팔 수 있는 시장이 크게 넓어진다.
                                                                                                  -  책, 333쪽
 
   

반대로 말하면 사마리아인들이 사마리아스러운 행태를 계속 보인다면 신시장이 말라붙어 세계대전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미래는 점점 좁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사마리아인들도 모르지는 않겠지만, 장하준의 말대로 '이데올로그'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결국 감정적 캐릭터나 구조적 캐릭터라는 수사보다는 이들이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경제주체이며, 특히 사마리아인들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권력세력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대항해서 '전선'을 만들어가느냐가 이번 책이 암시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경제가 정치의 산물이라고 한 장하준의 말에 동의한다면 '민주주의'는 경제 시스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정도의 기능은 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만일 투표가 무언가를 바꾼다면, 그들은 그것을 진작에 없애 버렸을 것이다."

좌파인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이 1987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원하는 것은 몹시 무력한 민주주의인데(271쪽),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그들의 뜻이 관철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대안이라기보다는 장하준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삽입했던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나도 '진규의 이야기'로 나의 뜻을 기탁할 수밖에 없다. 진규는 장하준의 여섯 살배기 아들로 107~109쪽에 걸쳐 비유의 모델로 인용하고 있는데, 진규 이야기는 책 전반에 두루 인용된다. 

우리가 진규를 진정 사랑한다면

진규는 여섯 살 난 우리들의 아이이다. 사마리아 인들은 진규가 네 살때부터 생활비를 벌 수 있으니 최소한 여섯 살에는 생업전선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해다. 그것이 진규의 성장을 위해서도 이로울 것이라고 한다.(197쪽) 하지만 우리는 진규가 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섯 살 진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해봤자 들고 옮기고 빼고 걷고 하는 원시적인 기술뿐이다. 이런 일의 수입은 보나마나 뻔하다. 문제는 진규가 이 일을 30년 넘게 하더라도 지금 받는 수입에서 별로 나아지는 법이 없을 것이란 점이다. (198쪽) 이웃에 사는 녹규(노키아)라는 친구는 17년 동안 인내심 있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은 덕분에 유망한 청년이 되었다. (158쪽)  특히 진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진규의 친구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부모님이 네 학비를 대느라 고생했으니 이제부터는 스스로 돈을 벌어서 대학에 다니거라'라고 가르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도 권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진규가 많은 책을 사서 보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26~227쪽) 다만 언제까지 진규의 뒷바라지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진규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의를 해야 한다. 예컨대 진규가 장학금을 획득해 학비 보조를 줄여줄 수 있다면 그만큼의 후원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학기 결과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며 진규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를 환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진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진규가 세상에 보석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부모는 우주 만큼의 공력을 들여야 한다. 하물며 진규와 같은 사람이 무수히 많이 살고 있는 세계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관심과 투자, 감시와 격려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진규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마리아인 부모는 거기에 대해서 좋은 답변을 해주지 않는 것 같다.
옆동네에서는 아버지가 죄를 지었을 때 경찰에 일러바치는 것을 '정직'이라고 가르치지만, 우리 진규에게는 아버지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특수상황 등을 감안하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논어)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 경기장을 평평하게 하는 식의 뻔한 '수학적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세계는 너무나고 크고 복잡하고 오묘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