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과 88만원]<2부>홍세화, 탈의식을 위하여

- 홍세화 강연 요지

"지금은 약자들조차도 서로 증오하고 있다. 연대의식이 강하겠나. 나는 비관적이다.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있는데, 어디서 단추를 찾을 수 있겠나."

"나는 비관적으로 본다. 20대는 기대를 안 하고 오히려 10대에게 기대를 한다.

20대는 집단적인 힘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홍세화 씨는 '비관'이라는 말을 입에 자주 담았다. 하지만 그의 비관주의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얼렁뚱땅 아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 실상이라는 것이 좌절과 절망의 실상이다. 실상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거대한 뿌리'를 만져보지 못한다는 것이 홍세화 씨의 주장이다. 12월 1일 강연의 내용을 요약했고, 방청객과의 문답을 정리했다. 방청객의 질문에 우석훈 씨와 함께 대답을 했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은 중복될 수 있다. (우석훈 강연 요지는 딸림기사 참조)


다음은 강연요지

20의 소수가 80의 다수를 지배하는 유력한 2가지 방법

 

<작은책>에서 주최한 ‘작은책 스타’ 노동, 역사, 인권, 여성, 교육 문제를 다뤘고 그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 바로 최근 출간된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철수와영희)이다.

거기서 나는 80과 20의 관계가 무엇이길래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도 80이 계속 지배되는가 하는 문제를 교육과 관련해서 썼다.

보수정치인까지 한결같이 양극화 문제를 강조하고 나섰다.

민주화 사회에서는 80이 지배해야 마땅하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희랍어로 말하면 democracy, 즉 '다중지배체제'가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인정치가 되지 못하므로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소수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판명된 지배방법이다.

1. 80을 분열시킨다. 이를 이주노동자/내국인노동자(노노갈등), 여성/남성, 숙련노동자/비숙련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등등으로 나누면 저희들끼리 분열하므로 단결되지 못한다. 이를 지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 80 스스로가 자기의 처지를 배반하게 만든다. 즉 80에 속하면서 20을 편들도록 의식화한다. 이는 학교교육이나 언론장악 등 현재 일반화된 체제의 틀로 가능하다.

 

지난 11월21일 비정규직법안이 발효되고 나서 이랜드 홈에버, 뉴코아 30~50대 어머니 노동자를 취재했다. 만 5개월째 파업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전에 하루 종일 서서 8~12시간 동안 일해서 월 80만원을 받았다. 그나마 고용은 안정되리라 생각했는데, 외주화가 되면서 계약해지에 당면했다. 그 이전에는 자동연장되면서 ‘재계약’이라는 개념조차도 몰랐지만, 계약해지에 직면했다는 현실에 처하자 그제야 노조에도 가입을 하고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홍세화씨는 역사적으로 20은 80의 내부분열을 책동하고, 80 스스로 자기의식의 배반을 하게끔 세뇌하는 과정을 통해서 80을 지배해왔다고 설명했다> 

 

취재하면서 짓궂은 질문 2가지를 물어봤다.

첫 번째 질문은 "80만원 받아서 뭐하십니까?"였다.

 절대 다수가 생활비에 보태지만 그 중에서도 3~40만원은 꼬박꼬박 사교육에 썼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계층상승의 기회가 오겠는가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두 번째 질문은 차마 지면에 싣지 못했다.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고 했다. 파업 2달 전만 해도 노조는 물론 파업의 당사자가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난 대선때 어느 당에 투표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제일 재밌었던 것은, 가장 많이 나온 것이 H당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아직 닫혀 있지 않았던 때의 ‘열린당’. 그리고 ‘민노당’ 지지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80에 속하지만 의식은 철저히 20에 치우친 증좌다.

분명히 그들 스스로 자기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 이는 대중매체와 교육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지속한다. 의식세계를 토해내는 것은 지배체제이다. 그것이 사람들을 스스로 배반하게 만든다.



자기의식의 배반자 - 이랜드 파업노동자 지난 대선 때 대부분 한나라당 투표해

 

일단 의식 안에 들어오면 계속 그것을 배반하려 드는 본성이 있다. 예컨대 무상교육은 나를 위하는 정책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의식은 처지에 따라가지 않는다. 아무도 표를 찍지 않는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입됐다. 교육과정에 완전히 차단당한 것이다.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생각해보자. 주체적이 아니라 주입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스며든 것이다.

삶을 규정하는 것은 몸과 의식이라고 할 때, 만약 몸이 건강하지 않다면 몸에서 신호를 보낸다. 몸 자체가 알려준다. 그러나 의식은 절대 그렇지 않다. 자기 처지를 배반하더라도 의식을 끊임없이 고집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자기 처지를 배반하더라도 그 의식을 끊임없이 고집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이지만, 내 의식은 자라는 사이에 누군가 내 의식을 끊임없이 지배할 위험성이 있다. 의식세계는 사회가 온통 범잡해 있다.

한 사회의 의식이라는 것은 지배계급의 것이다. 요구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체적 의식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하는 바라는 것이 태어날 때는 당연히 ‘無(무)’였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형체를 갖게 되나. 삶의 궤적에 따라서 환경에 조우하고 선택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된다. 한국사회의 교육과정이란 개인의 의식과정을 제압해버렸다.

 

<홍세화 씨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과 주요 매체 등이 만들어 놓은 '자기의식의 배반'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의식화'되어 있던 사고의 틀을 벗고 '탈의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사람을 설득하기란 정말 어렵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단지 고집에 머무른다면 설득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때 ‘고집’에 ‘합리화’가 더해진다.

누군가 사람은 합리적 동물이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합리화의 동물’에 가까운 것 같다.

믿던 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한겨레를 보던 분이 다른 아파트단지로 이사하면 몰상식한 신문으로 바꾸는 사례를 자주 접하게 된다. 경품 등이 화려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 분은 미안한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겨레의 논조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한번 형성한 의식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마주앉은 고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을 향해) 앞에 앉아 계신 선생님께 질문을 드린다.

선생님은 교장, 교감선생님이 손톱만큼이라도 변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그럼 그 옆에 앉은 학생에게 똑같이 질문할 수 있다.

학생은 선생님이 손톱만큼이라도 변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사회문화의 기본적인 성숙 없이, 구원, 믿음이라는 것은 철저히 거짓

 

자기의식의 배반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폭넓은 독서를 통해 구축한다.

2. 열린 토론을 통해 구축한다.

3. 직접 견문(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구축한다.

4. 도를 닦아서 구축할 수 있다.

 

위의 것을 조합해야만 의식의 배반을 극복할 수 있다. 책은 세계와 만나는 창이다. 책의 저자들은 어떤 환경에 처했고 어떤 인생을 선택했나. 교육과정이 책읽기를 거의 멀리 하게 하고 있다. (서양의 경우) 독서, 토론이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의 토대인 것에 비해서 우리는 철저히 주변적이다. 사회문화의 기본적인 성숙 없이, 구원, 믿음이라는 것은 철저히 거짓이다.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이 대한민국 일반계층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오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국가권력이나 대중매체, 학교교육을 뚫고 자유인의 사고에 자극을 받았을 수 있다. 대학에서 선배를 잘못 만났거나(웃음) 학교구조를 한번 세심히 살펴 보라. 근대식 학교라고 하지만 일제시대의 잔재에 불과하다. 군국주의 일본의 한국 식민화 일찍부터 정형화되었다. 군사학교가 전범인 것이다. 운동장은 연병장, 구령대는 사열대, 수위실은 위병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결국  학교라는 공간을 어떻게 민주화시킬 것인가. 교사모임, 학생회, 교과서를 어떻게 민중/민주화시킬 것인가. 교장이라는 국가주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다음은 방청객과의 문답

전 학년이 80점에서 한두 점 올리려고 노력하는 이 답답한 구조

 

40대 독자 권인숙 씨(한겨레 신문 독자) = 대안이 뭔지 막막하다. 아이들의 엄마이다. 중2 여자애가 12시 반에 온다. 아이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그런단다. 대안학교 보내기도 어려운데 출구가 안 보인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탁한다. 어려운 해법 말고.

 

- 정말 어렵다. 사회 총체적인 문제가 녹아 있다. 단초 같은 것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청춘시대 온통 억압되어 있어서, 그것이 폭발하면 겉잡을 수 없이 나온다.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 그리고 죽음의 트라이엥글. 온 세상이 전쟁을 벌이는 구조에서 모두 개인적인 해법을 찾아서 헤매고 있다. 개별적인 해법은 어차피 없다. 굳이 개인적인 해법을 찾는다면 ‘도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

부모님이 늠름한 삶을 살아가고 가치관이 정립되고, 이를 자식에게 전수할 때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게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프랑스처럼 뛰쳐나올 가능성이 있겠느냐?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있을 거라고 믿고. 기대를 하고 있다. 억압의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대학 시스템은 대표적인 우민화 정책이다. 학교, 선생님, 학부모 모두에게 억압이다. 단편적인 지식 암기다. 단순화 강조. 이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리고 만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적 위치를 알지 못하게 하는 지배권력, 줄세우기 쉽게 만드는 지배구조.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혀 좁은 내용으로 평가하는 것이 4지 선다의 특징이다.

70점, 80점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몇등이냐의 가치는 교육을 왜곡시킬 뿐이다. 전 학년이 80점에서 한두 점 올리려고 노력하는 이 구조를 보면 답답하다. 모든 학생이 엄청난 공부를 하지만 대학 가면 다 잊어버리는 구조를 보면 더 답답하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권인숙 씨는 중학교에 다니는 자식이 12시 반에 들어오면서 친구들을 따라가려면 별 도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황규선 씨 질문(인천 삼산고 국어교사) = 현실이해 명쾌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짱돌 들고 바리케이트를 쳐라! 는 명쾌하지만 그렇도록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은가. 경제학으로 설명이 되나. 막막한 벌판에 선 느낌이다. 학교에서 학생을 어떻게 만나고 20대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성찰이 빠를까? 짱돌이 빠를까? 짱돌드는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란스럽다.

 

- 고등학교 과정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교육이 너무 없다. 너무 모르는 10대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한국 젊은이는 사적 관계는 영악하지만, 사회/공적 관계에서는 맹탕이다. 외국, 특히 유럽의 젊은이들은 사적 관계에서는 순진하지만, 사회/공적 관계에서는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다.

비정규직 법안에 프랑스 학생들이 나섰다. 그것은 시민권/사회권/노동권의 문제이며.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필수 교육과정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선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제를 외우기만 하는 수준이 우리나라의 교육이다. 사회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주체적 자아’로서 깨닫는 것이며, 주체적 자아가 자신의 사회적 가치와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영어단어만 암기시키는 것만으로는 영어를 할 수 없다.

서열화된 구조 속에서 학생들의 등급을 매겨야 하는 상황이 선생님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선생님들 어깨 무겁다. 중/고등학교 선생님은 선배도 되어야 하고 동지도 되어야 한다. 

 

88만원 세대 청년 = 88만원 세대 중에서 뭉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좋은 기업에 들어갈 수 있거나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합법적인 틀 안에서 우리가 집단적으로 저항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 나는 비관적으로 본다. 20대는 기대를 안 하고 오히려 10대에게 기대를 한다.

20대는 집단적인 힘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사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 당시 386세대와 유신세대는 20대였다. 당시 20대는 정치적 억압 상황에 처해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해야 했다. 지금은 가정 꾸미고 아기 낳고 정치적 동물의 성격이 죽고 경제적 동물의 성격만 남고 말았다. 20대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정치적 억압상황이 없고, 억압의 경험이 없는데, 과연 어떤 정치적 반응을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